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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담 Nov 03. 2024

흔한 하루로부터


 기승전결, 모든 일에는 흐름이 있기 마련이다. 가령 이별을 받아들이는 과정까지도. 부정하고, 분노하며, 자기 자신을 타협하고, 충분히 슬퍼한 후에야 완전한 이별을 맞이할 수 있다고 한다.

 이별뿐만이 아니라, 이와 반대로 무언가에 푹 빠지는 과정 또한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원초적인 즐거움을 시작으로 흥미를 붙였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예상치 못한 감정들이 하나둘씩 끼어든다. 이를테면 욕심, 시샘, 자책, 권태로움과 같은 것들. 미루어 짐작건대, 근래의 나는 시샘 단계 초기인듯하다.  


 번듯한 취미가 생긴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누군가 취미를 묻거나, 자기소개서와 같이 형식적으로 답해야 할 땐 그럴싸해 보이는 남의 취미를 빌리곤 했다. 독서나 운동과 같이, 너무 튀지 않는 적당한 걸로. 지금이야 책도 꾸준히 읽고 운동도 간간이 하는 편이니, 결론적으로는 새빨간 거짓말은 아닌 셈이다.

 프리 토킹에 취약한 편이다. 누군가 훅 질문하면 팍 대답이 안 나오는, 잠들기 직전에서야 할 말이 떠오르는 그런 사람이다. 말을 유창하게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있어 글쓰기란 최고의 취미이지 않을까 싶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얼마든지 생각을 늘어놓을 수 있고, 또 눈치 보지 않고 언제든지 지울 수도 있으니 말이다.


 보다 더 자극적인 걸 갈망하게 되는 게 어쩔 수 없는 사람이다. 처음엔 단출한 한 문장을 쓰는 것만으로도 어깨가 으쓱하지만, 다음날엔 누가 봐도 멋진 두 문장, 아니 열 문장은 써야 겨우 성에 찬다. 마음만큼 써지지 않는 날엔 온종일 뚱한데, 민이에게 툴툴거린 날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무고한 사람을 붙잡고 투정 부리고 싶을 만큼 마음 갑갑한 날이 있다. 이때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응어리진 마음을 속 시원하게 털어놓는 것뿐이다. 멋진 글을 읽고 나면 감탄도 잠시뿐, 부러움을 넘어 질투심까지 덕지덕지 달라붙는 요즘이다. 정확한 표현은 기억나지 않지만, 출퇴근뿐인 일상에서 좋은 글감을 찾을 수 있겠냐고, 나도 멋진 글을 쓰고 싶다며 찡찡거렸던 것 같다.




 주말 맞이 나들이 겸 데이트로 지하철로 족히 30분은 걸리는 곳에 있는 카페로 향했다. 평소의 우리였다면 집 근처 단골 카페로 갔겠지만, 날씨가 기가 막힌 관계로 급히 노선을 틀었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공간이든 무엇이 됐든 간에 따뜻한 사람, 편리한 사물과 같이 나름의 수식어가 붙는다. 우리가 찾은 이 공간은 '경치가 좋은' 정도가 되겠다. 커피도 맛있지만, 무엇보다도 창밖 풍경이 멋있다는 후기로 가득했으니.

 간혹 내비게이션이 길을 잘못 안내하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작은 공장이 줄지어 있는 인적 드문 곳, 이 길로 가면 경치 좋은 카페는커녕 아무것도 없을 것만 같은데 자꾸 쭉 직진하란다. 이리로 보나 저리로 보나 의심쩍지만, 낯선 동네인 만큼 이 자그마한 기계에 의지해야 한다.

 목적지에 도착했다며 길 안내가 종료됐다. 고개를 들어보니 웬 낡은 건물 하나가 보인다. 도저히 카페로는 보이지 않는 새파란 외관에, 풍경이라고 할 건 우중충한 나무 몇 그루 뿐이다. 아, 속았구나.


 그나마 다행인 건 카페 내부는 후기와 얼추 비슷하다. 몇 권의 책이 꽂혀있고, 사장님이 직접 그린 듯한 그림과 잘 자란 식물 하나가 보인다. 테이블은 총 10개. 남은 좌석이라고는 공중에 붕 떠 있듯이 높은 바 테이블과, 부담스러울 정도로 정중앙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테이블, 그리고 햇빛이 들지 않아 어두컴컴한 복층 테이블뿐이다. 아무래도 부담스럽고 어두운 곳보단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하는 쪽이 낫지 않을까 싶었는데, 생각 외로 더 불편하다.

 자리를 두고 우왕좌왕하다가 결국 부담감을 안고 가는 쪽을 택했다. '왜 다들 여기만 피해서 앉을까, 그렇게 별로인 건가'와 같이 잡생각이 많아지는 이상한 자리다. 아무래도 작은 카페의 중심축이다 보니 여러 소리가 섞일 테고, 덩달아 공기마저 답답할 거 같은 느낌이, 이 자리가 외면받게 된 주요 원인이 아닐까 싶다.


 엉덩이를 자리에 붙이자마자 민이가 다급하게 팔뚝을 툭툭 치며 뭔지 모를 신호를 보낸다. 연신 이어지는 감탄사와 동그래진 눈, 게다가 정면을 향한 손가락을 봐선 '앞을 좀 봐!'라는 뜻인 거 같다. 웬걸, 이 카페 소문대로 경치 맛집이 맞네. 뻥 뚫린 통유리 하나가 반듯한 액자가 되어서는, 오는 길에 본 우중충한 나무를 기막히게 만들어버린다.

 민이는 인용 왕이다. 상황과 기분에 따라 자유자재로 인용구를 툭툭 내뱉는다. 보통은 게임 캐릭터의 대사를 애용하는데, 이번엔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나 보다.

 "가장 귀한 건 흔하게 하라고 하셨죠. 선생님께서 그러셨어요. 무심하게 두라고."

 민이 덕분에 이 자리에 대한 의구심과, 꼬리에 꼬리를 물던 생각들이 단박에 정돈됐다.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아 본 적은 없지만 사람 사는 게 다 똑같다고들 한다. 성격, 재산 등 서로 다른 거 투성이니 절대적으로 똑같을 수는 없겠지만, 하루에 주어진 시간이 24시간이라는 것과, 적절한 물과 음식을 먹어야 살아갈 수 있다는 기본적인 조건은 동일하니 전반적으로는 맞는 말인 것 같다. 먹고, 자고, 울고, 웃기를 반복하는 게 인생인 거겠지.

 아마 내가 선망하는 존재들도 고만고만한 하루를 보낼 거고, 그런 하루로부터 영감을 받아 멋진 글 한 편을 완성해 낼 거다. 그렇게 쓰인 글이 질투 날 정도로 좋았던 이유는, 그들만의 무심하고도 귀한 하루를 담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내 옆을 묵묵히 지켜주고 있는 존재들을 떠올려본다. 허심탄회하게 고민을 나눌 수 있는 민이, 사랑하는 가족, 그리고 하얀 털 뭉치로 한껏 온기를 전해주는 우리 집 똥강아지들. 그들과 함께한 흔한 하루가 가장 크게 웃은 날이었음을 또렷이 기억한다.

 흔하고 무심하게 흘러가는 일상에서 그 누구도 아닌, 오직 나만이 쓸 수 있는 값진 글감을 찾아낼 것. 여전히 멋진 글을 쓰고 싶은 욕망으로 그득한 나에게 민이의 성대모사는 최고의 답변이 되어줬다. 이렇게 또 민 선생님으로부터 한 수 배워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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