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컨설팅
엄마 "으이구 저 웬수, 나가서 운동이라도 좀 하고 와"
아빠 "허허"
얼마 전 퇴직한 아빠는 엄마에게 반갑지 않은 침입자였다. 몇십 년 동안 문제없이 유지되어왔던 엄마만의 하우스 룰이 있었는데 아빠는 거기에 어긋나는 행동들을 서슴지 않고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집에서 쉬고 있는 아빠가 항상 못마땅했고 아빠는 그런 엄마가 서운했다.
아빠 "그동안 네 식구 먹여 살리려고 밖에서 내가 얼마나 굽신거리면서 사회생활을 해왔는지 당신이 알아?"
엄마 "나는 뭐 그 시간을 놀고먹었어? 애들 키우느라 나는 몇십 년을 사회생활도 못하고 살았어."
아빠 "애들은 뭐 당신이 혼자 키웠어?"
엄마 "내가 혼자 키웠지 그럼, 당신이 기저귀 한 번이라도 갈아준 적 있었어?"
아빠 "내가 없었으면 그 기저귀 살 돈은 뭐 하늘에서 떨어진대?"
엄마 "아오 시끄러워, 양말이나 빨래통에 넣어."
아빠 "허허 거 참. 이거 내 집이기도 해."
요즘 집에 있는 시간이 많지는 않지만 얼핏 들어보면 아빠와 엄마는 주도권에 대한 전쟁을 하고 있는 중이다. 퇴직 후 두 사람은 사이가 급속도로 나빠졌다. 가끔 용돈이나 쥐어줬지 우리와 교류가 크게 없었던 아빠보다 우리는 엄마에게 감정이입이 더 많이 되지만 그렇다고 아빠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당장 우리 회사의 부장님만 해도 우리에겐 한없이 매력적인 상사지만 사모님에게, 자식들에게는 모진 말을 툭툭 내뱉는 무뚝뚝한 가장이기 때문이다. 아빠도 아마 회사에 있을 때는 모두에게 인정받는 상사였을 것이다.
건강하고 젊은 은퇴자일수록 사회에서 소외되었다는 무력감이나 우울함에 쉽게 빠진다고 한다. 그와 함께 동반되는 주변과의 불협화음이 아빠를 불안하게 만든다는 것은 매일 퇴사를 고민하고 있는 나로서는 어렴풋이 이해가 된다. 갑자기 주 50시간이 공짜로 생겼으니 아파트 놀이터에 앉아있는 할아버지뻘 되는 노인들이 얼떨결에 자신의 미래로 다가오기도 할 텐데 얼마 전까지 결정권자로 대접받았을 아빠는 얼마나 큰 상실감을 느끼고 있을까.
다만 아빠는 집에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고 특별히 우리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는 노력을 해보신 적이 없다. 우리와 어떻게 대화를 이어나가야 하는지, 어떻게 엄마에게 사랑받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당연히 고민해보신 적이 없을 것이다. 회사에 다니고 있을 때에야 엄마도 매일 피곤해하는 아빠를 향해서 몇십 년째 뭐라고 하신 적이 없고 힘든 회사생활에 치이고 있는 아빠를 최대한 존중하고 이해하고 넘어갔다. 그러다 보니 우리의 대화는 점차 이상해져 갔던 것이 사실이다.
아빠 "이거 뭐야? 이런 걸 왜 사?"
동생 "..."
아빠 "집에서 핸드폰 적당히 해"
동생 "..."
아빠 "빨리 씻고 와. 자야지."
동생 "..."
나도 동생이 왜 아빠의 말에 아무런 반응도 없이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하는지, 아니 가끔은 쳐다보지도 않고 무시하는지 이해가 되진 않는다. 다만 아빠랑 대화하는 것이 딱히 흥미롭지 않다는 것만은 200%정도 공감이 된다고나 할까.
아빠 "요즘 저기 아파트를 시세가... 아까 뉴스에서... 이번 정부가... "
"아니, 아빠, 그게 다 무슨 소리야"
아빠는 먼 산을 바라보며 아빠가 관심 있는 주제에 대해 신나서 우리에게 얘기하신다. 중간중간 잘 듣고 있는지 질문까지 해가며 "수업"같은 걸 하신달까. 우리에게 아이컨택을 해가며 우리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려고 하신 적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우리 집이나 친구 집이나 아빠와의 대화가 재미없는 것은 거의 한 가지 이슈로 수렴된다. 우리는 공감대 형성이 되지 않는다. 아빠는 Listening에 문제가 있다. 퇴직 전 아빠는 비서와 운전기사까지 있어서 스스로 열린 소통을 해가며 뭔가를 할 필요가 없었다. 가끔은 비서가 해주셨던 일들을 엄마와 우리에게 기대하기까지 하신다. 언제나 본인 얘기만 하려고 하시며 혹시 우리가 어렵사리 입을 연 날에도 언짢은 대목이 생기면 바로 자르고 화제를 아빠 중심으로 돌리신다. 아빠는 우리가 하는 얘기에 딱히 관심이 없고 우리는 아까 뉴스에서 나온 얘기에 딱히 관심이 없다. 대학을 졸업한 나조차도 아빠의 얘기가 대체로 지루한데 동생은 오죽할까. 어쩌다 얘기할만한 주제가 나오는 날에도 아빠의 대화 습관은 동생으로 하여금 아빠가 그에게 훈계를 하고 있다고 느끼게 한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아빠만큼 안쓰러운 역할이 또 있을까 싶다. 회사에서 힘든 하루하루는 그래 가족을 위해서, 또는 월급이 있으니까 참고 견딘다 하지만 진짜 고통스러운 건 집에 돌아와서이다. 가족에게 따뜻한 응원을 받기는커녕 왠지 나만 겉도는 듯한 소외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의 불협화음은 의미 없는 대화들로 이어지고 서로에게 어울리지 않는 기대를 하며 스트레스를 주고받는다. 갈등만 빚어내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 전에 아빠의 퇴직을 계기로 가족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야 할 판이다.
나는 아빠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 아빠가 친구처럼 편해지길 바란다면 욕심이려나. 일을 그만 두신 아빠가 우리의 삶에 스며들었으면 좋겠고 집에서 24시간을 다 보낸 적이 없는 아빠에게 엄마가 적응할 수 있는 시간을 줬으면 좋겠다. 엄마의 삶도 아빠 못지않게 바쁘게 진행된다는 것을 하루빨리 깨닫고 이전에 삶에서 남아있던 거품을 걷어내는 시간이 최소한으로 걸렸으면 좋겠다. 엄마에게 사랑받는 방법에 대해 고민도 하고 우리와 대화를 할 때도 본인 중심에서 좀 벗어나셨으면 좋겠다. 사실 듣기 실력만 좀 올려도 아빠는 정말 괜찮은 아저씨이다. 우리가 뭔가를 얘기하면 아빠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훈계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알아간다는 생각으로 좀 존중하고 공감해줄 필요가 심각하게 있다. 그것만 해도 지금의 의미 없는 대화들은 조금씩 더 "가취"있어질 수 있고 아빠는 조금 더 사랑스러워질 것이다.
아빠, 나한테 퇴직 컨설팅 좀 받아볼래?
"이제 아빠 얘기 그만하고
우리 얘기 좀 듣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