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싫지만 흥미로운 존재
"나도 거의 그럴 뻔 한적은 있지만 너희 둘 같은 사이는 절대 경험하지 못했어. 뭔가 나를 막았거나 훼방을 놓았지. 어떤 삶을 살던 그건 네 맘이야. 하지만 이것만 기억해. 우리 몸과 마음은 단 한 번만 주어진 것이고 너도 모르는 사이 마음이 닳고 닳게 된다는 걸. 몸 같은 경우에는 아무도 쳐다봐주지 않을 때가 와. 근처에라도 와주면 감사할 정도지. 지금은 슬픔과 아픔이 있어. 그걸 없애지 마라. 네가 느꼈던 기쁨도 말이야."
-영화 “콜미 바이 유어 네임”
올리버가 떠나고 힘들어하는 엘리오에게 엘리오의 아버지는 슬픔을 충분히 느끼라고 말한다.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려고 자신을 아무것도 느끼지 않게 만드는 낭비 따윈 하지 말라고 말한다. 빨리 치유되려고 자신을 망치다 보면 30살쯤 파산하여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줄 것이 점점 줄어든다고, 그런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라고 말한다. 어쩜 그렇게 뼈 때리는 말들만 하던지. 이탈리아에도, 미국에도 이런 말을 해줄 수 있는 부모가 몇 명이나 될까 싶어서 참 현실감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연출을 기가 막히게 했다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었다. 나로서는 충분히 슬퍼하기를 강조할 더 좋은 서사적 요소를 찾을 수가 없었으니까.
이 영화에서 말하는 사랑은 상대와 상대를 사랑하고 있는 자신을 동시에 사랑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이 가장 크고 실한 이삭 딱 하나를 가져오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게 바로 사랑이라고 했다. 빅토르 위고는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신의 얼굴을 보는 것이라고 했고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이란 인간이 혼자 있는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다른 사람과 이루는 연합이라고 정의했다. 나는 상대가 원하는 자신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정의한다. 어느 순간 내려진 정의이긴 하지만 변함없이 여전히 그런 사랑을 나누고 싶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더 좋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저 그가 원하는 사람이 되는 걸 도와주고 싶을 뿐이다. 사랑을 노래하는 가사를 보면 누구나 사랑을 갈망하는 것 같은데 사랑을 하고 있는 친구는 매일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한숨을 쉬고 눈물을 흘린다.
사랑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뭐가 정답인지는 모른다. 그런 건 없다는 걸 알만한 세대니까. 90년대생은 사람마다 다르다는 걸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그는 저런 식으로, 나는 이런 식으로 사는 게 하나도 모순적이지 않다.
하지만 사랑을 하는 방식도 사람마다 다르다는 걸 체감하는 건 또 다른 경지의 일이다. 모든 모순들은 전부 사랑하기 때문에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썸머는 비틀즈 멤버 중 링고 스타가 제일 좋다고 얘기하지만 톰은 "링고 스타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어"라고 썸머의 취향을 무시해버린다. 우리는 똑같은 요구를 공유하면서 사랑받는다는 것을 체감하기 때문이다. 당신도 나를 원하고, 나처럼 초밥을 좋아하며, 음악은 유재하가 최고라는 것을 입밖에 내어 공유하면서 상대가 나를 더, 더 사랑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막상 현실은 그에게 화를 내는 것을 멈출 수가 없고 하루가 멀다 하고 싸우게 된다. 그를 잃을 것만 같은 두려움이 무의식적으로 작용하여 더 많은 것이 비슷해지기를 강요한다. 사랑이 아니면 진정 용기를 내어 모든 것을 까발리면서 싸울만한 동기 따위는 없다. 사무적인 직장동료가 나에게 더 많은 요구를 했던 적이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된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나에게 더 많은 요구를 하도록 그를 조종하는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은 차이를 농담으로 바꿀 수가 없다는 것은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표시[적어도 사랑의 90퍼센트를 이루는 노력을 하고 싶지 않다는 표시] 일 수도 있다고 했다. 차이를 존중받지 못하는 요구들에 진정성이 실릴수록 우리는 사랑이라는 탈을 쓴 학살에 다가가게 된다. 사악하고 잔인한 대참사가 아닐 수 없다. 사랑하고 있는 이상 피할 수도 없다. 참 인간은 싫지만 흥미로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흥미롭지 않은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없으며 사랑하지 않는 것은 싫어할 수도 없다.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나를 자신의 이상형에 더 가까이 끌어들이려고 습관적인 학살을 시도한다. 가족의 사랑도 예외 없다는 것은 잠깐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다. 그렇게 서로를 학살하면서 유지되는 불안정한 관계는 피투성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종결된다.
내가 사랑의 의미에 대해 고찰을 시작하게 된 것도 사랑이란 착각 하에 서로를 학살하고 학살당하면서부터였다. 누군가와 가까워지고 그 관계를 잘 가꾸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에는 피를 다 잃고 “당신은 죽었습니다. 계속하시겠습니까?”를 직면해야만 했다. 도저히 멈출 수가 없어서 동전에 해당하는 듯한 감정을 무리하게 쓰면서 “파산”을 해보기도 했고 "딱 거기까지!" 하고 포기한 적도 있다. 지금도 새로운 게임을 진행하고 있지만 한번 해본 게임이라고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장르가 아니라서 여전히 최선을 다 해야 한다. 매번 상대의 스택도, 플레이하는 맵도, 이길 수 있는 전략도 전혀 달라지는 모두의 마블 같은 장르라고나 할까.
사랑은 언어로 옮기거나 통역할 수 없는 직감의 세계마저 작동시키는 어마어마한 힘이다. 초롱초롱한 눈빛은 나는 아직 더 많은 것을 원하고 있다고 말해준다. 좋아하는 만큼 기대는 커지고 가까워질수록 현실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 왜냐하면 내가 어떤 때 행복해하고 어떤 걸 예민하게 생각하는지, 어떤 것을 못 견디고, 무엇을 아쉬워하는지 나도 잘 모르기 때문이다. 나도 나를 잘 모르는데 상대가 알아주길 바란다. 이건 아니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그냥 왠지 모를 서운함이 턱끝까지 차오르며 상대가 이 서운함을 알아서 잘 해석해주기를 바란다. 참 터무니없는 요구가 아닐 수 없다. 사랑하기 때문에 한다는 말과 행동은 상대에게 닿으면서 갈등으로, 상처로, 때로는 따돌림으로 바뀌어서 돌아온다. 그건 나의 잘못은 아니다. 그렇다고 상대를 탓할만한 일은 더더욱 아니다. 그저 서로의 차이가 만들어낸 미세한 균열이지 누구 하나 잘못한 것은 없다. 하지만 공들여 가꾸던 관계는 내가 나이기 때문에 그렇게 파괴당하고, 사랑했던 사람은 내가 나이기 때문에 나를 떠나기 시작한다.
그때서야 나에게는 고뇌의 시간이 주어지고 나에 대해서 더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이번 게임에선 내가 뭐가 부족했을까. 너무 배려를 하다가 지쳤나, 너무 많은 것을 요구했었나, 최소한의 존중도 받지 못했었나, 다음엔 이런 걸 표현하고 공들여서 소통해야 할 텐데… 재정비를 하고 나면 다음 판엔 더 높은 피를 가지고 게임을 시작할 수 있을까?
부조리한 사람은 나에게서 부조리한 측면을 끌어낼 것이다. 그러나 진지한 사람은 나의 진지한 측면을 끌어낼 것이다. 누가 나를 수줍어한다고 생각하면, 나는 아마 결국 수줍어할 것이다. 누가 나를 재밌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계속 농담을 할 가능성이 높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中
어쨌든 사랑은 서로에게 영향을 줄 수밖에 없는 무한대 기호 같은 것이다. 내가 상대에게 준 영향은 돌고 돌아 나에게 찾아올 것이고 상대가 나를 바꾸려고 하면 바뀐 나는 또 다른 영향력을 가지고 상대를 괴롭힐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오직 인간만이 관계 속에서 혼란스러운 내면을 느끼면서 자신을 정의해간다. 누군가 우리의 말을 이해할 수 있기 전까지 우리는 대화할 줄 모른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가? 우리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나타나기 전까지 본질적으로 우리는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른다.
혼자서는 절대로 성격이 형성되지 않는다
-스탕달
엘리오와 올리버에게는 더 이상 가까워질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충분히 진전되지 못한 감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관계는 올리버의 약혼으로 더 이상의 기대를 할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하지만 벽난로 앞에서 한참을 흘렸던 엘리오의 눈물은 그가 슬픔과 아픔을 피하지 않고 충분히 느끼고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흐릿한 뒷배경이 얼어붙을 것 같은 차가운 색감이었던 건 뜨거웠던 한 여름날의 사랑과 대조되는 연출이었을 것이다.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관계 속에 있는 자신을 현실감각으로 인지한 순간의 무력한 눈물, 그 속에는 올리버를 사랑하는 마음이 한껏 담겨있어 흘려도 흘려도 끝이 나지 않았을 것이다. 서로의 이름으로 자신을 불러주길 원했던 완전한 합치의 사랑은 그렇게 “당신은 죽었습니다. 계속하시겠습니까?”를 맞이하게 되었다.
결국엔 사랑을 주는 것도 자신을 알아가기 위한 이기적인 과정이다. 내가 뭘 줄 수 있는 사람인지를 알아야 그걸 필요로 하는 사람의 동행이 되어줄 수 있다. 내가 뭘 원하는지를 찾아야 상대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이다. 역시 사랑을 받아보기 전까지 우리는 자신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모른다. 때문에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남을 사랑한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그렇게 모든 인간들은 서로를 학살하고 학살당하면서 사랑을 정의해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당신에게 사랑의 의미는 어떤 것인가?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더 좋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저 그가 원하는 사람이 되는 걸 도와주고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