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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담 Jun 23. 2024

그냥 그렇고, 괜찮았던 하루



으앗, 쓰다.
 


하나에 500원이라는 문구에 홀랑 넘어가 두 개나 집어온 오이가 이렇게 배신을 한다. 기본값에 겨우 한 개를 더 얹은 것뿐이지만 자취생에게 있어 꽤나 큰 결심을 내린 결과다. 부지런히 먹지 않으면 

냉장고에서 말라비틀어질 테고, 또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묘한 죄책감에 빠질게 뻔했다.



오이는 깜짝 이벤트 같은 거였다. 매 끼니마다 챙겨 먹는 샐러드에 초대된 특별 게스트 정도랄까. 내심 똑같은 밥상에 싫증이 났는지, 그리 대단한 식재료도 아닌데 괜히 신난다. 

양배추, 양상추, 로메인, 치커리, 방울토마토, 그리고 얇게 썬 오이를 올린 뒤 발사믹 소스를 빙 둘러주면 특식 완성이다.



지금껏 오이 맛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적어도 오이가 쓰다고 느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사과는 맛있고 맛있으면 바나나라는 공식처럼, 오이하면 아삭하고 시원한 게 나에게는 일반적이었으니까.

도대체 이 오이는 왜 쓸까.


아무래도 엉뚱한 손님을 초대한 거 같다.  



                                        *



요즘 커피를 배우기 시작했다. 덕분에 일주일에 한 번, 수요일 저녁마다 아주 진한 에스프레소를 한 잔도 아닌 여러 잔을 들이켠다.
"맛이 어때요?"
세상엔 공짜는 없다. 커피 한 모금의 대가로 맛에 대한 표현을 지불한다.
"음... 맛있어요!"
질문을 듣는 순간 나의 대답은 정해졌다. '맛있다'라는 정직한 세 글자, 딱 거기까지다. 이 짧은 평을 곧이곧대로 내뱉어버리면 성의 없어 보일까 봐 괜히 아무 의미 없는 감탄사로 시간을 질질 끌어버린다. 음, 그러니까 맛을 표현하는 게 어렵다는 일종의 칭얼거림이다.



태생부터 어떠냐는 질문을 어려워했다. 안부와 의사에 대한 물음의 답으로 아주 높은 확률로 '그냥 그래요'나 '괜찮아요'를 외쳤고, 실은 여전히 그 말버릇이 남아있다.

뭐가 그냥 그렇고 또 뭐가 괜찮은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문자 그대로 그냥 그렇기도 하고 괜찮기도 한 나름의 정직한 표현인 셈이다.
 


커피 선생님은 나의 이런 약점을 알고 계신 게 분명하다. 묻고 또 물으며 생략된 주어를 악착같이 찾아내신다. 맛이 좋다는 대답에서는 무슨 맛이 좋은 건지, 그리고 향이 좋다는 대답에선 어떤 향이 좋은지를 파고드신다.


(그러게요, 이게 무슨 맛이고 어떤 향이려나요...)


고민을 따라 이리저리 굴리는 눈동자를 보셨는지 다양한 선택지를 주다. 단맛, 쓴맛, 신맛, 고소한 맛, 꽃향, 나무향, 자몽향 그리고 타이어 끄는 향까지.

이 중 가장 근접한 표현으로 골라 더듬더듬 내뱉으며  뭉뚱그린 느낌에게 이름을 붙여줬다.

그 이름은 고소함과 견과류 향이었다.



                                        *                      



처음으로 오이 맛에 대해 파고들었다. 오늘 식탁에 올려진 이 오이의 맛은 약을 먹을 때 느껴지는 쌉싸름함과 닮았고, 나는 그 맛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듯하다.

쓴맛을 눌러줄 묵직함이 필요한데, 예를 들면 치즈 같은 거로.

아, 오이 토스트를 만들어 볼까?



바삭하게 구워진 식빵 위에 크림치즈를 듬뿍 펴 바르고, 소금에 잠시 절여둔 오이를 차곡차곡 올린다. 그리고 올리브유와 후추로 마무리해서 한 입, 더 이상 쓴맛은 없었다.
그간 알고 있던 오이의 아삭함과 치즈의 고소함뿐이다.



커피 한 잔으로부터 많은 걸 배운다. 

좋아하는 취향과 이를 표현하는 방법, 그리고 그 취향에 다가가는 법까지. 결국 나라는 사람을 알아가게 된다.


이번에도 무사히, 크림치즈 덕분에 냉장고 무덤은 생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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