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 유물 발굴, 2014년 취준생의 대학수업과제2
트라시마코스는, ‘정의란 강자의 이익이다’라고 주장했다. 어떤 정체의 국가에서나 강자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법을 만들고, 그것이 그 국가의 모든 사람에게 이로운 것이라고 선언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그 어떤 기술이나 다스림도 자기에게 이득이 되는 것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고, 다스림을 받는 쪽에 이득이 되는 것을 제공하며 지시를 내린다고 반론했다. 즉, 더 약한 자의 편익을 생각하지 더 강한 자의 편익을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나도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모든 정의가 강자의 이익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재 도서관에 앉아서 천편일률적인 자격증 공부를 하고 토익 공부를 하는 대학생들의 모습은 강자가 되어 남들보다 더 많은 이익을 누리기 위해 부단히 애쓴다고 볼 수밖에 없다. 물론 자신의 본질에 대해 고찰한 후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단순히 강자의 이익을 추구한다고 폄하하는 것은 옳지 않다. 사회에서 안정적인 삶을 위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을 준비하는 것은 개인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강자를 위한 이익과 약자를 위한 이익 둘 모두 넓은 의미에서는 정의라고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스펙을 쌓는 것에 대한 관점 역시 두 가지다.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에 부합하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높은 연봉을 받는 기계가 된다는 부정적인 관점과 자신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누리기 위해 사회가 요구하는 바를 명확하게 인지하고 미리 대비한다고 보는 긍정적인 관점이다. 트라시마코스와 소크라테스의 대화에서 무엇이 올바르다는 것이 규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혼란이 생겼듯이 스펙 쌓을 것을 권하는 우리 사회가 올바른 것인가 스펙 쌓기에 혈안이 된 학생들이 올바른 것인가에 대해 가타부타해서는 안 된다. 올바르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관점이 설정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영화 <월터의 상상이 현실이 된다.> 의 주인공 월터에 대해, 20년간 한 회사에서 사진을 인화하며 자신을 잃고 살았던 월터가 여행을 통해 자신을 되찾았다고 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현실 도피적인 영화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그들은 각기 다른 상황에서 다른 생각을 하면서 살아왔으며, 모든 판단의 기준은 이러한 삶의 배경에 그 뿌리를 두기 때문이다.
월터가 20년 동안 일한 매거진 회사 라이프지의 실제 기업 모토는 ‘세상을 보고 무수한 장애물을 넘어 벽을 허물고 더 가까이 다가가 서로를 알아가고 느끼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목적이다.’이다. 이 문구에서 무수한 장애물과 벽은, 위에서 언급했던 ‘각자의 삶의 배경을 근원으로 한 판단의 기준’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허문다는 것이 각자의 기준을 파괴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인 것은 아니다. 바로 이어서 나오는 모토에서 알 수 있듯 이러한 기준 모두를 알아가고 느껴서 서로를 이해하자는 의미인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 각자의 판단에 정확한 답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나는 소크라테스의 물음 ‘올바르게 사는 것이란 무엇인가’ 에 대한 대답은 영원히 내릴 수 없다고 본다.
만약 우리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배려한다면 분쟁이나 갈등은 쉽사리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트라시마코스의 분쟁은 서로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일어난 충돌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 중 어느 생각이 답이라고 단정 짓는 것 또한 옳지 못하다. 두 사람의 주장 모두가 완벽하지 않지만 일부에는 공감하고 다른 일부에는 공감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신입생 시절 스펙 쌓기에 혈안이 된 사람들을 보며 혀를 내두르던 나도 졸업반이 되면서 내 어두운 미래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조금 더 밝은 미래를 위해 사회가 요구하는 조건들을 맞추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사회에 불만을 가지며 불합리하다고 주장하던 내가 사회가 요구하는 조건들을 하나둘 쌓아가는 것을 보며 주위에서는 철이 들어간다고 말했다. 이제야 회피하지 않고 정면승부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내가 철이 든 것은 아니었다. 나는 옳다고 믿는 방식대로 살아가고 싶은 삶을 살아왔지만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준에 입각하여 나를 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