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한 댄서의 파편들
얼마 전 나는 북경에서 나의 첫 회사를 설립하고 크루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요즘은 거의 새벽까지 수업, 미팅, 그리고 오디션의 연속인 것 같다.
내가 댄서의 삶을 선택한 건 그리 이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던 18살쯤 되던 해였다. 돌이켜보면 18살의 나는 지금의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강직했고 춤에 대한 열정이 기꺼이 나를 지배하도록 나를 온전히 내주었으며 이타적이고 민첩했다. 가진 건 딱히 없었지만 어떤 면에서는 지금의 나보다도 훨씬 멋진 꿈을 꾸는 몽상가이기도 했었다. 그 마음 하나로 여기까지 오는 길에는 참 많은 관계들이 부스러져 나갔고 그건 내가 부딪혀야만 하는 현실이었다.
슬프지만 18살에게 주어지는 건 당연하게도 수험생활이다. 하지만 나에게 수능이 주는 의미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춤을 추고 있을 때만큼 살아있는 나를 느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저 좋아서 한번 해본 것일 뿐이었는데 하다 보니 점점 빠져들었고 어느새 팀이 생기고 크루가 생겼다. 팀원들과 함께하는 순간들은 학교보다도 그 무엇보다도 나에겐 중요한 시간들이었다. 학교에 안 나가는 날들은 차차 많아졌고 나는 더 많은 시간을 춤 연습과 팀 활동에 할애하게 되었다. 춤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춤에 희노애락을 담아내는 우리의 하루하루는 어쩜 그리도 빛이 났던지.
내가 나를 찾아가는 이 과정에서 가장 먼저 으스러진 건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가까웠던 연인과의 관계였다. 15살 아름다운 나이에 시작해서 발 닿으면 빨려 들어가는 수렁마냥 우리는 서로만 보고 긴 시간을 공유했다. 당연히 결혼할 줄만 알았던 유일한 관계이기도 했다. 그런데 미래에 대한 꿈과 기대가 나를 지탱해주는 삼발이가 되어주고 있을 무렵 반대로 그의 삼발이는 점차 무너졌었다. 나와 학교생활 대부분을 함께 했던 그에게는 같이 점심 먹으러 가자고 말 걸어줄 친구가 없었다. 내가 없어진 학교생활은 너무 불안하고 불편했다. 독일로 유학을 가고 싶어 했던 그는 결국 학교생활을 버티지 못하고 알바를 구해서 집을 나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틱톡의 초기버전이었던 것 같다. BJ라는 단어조차 없을 시절에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출연자를 고용하는 브로커가 있었다. 그는 그런 알바를 구하고 그 돈으로 독일어 과외를 하기 시작했다. 한 달쯤 겪어보더니 이런 생활이 경제적으로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고 그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기로 하고 집으로 들어갔다. 그런 불안한 변화들은 곧바로 나와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그는 학교에 나오지 않으면서까지 춤 연습에 몰두하는 나에게 서운함이 쌓여갔고 점차 바빠졌던 나는 위태로운 그의 생활에 지쳐갔다. 자유를 갈망했던 그에게 아침 7시부터 저녁 10시까지의 반복적인 학교생활은 성취감을 줄 수가 없었고 그나마 그를 지탱해주었던 나와의 관계마저 흔들리자 그는 죽음까지도 고민할 만큼 무너져버렸다. 어느 날, 그는 가장 의존적이었던 나와의 관계부터 끊어내기로 했다. 그 후로도 수십 개월이 지나고 나서야 차차 내가 알던 그 미소를 되찾은 걸로 알고 있다. 이제와 서야 갑작스러운 나의 부재와 함께 피부에 와 닿았던 꿈과 현실의 괴리에서 그가 느꼈을 불안함에 대해 안쓰러운 마음이 들지만 서로를 존중해준다는 것을 경험해보지 못했던 지난날의 우리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사랑했던 만큼 우리는 서로에게 바라는 것도 많아졌고 잘 모르는 서로의 이면에 대해 인정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당연히 같은 미래를 기대해야 한다는 욕심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고 있었다.
관계의 종결이 주는 씁쓸함은 이를 통보하는 이에게나 통보당하는 이에게나 별반 다르지 않은 크기로 공유된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그 씁쓸함을 겪어야만 깨달아지는 마음으로 더 잘해주게 되는 건 그 사람이 아닌 그다음 인연이다. 그리고 그 논리는 연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었다.
처음 팀에 소속되고 팀원들이 생겼던 것도 아마 18살 언저리였다. 그저 같은 취미를 공유하는 새로운 인연들을 만나는 게 마냥 나는 반가웠고 즐거웠다. 이상한 괴리감이 나에게 불편함을 안겨주기 전까지 나는 만나게 되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진심을 다 했었다.
나는 어딜 가나 기특하고 귀여운 막내이자 후배였다. 단톡도 없던 시절, 연습하자는 싸이월드 방명록 하나하나에 바로 캔버스화를 신고 문을 나섰던 든든한 연습 메이트였다. 나까지 합류하여 6명이었던 작은 팀은 밤낮 없는 연습과 활동으로 어느새 크루라고 부를만치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의 공동체 의식은 동호회나 동아리 정도의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팀 빌딩이라는 개념조차 없었을 때였다.
나는 댄서라는 직업을 제대로 할 수만 있다면 정말 멋진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2008년에는 지금처럼 댄스 스튜디오가 많지도 않았고 춤이란 꽤 마이너 한 문화였다. 우리는 유튜브에서 영상을 다운로드하여 psp로 재생속도를 줄여가며 안무를 따곤 했었다. 댄서들의 시간은 효율적이지 못했고 들쑥날쑥한 생산성으로 인한 불안함은 공존했어야만 했다. 회사를 다니듯 주어진 일을 하다 보면 자연스레 경력으로 연결되는 영역이 아니긴 하다. 하지만 일반 회사원만큼의 꾸준한 업무시간을 투여하지 못하면서 시스템만 탓하는 건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럼에도 수많은 댄서들은 엄청난 연습시간을 감내하면서 직장인 평균 연봉에 미치지 못하는 수입에 만족해야만 했다. 다 똑같은 인간인데 저 사람은 배틀에서 챔피언을 해내고 명품으로 온몸을 뒤덮는 수준이 가능한 돈을 벌어내는데 나는 왜 여기서 이렇게밖에 못 살고 있나… 나는 일본으로, 중국으로, 미국으로 가보고 싶었고 더 큰 시장에 나를 노출시키면서 더 많이 배우고 싶었으며 조금 더 준비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어떤 이는 내가 춤을 너무 늦게 시작했다고 했고 어떤 이는 나의 재능을 비웃었다. 최소한의 예의조차 갖추지 않은 태도에도 가진 게 없었던 나는 나를 의심했어야만 했다. 나는 등을 내어줄 수 있는 전우라고 생각했는데 돌아왔던 건 어이없게도 라이벌 의식과 disrespect, 그리고 판단과 비난이었다.
재능이 부족해서 더 높은 곳으로 갈 수 없다는 것만큼은 사실이든 아니든 절대로 인정하기가 싫었다. 그래서 항상 남들보다 한 시간, 두 시간 더 연습하고 집에 가곤 했었다. 누군가에겐 헤벌쭉 웃어주는 쉬운 사람이었을지 모르겠으나 나 자신에게만큼은 끝도 없이 욕심을 내는 어려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내 실력이 늘어갈수록, 나의 목표가 높아질수록 나는 팀에서 점점 겉도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저 팀원들이 지친 줄만 알고 엉뚱한 노력도 참 많이 해보았다. 그때서야 개인의 성장이 아닌 팀이 보이기 시작했고 부스러져가고 있는 우리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리더는 월급도 주고 보험도 해결되는 학원을 나와서 굳이 새로운 도전을 하는 것이 두려웠다. 지극히도 당연한 타협이었으나 나는 결코 인정할 수가 없었다. 내가 그에게 반했던 그 순간을 꽉 채웠던 반짝반짝한 열정은 현실속에서 어느새 싸늘해졌다. 팀 빌딩을 해보려고 정말 여러 해에 걸쳐서 시도해보았다. 하지만 일당백으로 현실에 안주하는 팀원들을 설득하기엔 턱도 없었다. 그때 나는 팀을 떠나 큰 도시로 가보기로 결정했다. 여기저기 옮겨다니다가 나는 북경에 정착하게 되었다. 외로울 새도 없이 몇 년을 앞만 보고 달리다 보니 어느새 한 크루의 수장, 한 가정의 가장이 되었다. 모든 것이 불투명했던 나의 시간들을 와이프는 일관된 믿음으로 함께해주었다. 그는 나에게 베이스캠프 같은 존재가 되어주었다. 피해를 복구하고 다시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단단한 확신을 주었다. 평생을 같이 할 거라 믿어왔던 공동체는 부서졌지만 역시 누구 하나 잘못한 것은 없었다. 뜨거운 무언가를 공유했었던 그 시절처럼 서로를 시간을 다시 공유할 수는 없지만 다들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 하고 있을 뿐이다. 멀리서 다가오는 서로의 응원에 그저 만족하고 있을 뿐이다. 지금 도달한 이 시공간을 나와 함께하는 사람들은 역시나 처음 나를 이 길로 이끌었던 그들이 아닌 또 다른 인연들이다.
내가 참 좋아하는 문장이 있다.
“강이 흐른다는 의미는
모든 것이 바뀌므로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변화함으로써 같은 모습을
유지하는 것도 있다는 뜻이다”
-우주의 파편 by 헤라클레이토스
마치 매 순간 새로운 입장을 거듭하며 좋은 댄서가, 좋은 리더가 되겠다는 집념을 억척스럽게 유지해왔던 내 얘기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저 춤이 좋아서 외길을 걷다 보니 먹고 살 걱정은 안 해도 될 만큼의 시스템은 어떻게든 만들어진 것 같다.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하고 매일매일이 기대되는 시간을 보내고 있기도 하다. 선한 마음으로 희망을 잃지 않고 걷다 보면 언젠가 길이 보인다고 하지 않던가.
하지만 지금의 나를 만들어내기 위해 부스러질 수밖에 없었던 파편들을 생각하면 언제나 마음 한 구석이 비릿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 또한 나의 파편들이라는 것을 잊고 살아갈 때도 많다.
나는 늘 변하고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흐르고 있다. 그리고 그 변화들은 연결되고 통합되어 내가 유지하려는 나의 모습으로 결국 귀결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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