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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가본드 Aug 17. 2023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있잖아, 만약 음식이 되어서 나한테 먹힌다면 무슨 음식이 되고 싶어?


시심을 가득 품은 이 사차원적 질문에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좀 당황스러웠다. 물은 사람이 아주 좋아하는 음식을 말해야 할 것 같은데 그게 어디 한둘이어야 말이지. 그 많은 것들 가운데 어떤 것이 가장 우선되어야 할지 몰라서. 그리고 이런 물음은 대개 "무엇?"보다 그 다음에 나오는 "왜?"가 중요한데 그 이유가 단지 "네가 좋아하니까..." 이게 되고 싶진 않아서.




망고는 대표적인 후숙 과일이다. 나무에서 갓 따낸 상태로는 말도 안 되게 시어서 먹기 힘들다. 정말 으악 소리가 나올 정도로 시다. 동남아 현지인들 중에는 그 맛을 좋아해서 딱딱하고 눈물이 찍 나오게 신 그 상태로 소금이나 남방식 새우젓에 찍어 먹는 사람도 드물게 있지만, 대부분 그렇듯 나도 노랗게 익어 달고 말랑하게 된 망고가 좋다.

이 상태로는 시어서 먹기 힘들다

오래전 필리핀에 살 때는 시장에서 망고를 사면 항상 일부러 좀 설익은 걸 골랐다. 그건 코에 대고 킁킁거려 보면 알 수 있다. 다 익은 건 향도 달기만 하지만 설익은 건 약간 톡 쏘는 향이 난다. 그렇게 설익은 것을 3개 골라 와서 나무 바구니에 담아서 방에 놓아둔다.


그러면 망고는 서서히 익어 가며 며칠 동안 그 향을 발산하며 점점 맛이 깊어진다. 망고 향기는 온 집에 진동한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조금씩 검은 반점이 생길락 말락 하게 되는데 망고의 맛이 최고가 될 때가 이때다. 이날을 놓쳐서 하루라도 더 지나면 검은 반점은 순식간에 확 커지고 썩어 버린다(그러니 먼산보고 있지 말고 망고를 예의주시해야 한다). 그렇게 생명을 다하기 직전까지 계속 완성되어서 완전히 쓸모 없어지기 직전에야 정점을 찍는 그게 망고이다.


어쩌면 사람도 그렇지 않을까. 20살에 멋진 사람보다는 30살에 멋진 사람, 30살에 멋진 사람보다는 40살에 멋진 사람, 40살에 멋진 사람보다는 50살에 멋진 사람, 50살에 멋진 사람보다는 60살에 가장 멋진 사람이 내게는 진정 멋진 사람이다.


누군가는 성년이 되어야 어른이라 한다. 누군가는 제 손으로 돈을 벌어 봐야 어른이라 한다. 누군가는 군대를 갔다 와야 어른이라 한다. 누군가는 결혼을 해야 어른이라 한다. 누군가는 아이를 낳고 키워 보아야 어른이라 한다.


나는 잘 모르겠다. 정말 그런 걸까. 어른이 그렇게 뭔가를 하면 주어지는 자격증 같은 걸까. 어른이 된다는 건 그런 게 아니라 사람의 생애 주기가 어쩌면 늙어 죽기 직전까지 평생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은 아닐까.


한동안 사람의 매력은 20대에 최고점을 찍고 점점 쇠퇴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되면 인생의 70%는 내리막길의 쇠퇴기가 되는데, 삶을 바라보는 너무 슬픈 관점 아닐까. 삶은 어쩌면 단봉낙타의 등처럼 하나의 봉우리만 있는 아니라 여러 봉우리가 줄지어 솟아 있는 건 아닐까.


어느 나이에 도달하기 전엔 무슨 수로도 가질 수 없는 매력을 가질 수 있는 날을 기다리는 게 사람이라면, 어쩌면 작가는 나이 먹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아닐까. 뜨겁던 젊은 날의 찬란함은 또 다른 의미에서 좋지만 그 모든 것을 겪어내고 가는 길도 참 좋구나, 하나의 봉우리를 올라갔다 내려와서 무엇이 될지 모르는 다음 봉우리를 향해 가는 길도 참 좋구나 하고.


망고처럼 자신의 생명을 다하는 순간까지 계속 완성되어 가는 것이 있다면, 나 역시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층층이 쌓이고 쌓여 느리게 완성되는 매력, 시간을 품고 있는 매력, 시간과 하나된 매력. 내가 사는 세상이 그 매력을 아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음식이 되어서 나한테 먹힌다면 무슨 음식이 되고 싶어?" 답하지 못했던 그때 그 물음, 이젠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내 대답은 망고이다. 내가 완전히 죽어 버리기 전에는 아까워서 나를 도저히 먹어 없애지 못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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