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라는 말을 좋아한다. 그 말이 품고 있는 포근함이 좋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상황이 좋다. 하고 싶을 때 하고, 원하면 언제든 멈춰 설 수 있는 상황이 좋다. 나에게 '천천히'라는 건 이 모든 걸 포함한 말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만들어 주면 제법 잘 해낼 자신도 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 '천천히'는 '깊게'와 가까운 어디쯤에 있지만 한국 사회에서 '천천히'라고 하면 게으름과 가까운 어딘가에 있는 걸로 본다. 이러니 어딜 가서 천천히 하는 걸 잘한다고 하면 대개 사람들의 인식은 좋지 않다. 결국 남들이 내게 잘하는 게 뭐냐고 물으면... 대답할 게 없다.
글쓰기는 천천히 해도 된다. 요즘처럼 몸이 좋지 않으면 언제까지라고 정해 놓지도 않고 아무 말 없이 쉬어도 된다. 다행히도 존재감 있는 유저가 아닌 덕분에 어느 날 슬그머니 사라져도 아무도 모를 것을 알고, 그러다 뿅 나타나면 '아 그러고 보니 오랜만이네?'가 될 것도 안다.
이게 나에게는 매력이다. 내가 하고 싶을 때 하면 되고, 멈추고 싶을 때 멈추면 된다. 누구도 나에게 '빨리 해라' '어느 정도로는 해라' 이러지 않는다. 만약 글쓰기에서까지 그걸 강요당하고 있다면 그 압박을 하는 건 그 사람 자신이다.
쓰는 주기도 5~7일 텀이 되어 있지만 쓰다 보니 그렇게 됐을 뿐 의도한 건 아니다. 정말 좋아서 매일 쓰시는 분들도 계시고 특정 요일을 정해 놓고 쓰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그분들은 그분들의 시계가 있듯 나는 나의 시계가 있고 그나마도 일정하지 않고 빨라졌다 느려졌다 한다. 내 속도로 가고 싶고, 혹시라도 숙제하듯 쓰는 게 되길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할 때 실제로 결과가 가장 좋아진다(이게 배가본드 매뉴얼이다).
어쩌다 나중에 글태기라는 그게 혹시 내게도 온다면, 기약 없이 쉴 생각이다. 나태하게 퍼질 자유가 있는 것도 글쓰기밖에 없지 않은가. 애초에 나를 계발하려는 목적보다는 현실세계에는 없는 다양한 자유를 누리려고 시작한 일이기도 하고.
뭔가 목표했다가 포기한 것들이 있었다. 나는 나보다 당연히 나을 수밖에 없는 분들만 쳐다보다가 그 좁혀지지 않는 격차에 지치곤 했다. 어제의 나보다 0.1%씩 나아지면 한 달 후엔 3%, 1년 뒤엔 36.5% 늘어 있을 텐데, 나보다 훨씬 많이 해서 당연히 훨씬 잘할 수밖에 없는 분들과 같이 되고 싶은 그 생각 하나가 너무 컸고, 그런 생각은 고스란히 조바심으로, 또 자책으로 이어졌고, 남는 건 '빨리'뿐이었다.
오래전부터 많은 글을 써 왔고 경험 많은 분들과 나의 글쓰기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데, 나는 왜 그걸 받아들이지 못했을까. '왜 나는 저렇게 쓰지 못할까' 이런 생각 자체가 그분들이 지금의 글솜씨를 가지게 되기까지 들였던 그 모든 시간과 무수한 깨달음들, 그 모든 사색과 성찰의 엄청난 누적을 가벼이 여기는 것임을 왜 나는 알지 못했을까. 잘 쓰는 분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가졌던 나의 마음에는 교만함이 가득했음을 왜 나는 알지 못했을까. 그런 분들과 나를 비교하고 빨리 따라잡길 원하는 그 자체가 잘못 아닌가.
'나중에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라고 생각할 순 있다. 하지만 '왜 나는 저렇게 쓰지 못할까' 하는 그 지점부터 교만함이 끼어든다. 얼핏 한 끗 차이처럼 보이는 이 둘의 차이는 대단히 크다.
가장 큰 문제는 그럴수록 나의 글을 쓸 수 없다는 점이다. 잘 쓰는 분들이 계시는 수직 상방을 바라볼수록, 거기에 닿는 사다리를 찾아 헤맬수록 내면에서 나 스스로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올라와서 어떤 글도 쓸 수 없어진다. 내 어리석음이 자초한 상황이다.
가끔 이런 말을 듣는다. 당신이 써 놓은 글들을 보면 전혀 초보로 보이지 않는데 왜 자꾸 스스로를 초보라고 하느냐고. 말씀은 감사하지만, 나에게 그건 글재주보다는 글쓰기를 대하는 자세의 문제이고, 내가 생각하는 초보는 글쓰기를 대하는 태도가 성숙하지 못한 사람이다. 내가 초보일 수밖에 없는 건 그 때문이다.
'전엔 안 됐는데 되네?' 이 느낌을 좋아한다. 나도 모르게 늘어 있는 걸 뒤늦게 알게 될 때의 기분을 좋아한다. 좋아해서 오래 하다가 잘하게 되어 있길 원한다. 시간은 뭔가를 조용히 삭제하기도 하지만, 어떨 땐 아무도 몰래 조용히 뭔가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 힘으로 만들어진 사람이 좋다. 그리고 나 역시 그런 사람이고 싶다.
글쓴이와 글은 닮는다. 언젠가 내가 정말 좋은 사람이 되면 그땐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테지. '좋은 글 쓰기'와 '빨리'라는 말은 양립할 수 없다고 내가 굳게 믿는 이유이다. 글쓰기 코칭에서 말하는 잔기술들은 좋은 글을 쓰기 위해 필요한 것들의 반의반도 전달하지 못한다고 내가 생각하는 이유이다. 이것을 알기까지 걸린 5달이 헛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훗날 나도 좋은 글을 쓸 수 있게 된다면, 내 글을 읽는 사람을 꽉 쥐고 도망 못 가게 마지막 문장까지 끌고 가고 싶다. 그런 글을 쓰시는 분들은 그렇게 되기까지 오랜 수련이 있었을 테고 그런 수련은 암묵지화되어 설명 자체가 불가능한 무엇이 되었을 테니, 중요한 건 천천히 먼 길을 가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고, 당장은 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초보 치고는 나쁘지 않다는 정도의 말만 들어도 기쁠 것 같다. 세월 지나 정말 좋은 글을 쓰고 있을 그때는 주변에 물어보고 싶다. "글하고 저하고 닮았나요?"
잘 쓰시는 분들은 이미 넘쳐나고
지금 내가 하나를 당장 더하려고 애쓸 이유는 없다.
높은 곳을 향하지만
0.1도 기울어져 평지 같은 길
그곳이 내가 있을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