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달 10일, 한 달 동안 지불해온 나의 시간과 노동의 대가가 잠시 스쳐 지나가는 날이다.
월세부터 관리비까지, 월급의 약 25% 정도가 집과 관련된 지출로 빠져나간다.
간혹 주위에서 매달 꼬박꼬박 나가는 돈이 아깝지 않냐며 전세로 알아보라고 권해주기도 하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월세가 더 좋다.
전혀 상관없는 얘기일 수도 있는데, 왠지 모르게 나에게 있어 전셋집을 구한다는 것은 이곳에 정착하겠다는 일종의 포부처럼 느껴진다.
타지에서 생활한지 2년 차. 누군가 동네 맛집을 물어보면 추천해 줄 수 있을 정도로 제법 익숙해졌다.
집 근처 카페나 공원 그리고 새로운 인연들. 애정 하는 장소와 이를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 덕분에 좋은 추억이 쌓여가고는 있지만, 나고 자란 동네가 문득 그리워질 때가 있다.
그중 뭐니 뭐니 해도 음식. 엄마 아빠의 손맛이 담긴 집밥은 물론이고, 집 바로 앞에 있는 닭강정집이나 조금만 걷다 보면 나오는 야채곱창집이 간절해지곤 한다.
자취방 근처에도 팔긴 하지만 몇 군데 돌아다녀 봐도 그만한 맛을 내는 곳이 없어서, 가끔은 본가 쪽 사장님들에게 자취방 근처에 2호점을 내달라고 생떼를 부리고 싶어진다.
생각해 보니 아빠도 나와 비슷한 증상을 호소했던 것 같다.
별일이 없으면 주말마다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티브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아빠와 밥을 먹는데, 그때마다 듣는 아빠의 단골 멘트가 있다.
"아빠는 나중에 시골 가서 살 거야"
고향을 떠난 후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귀향하여 산에서 생활한다는 자연인. 결혼하고 일을 하기 위해 전라북도에서 상경한 아빠는 자연인의 말에 공감하는 듯했다.
아빠도 막 상경했을 때 서울 음식이 낯설었다며, 그중에서도 특히 김치가 가장 입맛에 맞지 않았다고 한다.
곧이어 화면을 가득 채우는 자연인의 널찍한 밭을 보더니, 훗날 아빠도 고향으로 돌아가 소소하게 농사를 짓고 싶다는 말을 덧붙이신다.
그로부터 두세 달 정도 흘렀을 때인가. 오랜만에 아빠 가게에 들렀는데 아무것도 없던 뒤뜰 화단에 처음 보는 초록 생명체로 가득했다.
배추와 아욱 그리고 상추에 쪽파까지.
맨 왼쪽에 자리 잡은 배추는 벌레가 잎을 조금 먹어버렸다고 시무룩해 하시다가도, 반면 그 옆에 아욱은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며 흐뭇하게 바라보신다. 그리고 뒤쪽에 펼쳐진 상추와 쪽파는 심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크기가 조금 작다며, 애정 섞인 목소리로 하나하나 소개해 주신다.
자연인의 밭에 비해 한없이 아담한 크기이지만, 아빠는 이 작은 텃밭에서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한 예행연습 중일 지도 모르겠다.
정확히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으나, 머지않은 날에 지금보다 넓고 서울보다 친숙했던 토양에서 여러 작물과 더불어 아빠의 뿌리를 내릴 것만 같다.
여느 주말과 같은 아침, 밥 먹으라는 엄마의 목소리에 식탁에 앉아보니 김이 모락모락 나는 된장국이 제일 먼저 보인다. 그것도 아욱이 든 된장국.
아욱을 첫 시작으로, 아빠의 다음 수확 목표는 속이 꽉 찬 배추다.
적절하게 소금으로 절인 후 최고로 맛있는 김장김치를 만들어 먹기로 했는데, 이번 김치만큼은 어느 때보다도 아빠의 입맛을 꽉 사로잡으면 좋겠다.
과연 나는 어디에서 정착하게 될지, 혹시 아빠처럼 맛있는 음식을 따라 발걸음이 향하지는 않을까 생각해 보다가 가장 유력한 한 곳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가족과 함께여서 더 맛있었던 그리고 진한 추억이 곁들어진 그곳이, 역시 마음속 1순위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