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급하게 부르는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갈 길이 바쁜데 무슨 일이람. 민이의 손끝에는 노란 꽃 한 송이가 덩그러니 피어있었다. 너무 예쁘다며 웃고 있는 민이, 사실 별 감흥은 없었지만 민이의 어조에 맞춰 어물쩍 넘어가버렸다. 참 예쁘다, 그런데 다음 목적지까지 얼마나 걸리더라?
정신없는 출근길과 퇴근길, 대체로 앞을 보고 가기 바쁘다. 한 방향으로 빠르게 걷는 틈 속에서 잠시 한 눈이라도 팔아버리면 뒤꿈치를 밟혀버리기 십상이다 보니, 순순히 그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앞사람의 뒤통수가
세상의 전부가 되어버리곤 한다.
어딜 가나 길 위에서의 선택지는 한정적이다. 거리를 따라 걸음폭을 좁힐 것인지 혹은 널찍하게 걸을 것인지 정도의 차이이려나. 그러다 보니 속력을 내는 사람들 속에서 그 값이 제로인 존재가 등장하면 나도 모르게 시선이 가게 된다. 저 사람은 잘 가다가 갑자기 왜 멈췄을까.
1 공원에서 멈춘 할아버지
집 바로 앞에 작은 공원 하나가 있다. 분수대를 지나 구름다리를 건너 쭉 직진하면 산책 코스 끝. 점심밥을 먹고 나온 사람들로 북적북적하다. 맨발로 흙을 밟으며 느릿하게 걷는 사람, 팔다리를 본격적으로 휘둘리며 땀을 흘리는 사람도, 나처럼 종점까지 설렁설렁 걷는 부류의 사람들도 보인다. 구름다리를 벗어나자마자 이탈자 발생!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하던 할아버지 한 분이 장미꽃에게 걸음을 맞추기 시작했다. 빨간 장미 가까이에 얼굴을 두고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그렇게 5월의 향기를 잔뜩 가져가셨다.
2 개찰구 앞에서 멈춘 아저씨
괜히 개찰구 앞에서는 마음이 급해진다. 딱히 급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지하철을 놓치면 괜히 심술이 난다. 다들 카드를 찍고 계단으로 내려가기 바쁜 와중에 아저씨 한 분만 멀뚱멀뚱 서계신다. 아저씨의 눈높이에 걸려있는 액자 하나,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 풍경을 조용히 그리고 유일하게 눈에 담아 가셨다.
결국 공원의 끝자락과 지하철에서 걸음을 멈췄던 사람들과 다시 마주쳤다. 분명 그들보다 앞서 도착했는데 어딘가 손해 본 기분이다. 꽃의 향기를 알고 그림의 정체를 아는 사람들, 겨우 반박자 차이로 더 많은
세상을 본 부러운 사람들이다. 과연 액자 속에는 어떤 그림이 그려져 있었으려나.
뜬금없이 길을 멈추는 사람들 덕분에 덩달아 여유가 생긴다. 잠시나마 꽃잎과 액자 끝에 시선이 닿았던 것처럼, 뻣뻣하게 굳은 고개를 풀어주고 닫혀있던 오감을 조금씩 열어준다. 이름 모를 노란 꽃이 머릿속에 계속 맴도는 건 아마 그날 민이가 붙잡아준 덕분이겠지.
또다시 별다를 것 없는 하루가 흘러간다. 사람들 틈 속에 발을 맞춰 걷고, 얼굴 모를 사람의 뒤통수를 보고. 하지만 오늘은 조금은 다른 날일지도 모르겠다. 집 주변 카페 대문에 붙어있는 종이 한 장이 눈에 들어왔으니까.
'커피 수업 모집'
향기를 맡을 여유쯤이야 누구나 있는 거니까. 옷자락에 커피 향이 폴폴 나게끔 아주 진하게 그리고 잔뜩 배어 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