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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호훈 Nov 20. 2018

“키다리 아저씨는 왜 개저씨가 되었을까?”

‘개저씨’, 대한민국의 부산물 혹은 비뚤어진 욕망들

[커버이미지: 시바(견)아저씨(しばおつちやん) | 네코마키(ねこまき) 글그림, 중년 샐러리맨의 웃픈 일상을 유머러스하게 그린 리얼 아빠 공감 만화, 아저씨를 개로 표현한 것은 한국의 개저씨와 같으나 혐오는 없다]



‘아저씨’는 대한민국 현대사를 해석하는 데 큰 의미를 갖는다. 아저씨는 전후(戰後) 국가 재건의 주춧돌로써, 가족을 부양하는 가장으로서 그 책임을 다했다. 그만큼 힘과 영광도 누렸다. ‘키다리 아저씨’처럼 존경과 사랑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개’가 되었다. 조롱과 혐오의 아이콘, ‘개저씨’는 죽어야 하는가?



대한민국이 낳은 괴물, ‘혐오’


‘다이내믹 코리아 Dynamic Korea’.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성장을 보인 대한민국. 그 이면에는 정글과 같은 치열한 경쟁이 있었다. 남을 밟고 일어서는 것만이 이 척박한 나라에서 살아가는 유일한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아저씨’가 있었다. ‘아저씨’가 있는 대한민국의 조직들은 마치 ‘조폭’처럼 남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또 남의 희생을 통해 자신이 성장하는 구조였다.


과거에는 이러한 시스템이 작동하였다. 학창시절을 희생하면 좋은 직장을, 가족을 위해 희생하면 원만한 가정을, 조직을 위해 희생하면 사회적 지위와 힘, 그리고 돈을 ‘보상’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도성장의 시대가 지나자, 사람들은 경쟁 사회의 허무함에 지쳤다. 직장의 속박에서 벗어나 개성과 자유를 찾아 나서는가 하면, 관계가 주는 피로함은 초연결 사회임에도 오히려 관계를 끊는 언택트 untact 현상마저 가져왔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러한 현상의 이유와 공격대상을 찾게 된다. 그 결과, 한국 여성과 남성을 비하하는 ‘김치녀’와 ‘한남충’, 주변에 피해를 주는 아이 엄마인 '맘충', '틀니 딱딱거린다며 노인을 조롱하는 '틀딱충', 장애인을 비하하는 ‘애자’ 등 ‘혐오 신조어’가 SNS에 남발하게 되었다. 그래도 이 모든 문제의 중심에는 ‘아저씨’가 있다. 아저씨는 이 사회의 중심에서 부조리와 불합리를 몸소 기획하고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온라인상의 익명성은 이러한 용어들을 무분별하게 사용하게 한다. 그리고 변형되고 확산하며 사회 갈등과 개인의 인격마저 파괴하고 있다. 사회적 반감과 특정 집단에 대한 적대감이 범죄로 이어지기까지 하는 상황이다 보니, 급기야 ‘혐오 표현 규제법’과 같은 법적 처벌 움직임도 있다.



아저씨, 왜 ‘개’가 되셨나요?”


아저씨에 대한 반감은 개와 아저씨를 합친 ‘개저씨’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킨다. 개저씨는 지위, 나이, 권력으로 무장하고 있으며, 자신의 경험이 세상의 기준인양 강요하고 남을 배려하지 않는다. 여성이나 약자에게 갑질과 성적 수치심을 주며 남의 ‘불쾌감’을 자신의 ‘쾌감’으로 삼는 ‘민폐 캐릭터’로 40대 이상의 무개념 남성이 이에 해당한다.


특히, 개저씨는 회사에 많다. 사생활 간섭, 스킨십, 회식 강요 등 ‘악질 상사’의 단골 주역이었기 때문이다. 남성이 아닌데도 개저씨 역할을 하는 여성은 ‘명예남성', 진보적이나 권위적인 이중성을 보이는 젊은 세대는 ‘진보마초’라며 개저씨와 함께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적 해체의 시대이긴 하나, 과거엔 범접할 수 없는 ‘권위’가 어떻게 이처럼 바닥으로 떨어졌을까?


인류는 오랫동안 경륜이 있는 사람을 마을의 어른으로 모셨었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어른을 찾아가 조언이나 답을 얻었다. 사회는 단순했고, 느리게 변화했기 때문에 누가 더 오래 사느냐가 어른의 기준이었다. 하지만 오랜 역사는 인터넷을 만나며 삽시간에 변한다. 검색만 하면 세상 모든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더는 어른에게 물어볼 필요가 없다.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디지털 문화, 미디어, 기기, 소비가 발전하며, 급기야 이제는 나이 든 사람이 젊은 사람에게 물어보고 답을 구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로써 뿌리 깊은 가부장 주의와 남성 우월로 똘똘 뭉쳤던 아저씨의 권위는 먹히지 않게 되었다. 이에 더해, 건강과 죽음에의 공포, 사회와 가족에서의 퇴출에의 무력감 등은 자존감마저 무너트리고 있다. 젊은 세대와 소통하기 위한 몸부림은 ‘아재개그’로 조롱거리가 되기 십상이다. 이러한 스트레스와 권위 상실에 대한 자격지심은 종종 약자 뭉개기 또는 몰상식적인 행동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사회는, 이것이 일부 사이코패스나 또라이의 문제가 아니며, 개저씨의 죽음을 통해 바뀔 수 있다며 공격 중이다.



개저씨는 죽어야 한다?


최근, 해외 유수 대학교수의 <개저씨는 죽어야 한다>라는 글이 이슈가 되며, 개저씨에 대한 반감 정서가 세계적으로 주목받았다. 2018년 9월 기준, 대한민국 인구 51,817,851명 중 40세 이상 남성은 전체 인구 중 26.3%, 남자 전체 중 52.7%를 차지하는데 이들을 죽인단 말인가? 도대체 이 땅에서 아저씨로 살아가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동안 완벽하진 않았지만, 아저씨는 <키다리 아저씨>의 키다리 아저씨처럼 넉넉한 품과 돈으로 결핍을 채워주고 저비스 펜들턴처럼 한 사내로서 애정도 주는 존재였다. 원빈 주연의 영화 <아저씨>에서는 극강의 액션으로 남자들에게 '강한 남성성'의 대리만족을 느끼게 해주었고, 보잘것없는 나를 위해 목숨을 던지는 아저씨의 모습에 여성들을 환호하게 해주었다. <키다리 아저씨>의 헌신과 매력 대신, '내유외강 스타일리쉬 멋남'이라는 로망을 채워주었기 때문이다.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성공적인 중년 샐러리맨이 갑작스러운 무기력증을 사교댄스로 극복하는 모습을 그린 영화 <쉘 위 댄스 Shall We Dance>에서 순수하게 자신을 찾아가는 아저씨의 열정도 보았고, 내 가족을 죽인 괴한이 불법적인 사법 거래로 풀려나는 현실에 분노하여 정부를 향해 복수하는 <모범시민 Law Abiding Citizen>의 정의감 폭발 아저씨도 보았다. 이후,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 Manners Maketh Man”라는 대사로 유명한 영화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에서의 콜린 퍼스의 모습에서 매너 있고 노력한 아저씨의 매력도 보았다.


하지만 현실 속엔 <열정 같은 소리 하고 있네>의 하부장과 <미생>의 마부장과 같은 개저씨만 있다. 이렇게 ‘로망’에 찬 물을 끼얹으니, 개저씨를 죽이자고 하는 것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사회는 연결되어 있고 상호영향을 주므로, 하나의 문제만 떼어내서는 해결할 수 없다. 개저씨를 한국사회의 인습과 악습을 상징하는 키워드로 사용하여 자극적인 내용으로 인기나 얻으려 하는 것 대신,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일본에서는 남자들이 결혼하고 가정에 충실할수록 '시바견(일본 전통견으로 진돗개처럼 충성심이 높다)'의 모습으로 변해간다며, 한국의 '개저씨'처럼 일본의 중년 샐러리맨들의 웃픈 현실을 그린 만화책 <시바 아저씨>가 인기였다. 작가는 버블경제 붕괴 후의 불경기를 간신히 버텨내며 직장에선 위에 까이고 아래로 치이고, 집에서는 가족으로부터 겉도는 애환의 아버지 모습이 이젠 자신의 모습이 되었고, 그것이 ‘개’와 같았기 때문이라고 하여 큰 공감을 얻었다. 그러나 시바 아저씨에 대한 비하나 혐오는 없다.



죽여서 사는 세상이 아니라, 협업해야 사는 세상


개저씨의 개 같은 행동은 사회와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의 무게감'을 구실로 암묵적으로 용인이 되어왔다. 그러다 보니, 관습에 너무 익숙해져 세상이 변했음에도 인습과 구분을 못 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무릇 어른이란 나이가 아닌 인품과 덕망이 있어야 함을 알아야 한다. 개저씨가 다시 아저씨가 되려면, 자신이 만든 권위가 아닌 남이 만들어 주는 권위를 스스로 세워야 할 것이다. 또한 가정폭력이 대물림되는 것처럼 갑질은 반복되고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악순환이 지속하므로, 개저씨의 피해자는 바로 개저씨 자신이 아닌 개저씨의 자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변하지 않으면, 누군가 말한 대한민국 국민은 진짜 ‘개돼지’가 되는 거다.


그리고 개저씨를 아저씨로 만드는 노력도 필요하다. 공감을 이야기하지만 듣고 싶은 말만 듣는 이상한 소통은 하지 말아야 한다. 기분에 따라 세대 전체를 혐오하는 표현 대신, 차라리 대놓고 욕을 해라. 적재적소에 쓰인 욕은 사회적으로 카타르시스를 준다. 이러한 혐오 신조어는 주로 대면 관계보다 온라인에서 쓰인다. 자신의 신념과 다르다면 동조하고 혐오문화에 동참해서는 안 된다는 거다. 또한 개저씨가 직장에서 많이 보인다고 했는데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지식보다 지혜가 중요하니 세대를 넘는 협업이 중요함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작은 배려와 이해가 모이면 사회적 행복 총량이 늘어날 것이다.




[칼럼 후기]

1. 혐오 신조어들은 사실 정상적인 대면 관계의 일상에서는 쓰이지 않는다. 즉 익명성이 보장되는 온라인에서 주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나도 개저씨가 싫고, 사회에 존나게 불만 많다(이민가고 싶을 정도). 하지만 익명성이 보장되는 온라인 채널에서는 그것이 감정의 배설구로 사용되며 그것이 많이 보이니, 사람들은 마치 그게 이 시대를 지배하는 담론이고 트렌드고 정서인 줄 착각하게 된다. 정말, 진심, 솔직히 이야기 하는데 대부분의 상식적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그런거 없다. 온라인의 가짜 여론에 휘둘리지 말자.


2. '혐오'. 하나더. 사실, 이것에 대하여 누구도 진지하게 자신의 관점과 입장과 의견을 밝히지 않는다. 신상이라도 털릴까 두렵기 때문이다. 가진 것을 놓거나 뺏기게 될까봐 그런거다. 그런 와중에 #산이 의 #페미니스트 라는 노래는 정말 맘에 든다. 내용이 맘에 든다는 것이 아니다. 어떤 지식인도 말하지 못한걸 노래한 그 용기가 좋다는 것이다. 제발, 상식적이고, 이해하려고 하자. 그렇지 않으면 같이 못산다.


산이, '페미니스트' 노래 듣기


3. <개저씨는 죽어야 한다>는 글에 대한 생각. 개저씨는 죽어야 한다는 섹씨한 야마는 좋다. 관심과주목을 받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그 말이 먹히려면 글쓴이부터 죽어야 하는거 아닌가? 어떤 기준으로 대한민국 아저씨를 개저씨로 통칭하고 죽어야 한다는 건가? 그리고 글 속에서 보면 대기업과 기존 보수 정권을 없애자는 거지, 개저씨의 나쁜 현상들을 우리 함께 바꿔나가자는 의도로는 잘 보이지 않는다. 여튼 글쓴이는 저 글을 통해 주목받고 자신이 운영하는 미디어를 홍보하는 따뜻한 결론을 얻게 되었으니, 글쓴이 ‘개인적으로’ 좋은 홍보였던 것은 확실한 것 같다.


4. 소에게 쟁기질를 끌고 다니게 하기 위해, '멍에'를 지우고 '소코뚜레'를 끼운다. 평생을 그렇게 쟁기질을 하다, 소가 멍에를 벗는 날이 온다. '소가 멍에를 벗는 날'은 곧 도살장으로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저 초원의 들소도 치열한 생존의 현실에서 순간순간을 살아가고, 가축으로 태어난 소도 생존의 두려움은 없지만 평생 쟁기질을 해야 한다. 이것이 아저씨의 숙명이다.


그러다, 아저씨로서 구실하기 어려운 세상이 왔다. 아래 기사를 참고 하시라.

[중앙일보] 경제력 상실하며 가족까지 해체…사회서 단절된 삶(2016.3.18)

"한국의 이상적인 중년 남성상은 경제적 능력을 갖춘 ‘가장’의 모습입니다. 그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면 사회로부터도, 가족으로부터도 고립되는 거죠.”


과도한 스트레스와 책임감 때문에 개같은, 병신 같은 짓을 한다고 치자. 그러면 버리면 되지 않는가? 가족을 버리고 혼자 벌어 혼자 산다면 안빈낙도하며 살 수도 있을 것이다. 맘 편해진 아저씨들은 개저씨 짓도 하지 않을 것이다(그때에도 그렇다면 개저씨가 아니고 그냥 개새끼다). 그렇게 가족은 붕괴되고 부모 자식 처 다 각자 그렇게 살아간다면, 과연 사회는 유지될 수 있을까? 사회를 떠나 개인이 살 수 있을까? 아저씨는 바로 당신의 자식이자 아버지이자 남편이자 친구다. 그러므로 혐오하고 죽일 대상이 아니라 잘못된 것을 서로 이야기 안하고 개새끼 짓꺼리 안 하게 혼내야 한다. 어찌됐던,…함께 사는 세상이므로…



            ※ 브런치 매거진, 『프로그래밍화된 심리』는 심리학 '이론' 자체보다는 '개론'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제가 심리학자가 아닌 까닭에 적정선에서 다루는 이유도 있겠거니와, 심리학을 심리학 밖으로 꺼낼 때 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심리 현상을 모티브로 하여, 우리 일상의 고민과 소비의 연결고리를 찾는 데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사실 우리네 고민의 대부분은 '상품을 소비'하는 것을 넘어, 이념, 정체성, 관계, 그리고 안정감(불안 해소)까지도 소비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복잡성, 그리고 혼란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데요, 그것은 우리가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소비사회의 메커니즘과 매스미디어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 것이죠.
           즉 '불안'과 '죄책감'과 같은 심리상태는 사실, 어떤 '메커니즘'에 의해 '세상을 보는 틀' 뿐만 아니라 '생각과 행동의 방식'마저 재단 당하고 암묵적으로 지시당한 결과 느끼게 되는 '프로그래밍화된 심리'이며, 이로 인해 우리는 그 어떤 '메커니즘'에 더 강하고 깊게 지배당하게 된다는 것이 저의 관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심리를 더 객관적이고 진지하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자기 자신의 삶에 더 다가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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