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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보카도 Mar 14. 2022

<제인 에어>보다 훨씬 발칙한 <베네데타>

여성 캐릭터 중 제일 발칙한 캐릭터, 베네데타


<제인 에어>는 1847년 영국의 샬롯 브론테가 남자 필명으로 내놓은 소설이다. 어린 시절, 제인 에어가 지니는 의미도 모른 채 <제인 에어>를 무지 따분한 소설로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제인 에어에 대한 따분한 기억을 안고 있는 내가 최근 영화 <제인 에어>를 다시 보았다. BBC 드라마가 제인 에어를 훨씬 잘 구현했다고는 하나 그 못지않게 19세기 영국의 풍광을 제대로 담아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캐릭터 설정은 그 시대 치고 독립적이고 당당한 여성 캐릭터로 설정해놓고 바보같이 유부남(물론 모르고 속았던 것 맞지만)에게 빠져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바보 같은 캐릭터로 만들어놓았나 싶었다. 로체스터가 실제로 제인 에어에게 빠지는 이유는 그녀의 당당한 매력 덕분이다. 사람 감정이 이성대로 되지 않는 건 어찌할 수 없는 일이지만 <제인 에어>의 캐릭터가 발칙한 데에 비해 스토리는 전형적인 로맨스여서 아쉬웠다. 그래도 1847년에 나온 소설치고는 금서로 지정될 만큼 센세이셔널했으니 발칙한 여성 캐릭터 등장 자체만으로 반가워하는 데에서 그칠 수밖에.




그다음 소개할 영화 <베네데타>는 <제인 에어>보다 훨씬 발칙하다. 실제로 17세기에 이탈리아 수녀원에서 일어난 실존 인물의 이야기를 각색한 영화다. 영화 <베네데타>에는 베네데타라는 수녀가 등장하고 그녀와 수녀 바르톨로 메아와의 사랑 이야기가 그려진다. <제인 에어>가 집필된 19세기에 비하면 17세기에는 여성의 인권 자체가 처참한 수준이었다. 실제로 영화에서 바르톨로 메이아는 아버지에게 강간을 당하고 오빠에게 강간을 당했던 전력이 있다. 베네데타는 바르톨로 메이에게는 구원자와는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렇게 험한 꼴을 당했는데 부유한 베네데타 가족이 기부금을 대신 내주며 바르톨로 메아를 수녀원에 입성시켜줬기 때문이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서 베네데타를 사랑하고 헌신하는 그녀의 모습은 영화 <가장 따뜻한 색, 블루>의 아델의 모습과도 유사했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 역시 과감한 전라신으로 유명하지만 <베네데타>는 중세 수도원을 배경으로 전라신을 찍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2014년, <가장 따뜻한 색, 블루>가 나왔을 때도 센세이셔널했었다. <베네데타>는 상상 그 이상으로 발칙하다. 성흔 하나로 30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원장 수녀까지 올라가며 신비주의를 콘셉트로 전염병이 도는 세상에서 주로 추앙받게 된다. 당시의 흑사병은 코로나보다도 더 심했기에 민심은 그야말로 도가니 그 자체였을 것이다. 바톨로 메아와의 사랑은 해피엔딩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실화에서도 베네데타는 바르톨로 메아와 헤어지고 수녀원으로 돌아가서 70세까지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고 알려진다. 죄질이 나빴던 탓에 40년 동안 식사를 바닥에서 하는 등 무시와 차별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수도원에서 수녀로 생활하길 원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녀 자신만 알지 않을까. 



<제인 에어>의 결말이 로체스터와 제인 에어의 사랑이라면, 즉 주체적인 여성이 결국은 사랑의 덫에 빠지고 마는 이야기라면 <베네데타>는 주체적인 여성이 사랑의 덫을 만들어서 상대로 하여금 그 덫에 빠지게 만들고 나서 사랑보다 더 소중한 무언가를 찾아서 떠나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종교적인 해석까지 가미하자면 실낙원을 연상하기도 하지만 '주체성'이라는 키워드에 입각해서 해석한다면 주체성이 온전히 발현된 이야기라고 볼 수 있겠다. 그리하여 <베네데타>는 '사랑' 이야기가 만연한 콘텐츠들 중에서 단연 '발칙'하고 '압도'적인 콘텐츠라 할 수 있겠다. <베네데타>에는 집단 심리에 휘둘리는 사람들의 심리를 엿볼 수 있고 베네데타의 발칙한 동성 관계 때문에 단숨에 끌어내리려는 교권의 비열함도 엿볼 수 있다. 교권이 그녀를 화형 시키려 했을 때 대중이 몰려들어 베네데타를 구하려는 대목은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무시무시한 흑사병 앞에서는 교권도 무용지물이 되는 양상은 코로나로 인해 일상이 망가진 현재의 모습을 조망하기도 한다. 여성의 인권이 바닥이었던 17세기를 버텨낸 베네데타의 동성애는 광기 어린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그 사랑마저 도구로 이용해서 진정한 성녀가 되고 싶었던 광녀의 광기였을까. 해석은 각자의 몫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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