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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Vagabond Nov 01. 2020

존중입니다 취향 해주시죠

낀 낀 세대 반백살


대학을 졸업하고 이 회사에서 밥벌이를 한지도 어느새 30년이 다 되어간다. 이제 스물넷 된 딸내미랑 군대 간 아들내미가 있지만 애들이 결혼할 때 손 잡고 예식장에 들어가 줄 아내와는 멀리서 서로 응원해줄 수밖에 없는 사이가 되었다.


 

나는 97세대 (1970년대에 출생해 1990년대에 대학에 입학한 세대)이다. 다들 하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서울대학교를 졸업했고 다들 괜찮다고 하는 직장에 들어가서 안정적인 가정을 꾸렸다. 옛날 사람으로 치면 인생의 1/2도 넘는 세월 동안 나는 다들 사는 대로 안정을 추구하며 사회의 기준에 맞춰서 살아왔다.


 

"너는 무슨 그런 걸 다 보니?"

"내 스타일이야~"


 

그러면서도 항상 내 스타일을 정의해왔고 취향을 가지려고 했었던 것 같다. 야구보다는 축구를. 서브웨이보다는 버거킹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 나의 부모님만 해도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 세대가 취향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그들이 취향을 가질 시간이 없이 일하신 덕분일 것이다. 그들은 나를 자랑스러워하지만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이 시점에서 나는 내세울만한 개성 하나 딱히 없는 평범한 아저씨이다.


 

그 흔한 취미 하나 없는 보통의 삶이지만 가끔 친구 놈들이랑 술 한잔 하는 소소한 재미 정도는 느끼면서 산다. 다들 가정이 있고 제 살기 바빠서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요즘은 그래도 애들 대학까지 보낸 친구들이 하나 둘 늘면서 모임이 잦아지는 추세이다. 우리에게 “요즘 세대” 나 “젊은 애들”은 언제나 빼놓을 수 없는 흥미로운 화두이다. 대체로 같은 회사에 다니는 젊은 직원들 얘기이기도 하고. 우리는 그들과 가까워지고 싶은 욕망을 기저에 깔고서 하나같이 요즘 애들은 참 예전 같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그 가까워지고 싶은 욕망은 대체로 두 가지 타입으로 나뉜다.

 

첫 번째는 그들과 다름으로 인해 불편함을 느끼고 그들을 우리와 비슷하게 변화시키려는 타입이다. 굉장히 본능적으로 익숙한 것을 찾는 타입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에게 주어졌던 사회 분위기랄까. 개인의 취향보다는 서로의 조화를 강조하는 관계지향적인 사회였다. 회사를 위해 인생의 대부분 시간을 사용하는 것이 당연했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어느 회사의 무슨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해왔다. 친구들을 만나도 대체로 일이나 회사 사람들 얘기이다. 일로 형성된 인간관계와 개인적인 인간관계를 중첩시키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직장인으로서의 자신이 그대로 곧바로 우리의 정체성으로 굳어졌다. 누군가 인터넷 기사에 우리 세대를 "조직에 들어와 20년 이상 적응하면서 본래의 색은 탈색되고 조직과 동일한 색으로 자신을 맞춰버린 세대"라고 표현했다. 그 표현에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던 것은 아마도 그 말이 너무나 정확해서였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살던 대로 계속 살다 보니 몇십 년이 훌쩍 지나버렸다. 이제 와서 회사와 연결고리가 끊어진 나 자신은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같은 속도로 흘러가는 캐리어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자신을 "식빵 세대"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동일한 모양으로 잘려있어 서로 구별이 되지 않고 주어진 목적에 매우 충실하게 자신을 맞춘 기능적인 사람들이란 생각"에서라고 한다. 이런 모습들이 그냥 우리에겐 익숙한 모습이다. 개성이 아닌 사회성이 곧 능력이었고 사회적인 자아를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이 성숙한 태도였다.


그래서 회사일과 자신의 삶에 굵은 선을 긋는 이들을 보면서 뭔지 모를 불편함에 그들을 바꾸려고 하는 것이다. 교화를 기대하며 취향을 공유하고, 그렇게 그들이 나에게 영향을 받고 나와 조금 더 가까워지길 바라는 마음, 그것이 첫 번째 타입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내가 때때로 억울함이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가 젊었던 90년대에는 우리들이야말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개인주의를 위해 투쟁하는 "요즘 애들"이었기 때문이다. 관습에 저항하고 도전을 지향했고 시대변화를 주도하는 사회분위기를 만들어갔다. 각종 "눈치 보기"가 심각할 정도로 만연했던 그때의 분위기를 아마 90년대생은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부장님 눈치를 보며 퇴근을 하지 못했던 나날들이 부조리하다고 생각되었던 우리 세대가 취했던 제스처는 권위의식을 없애고 친근하게 다가서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친근함의 방법이 잘못되기라도 한 건지 이제는 본인이 그 눈치를 보는 대상이 되었다고 다들 못마땅해한다. 극존칭과 함께 지나친 경계와 존중을 한다는 것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3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내가 신입사원 때 그 분위기 그대~로 세대 간 갈등이 재현되고 있는 것 같다. 뭐, 이유나 현상은 조금 다를지라도.



두 번째는 그들을 동경하는 타입이다. 나는 아마 이쪽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우리 모두에겐 사회와의 타협을 위해 빛나는 우리의 청춘을 어딘가에 담았어야 하는 가슴 아픈 상실이 있었다. 1986년을 배경으로 한 영화 "써니"를 보면서 눈치챘을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세대는 모두 각자의 또렷한 개성을 가지기 위해 치열하게 애썼다. 그렇게 반짝반짝 빛났을 즈음에 IMF 외환위기를 맞으며 선배들이 회사에서 짐을 쌌고 부도가 난 친구의 아버지가 길거리로 나앉았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믿을 건 나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무장해왔다. 실력이 없으면 곧 굶어 죽어죽는다는 것을 실전으로 배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반짝"했다가 조용히 잊혀져버린 우리 세대의 개성들은 그 시기 어렵게 취직한 회사에서 일종의 집착으로 변주되었다. 개인주의 성향이 강했던 우리는 마음 한 구석에 개성에 대한 동경을 구겨 넣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구겨진 그 마음들이 “존중입니다. 취향 해주시죠”를 외치고 다니는 젊은 친구들에게 매력을 느끼는 원점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나는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번 돈으로 집과 차를 겨우 살 수 있었고 필요에 따라 해외여행도 갈 수 있었다. 그래서 노력만 한다면 원하는 수준의 삶을 살 수 있다고 믿었다. 비슷한 패턴의 경험으로 인해 실제로 4,50대 친구들은 한국사회에서 성공요인을 개인의 노력과 능력을 많이들 얘기한다. 나의 동년배에게 회사에 대한 로열티는 곧 나 자신에 대한 충성이기도 하다. 80년대생은 회사 자체보다는 조금 더 팀이나 프로젝트 중심으로 열정을 쏟는 것 같다. 그리고 요즘 신입사원들은 회사라는 공동체에 크게 관심이 있는 것 같지 않다. 퇴사를 목표로 회사를 다닌다는 얘기가 수도 없이 들려오고 부업이나 다른 회사로의 이직도 굉장히 쉽게 생각한다.


그들은 어렵게 취업을 하고 나서도 회사가 자신의 인생을 책임져주지 않을 거라는 불안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불안한 에너지를 어디로 승화시켜야 할지에 대한 고민들을 매일 하고 있다. 퍼스널 브랜딩에 엄청난 관심을 보인다. 남들에게 보여지는 것 외에 내면에서는 진짜 자신의 취향에 대한 고찰을 악착같이 하고 있다. 아쉬운 건 일부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키워내지 못한 어른들의 행동으로 우리 세대가 따분하고 위계적인 꼰대로 낙인찍혀버렸다는 것이다. 슬프게도 젊은 사람들에게 40대, 50대, 60대는 별반 차이가 없는 꼰대 거나 남이다. 업무지시를 하다가 말이 길어져도, 질문을 하고 답을 기대해도, 시답잖은 말을 걸어도 나는 꼰대가 되는 경우가 많다.


“아빠, 꼰대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닌데 뭘 그리 신경 쓰고 그래.”

누굴 닮아서 맨날 저리 맞는 말만 하는지… 그런데 자신의 단편적인 기준으로 남을 재단하고 복종을 강요하는 그런 폭력성은 사회생활이 곧 30년 차인 나도 불편하기 그지없다.


나는 젊은 친구들의 입장이 이해가 간다. 그리고 인터넷에 조롱조로 기록되어 있는 꼰대들의 “대사”들도 이해가 된다. 한편으로는 선배들이 생각나기도 하면서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선배들이 요즘 애들은 정말 이해할 수 없다고 역정을 내실 때면 우리는 우리가 진짜로 공동체주의와 개인주의 사이에 낀 낀 세대임을 체감하게 된다. 위로는 여전히 눈치 볼 사람들이 결정권자로 남아있어 승진이 어렵고 아래로도 신경 써야 될 일이 결코 적지 않다. 예전에는 그저 하라고 하면 됐을 것 같은 사소한 일들에도 이 업무를 왜 해야 하는지 해석을 해줘야 하고, 해달라고 부탁까지 해야 한다. 가끔은 후배가 아닌 선배를 찾는 것이 마음이 편할 때도 있다. 반백살의 삶이란 정말 녹록지 않다.


나도 회사에 남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요즘 참 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 탑골공원에 가서 바둑을 두기엔 아직 너무 건강하고 액티브한 시니어이다. 아직 일을 잘할 수 있는 에너지와 몸뚱이가 있는데 곧 나가야 한다니. 공인중개사 자격증은 그래도 저번에 하나 따놓기는 했는데 진짜 일을 그만두게 되면 어떻게 쓰일 수 있을지 아직 잘 모르겠다. 요즘 젊은 친구들이 퇴사하고 뭘 해야 할지 고민하는 얘기들을 들어보면 거의 우리가 퇴직하고 뭘 해야 할지 고민하는 거랑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이제 와서 나 그런 고민들을 하기 시작했는데 요즘 애들은 뭐든지 참 빠르다고 할까. 체감상 변화의 속도는 점점 빨라지는 것 같다.


여전히 안정적인 정규직을 꿈꾸며 취업난에 시달리는 친구들도 많은 것 같다. 그리고 취직을 한 번도 해보지 않고서도 여러 가지 일을 하며 충분한 밥벌이를 하는 친구들도 많아지고 있다. 친구의 조카는 스타트업을 한다고 취직도 안 하고 몇 년을 돌아다니더니 얼마 전 2억의 투자유치를 받아냈다. 작년에는 우리 팀에 있던 정대리가 본인만의 시간이 부족하다며 일을 그만두었는데 지금까지도 백수생활을 잘 버티고 있다. 저번 주에는 달나라에 땅을 샀다는 직원이 있었는데 아니, 그런 흥미로운 정보는 도대체 어디에서 얻는 건지. 그들은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을 하며 돈을 벌기도, 소비하기도 한다.


"이제 나이가 드니까"를 입에 달고 사는 애들 자식들은 스무 살만 넘어가도 10대 친구들한테 "이제 나이가 드니까"를 되풀이하고 "내 나이가 되면"을 대물림한다. 인간은 그냥 그렇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또 우리가 그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처럼 그들이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것도 상호적이다. 취향 존중을 외치는 그들을 보며 나의 취향도 한번 고민해보게 되고 뭐 그런 것들이랄까.


나에게 더 입체적으로 취향들이 생겨서 회사를 그만두어도 흔들리지 않고 잘 지낼 수 있다면 내 기준에선 충분히 성공한 반백살이 되었음에 만족할 수 있다. 프랑스 사회철학자인 브루디는 취향을 수집하다가 취향은 단지 개인에만 머물지 않고 덩어리 진 하나의 또 다른 공동체를 형성하기도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가 주장하는 취향의 계급화와는 결이 다른 얘기이긴 하지만 나는 건강한 취향들이 모이고 흩어지면서 관계가 건강해지고 사회가 단단해질 거라고 믿는 한 사람이다.


영화 "인턴"과 같은 일이 우리 사회에도 가능해질 수 있을까. "Experience never gets old."라고 내가 말할 수 있는 입지가 생길 수 있을까. 어쩌면 곧 가능해질 것 같기도 하고 절대 불가능할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만약에 그 날이 오면 나는 좋아하는 일을 하며 나의 24시간을 소비하고 싶다. 원하는 만큼만 일을 하고 거기에 합당한 대가만 요구하고, 도움이 필요한 친구에게 좋은 영감이 되어주고 내 취향에 따라 조금 더 자유로이 살고 싶다고나 할까.


뭐, 잠시는 내가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유로워져서 딱히 뭘 할지도 잘 모르겠지만... 나에게 찾아올 예정인 그 날에 요즘 애들이 하는 말을 한 번이라도 되풀이할 수 있길 바란다.


"존중입니다. 취향 해주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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