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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렌콩 Jul 01. 2024

엄마라는 삶을 지나는 우리에게,  『겨울을 지나가다』

'엄마라는 삶을 지나는 그 누구라도'

  우리는 엄마라는 위대함에 고개를 조아리며 감사하다가도 번번이 잘못을 저지르기도 한다. 마치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기어코 되풀이되어야 하는 실수처럼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후회하며 점철된 감회 속에서 끊임없이 애도할 것이다. 자문하듯 내뱉는 말들은 ‘그때 그러지 말걸’, ’좀 더 다정하게 대해 줄걸’, ‘이랬다면 어땠을까?’ 등 이미 지나간 결과에 대한 한탄이며 뉘우침이다. 하지만 그건, 이루어질 수 없는 덧없는 가정들이다.

  엄마라는 이름, 누구에게나 정겨운 이름인 엄마라는 위치는 위대함과 별개로 그렇게 순탄하지만은 않다. 가족들에게 희생되어 온, 그럴 수밖에 없는 필수 불가결의 인물. 흔히 엄마를 묘사하는 표현들이다. 하지만 나를 만들어낸 엄마는 곧, 나의 삶이자 자화상의 거울이다. 그런 소중한 엄마를 보내야 한다. 조해진의 소설 『겨울을 지나가다』는 돌아가신 엄마가 남긴 흔적과 발자취를 답습하는 딸의 이야기이다. 엄마의 죽음과 애도라는 무거운 소재를, 가장 따뜻하고 무구하게 담아낸다.

  췌장암을 선고받아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는 엄마는 딸을 불러내며 자신의 유골을 납골당에 두지 말고, 살던 집에 뿌려 달라고 유언한다. 꺼져가는 생명 속에서 엄마는 줄곧 너무 춥다고 말한다. 춥다는 건 아프다는 뜻이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겨울의 아픔을 견뎌내야 하는 엄마, 죽음의 아픔을 최대한 덜 느낄 수 있도록 엄마에게 진통제를 입안에 넣어주는 것밖에 할 수 없는 딸.

  엄마가 없던 시절이 없었는데, 그 이후의 지난한 삶이란 어떤 것일까? 나의 자화상인 엄마가 이 세계에 사라지고, 그 겨울처럼 추운 시기를 과연 안전하고 목가적으로 지날 수 있을까? 엄마의 영원한 부재로 절반만 남은 것 같은 내 영혼이, 그럼에도 새로운 삶을 찾아내고 가꿔간다. 나를 낳아준 엄마의 죽음과 애도는 그 누구라도 언젠가 겪을 수밖에 없다. 다만,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며 매정한 그 운명은 당연히 누구도 알 수 없다.

  역설적으로 풀어보면 우리의 삶이란 모두 죽음으로 이르는 과정인 것이다. 하지만 소설은 엄마의 죽음 이후의 과정을 좀 더 섬세하고 농도 있게 담아냈다.

  딸 정연은 엄마를 보낸 그 혹독하고 차가운 겨울을 지내면서 자신만의 애도로 엄마의 삶을 복기하듯 상기한다. 엄마의 신발과 옷을 입고, 엄마의 옷에 묻은 흰 머리칼을 핀셋으로 소중하게 모으며, 엄마가 만들어둔 김치를 먹으며, 엄마의 칼국숫집에서 얼려 두었던 육수로 국수를 만들어내서 음식을 요리하고 먹고 만끽하는 기쁨을 오랜만에 느낀다. 엄마가 이뤄낸 소박한 삶들을 직접 따라가며 잠깐이나마 엄마처럼 칼국수 가게를 운영해 본다. 책의 목차엔 동지와 대한, 우수라는 단어들이 순차적으로 적혀 있다. 밤이 가장 길고 낮이 짧은 동지, 가장 추운 대한, 다시 따뜻해져 싹이 돋는 우수까지, 소설은 한편, 삶을 지나는 절기의 배치로 하여금 주인공과 우리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부모는 사라진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고 했던가, 하지만 자식도 사라진 부모님을 가슴에 묻는다. 흔히, 부모 자식 연은 억겁(億劫) 인연(因緣)이라고 했다. 억겁은 무한하게 오랜 시간을 뜻하는 불교 용어다. 억겁의 시간, 100년에 한 번씩 내려오는 선녀의 치맛자락에 바위가 닳아 사라지는 데 걸리는 시간으로 억겁의 인연이 쌓여야만 관계가 맺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무한대 궤도에서도 끝끝내 비로소 찾아 이어지는 인연과 천륜이라는 매개체,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시간이 공존하지만, 도저히 끊어낼 수는 없는, 자식과 부모의 인연. 얽히고설킨 그 인연을 헤아릴 수 있는 그 비유는 천륜 하나뿐이다.

  언젠가, 부모님의 상을 치른 사람이 아이를 가져 부모님이 되는 순간을 목도했다. 돌아가신 부모님이 다시 내 뱃속으로 들어와 연을 맺은 것 같다고 그가 말했다. 태곳적, 태아 시절부터 어엿하게 사람으로 자란 엄마의 자식들, 그건 우리네 모두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또다시 자식을 낳아 엄마가 되고, 부모가 되고, 윤회하는 순리처럼 반복될 진리이다.

  ‘엄마랑은 못살지만 엄마 없인 못 살아’라는 유명한 격언이 있다. 그건 아마 엄마 입장에서도 비슷할 것이다. 김수현 작가와 김혜자 배우 주연의 '엄마가 뿔났다'라는 연속극에서도 그랬다. (이 드라마는 국민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아 그 당시 시청률 40%를 넘겼다.)

  엄마란 존재가 제목 그대로 합당한 이유로 뿔이 나서 엄마라는 직책을 거부했을 때의 가족들 반응은 무척 현실적이다. 결국 방을 얻은 엄마와 따로 살며, 그제야 가족들은 엄마의 부재 속에서 돌보지 못했던 엄마의 마음들을 이해한다. 항상 당연했던 엄마는 당연한 삶이 아니라며, 엄마는 결코 참아내야만 하는 존재가 아니며 뿔이 나서 화를 낼 수 있는 그 당연한 이치를, 가족들의 삶에 빗대어 드러낸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청빈을 선택하여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수녀 테레사, 그녀의 이름 앞에 붙은 '마더'라는 존엄한 호칭은 결국 우리 모두는 엄마를 어떻게 바라보고, 인식하고 있는지에 대한 방증이다.

  뿔난 엄마가 내 시야에서 없어도, 엄마라는 나의 세계가 뚝 끊어져 사라지더라도, 대부분의 우리들은 엄마를 먼저 보내야 한다. 아니, 지나야 한다. 엄마 없이 못 살지만, 그럼에도 살아야 한다. 지나간 엄마를 추억하며.

  정연은 엄마가 키우던 강아지 ‘정미’를 산책시키며 엄마의 지나온 길을 탐독하듯 몰두한다. 그건 오롯이 살아갈 힘을 주는 정연만의 위로인 셈이다. 한편 정미의 집을 제작해 주었던 목공소 남자인 영준과의 관계도 상상할 여지를 남길 수 있는 열린 결말로 끝낸 점도 산뜻했다. 정연과 영준은 함께 엄마를 추억하며 서로를 봄처럼 위로한다. 덧붙여 회사 업무 차원으로 임대 주택의 철거를 통보한 영준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다현의 죽음을 애도하며 위로한다는 점에서 엄마의 죽음을견딘 정연의 서사에도 세심하게 맞닿아 있다. 소외된 이들의 젊은 죽음, 자살률 1위 국가에서 죽음이 시사하는 주제 의식과 절대 죽지 말라는 위로, 겨울을 지나야 싹처럼 봄이 고개를 움틀 듯이. 시린 꽃샘추위를 지나야만 반드시 따뜻해진다는 절기의 법칙을, 우리 모두 인지하고 있듯이. 그림자가 담긴 곳엔 반드시 빛이 있다는 사실을 부드럽게 내포한다.

  『겨울을 지나가다』 다소, 평범하고 동화처럼 간결한 그 제목은 결코 엄마라는 아포리즘을 쉽게 내비치지 않는다. 대신, 엄마를 잃은 혹독한 시기를 겨울에 빗대며 부득불 지나야 하는 그 잔혹한 겨울을 부각한다. 하지만 그 지난하고 힘겨운 겨울을 따뜻하게 버텨내며 끝끝내 우리를 선물처럼 위로한다.

  어느 위치에 놓아도 슬픈 문장, '지나가다.' 소설의 제목은 왜, 좀 더 간결하게 ‘지나다’가 아닐까. 그건 어쩔 수 없이 견뎌야 하는 그 마음들을 지나쳐서 결국은 가야만 한다는 진리를 은연중에 드러내는 것이다. 지나서 가야만 한다는 사실. 엄마가 없던 시절이 없었던 그 새로운 삶이 힘겹고 허무할지언정, 엄마의 영원한 부재로 아뜩하게 변해버린 내 영혼이, 그럼에도 새로운 삶을 찾아내고 다시 봄처럼 본래의 색채로 가꿔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는 지고지순한 법칙.

  어깨를 부드럽게 어루만져주는 조해진의 소설을 읽자니, 언젠가 엄마를 지나야만 하는 우리네 한 생을 따뜻하게 위로해 주는 느낌이다.

  만남 뒤엔 언제나 이별이 있듯이, 지나서 앞으로 간다면 다시 만날 수 있는 희망을 묵독하며 이번 한 생은 그렇게 웃으며 따뜻한 봄처럼 지나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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