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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 라디오 Oct 13. 2021

일기

 이런 감정 얼마 만인지. 사랑일까? 잡힐 듯 잡힐 듯 바라만 본다. 그 사람이 보고 싶다. 이제 이런 감정 안 올 줄 알았는데, 내게 아직 그리움이 남아 있나 싶어 기쁘다. 그냥 생각만 해도 좋은 걸 어찌하나. 남편 처음 봤을 때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오래전 일이니 그렇겠지. 요 며칠 잠을 제대로 못 잤다. 그 사람 얼굴이 아른거려 지워지지 않는다. 어제는 그 사람과 한참 얘기 나누는 상상을 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눈이 마주쳤을 때, 그 느낌 짜릿했다. 그 사람도 내게 사랑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행복했다. 꼭 껴안고 싶었다. 그래, 껴안고 싶었다. 하지만 자제했다. 아직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조금 더 있다가 말하려 한다. 그때는 그 사람도 내 마음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무쪼록 그런 날이 빨리 왔으면 한다. 오늘도 쉽게 잠들지 못할 거 같다. 지금 일기를 쓰면서도 머릿속은 온통 그 사람뿐이다. 내일은 어떨까? 어떤 옷을 입고 나갈까? 화장을 좀 짙게 해 볼까? 첫마디를 어떻게 할까? 표정을 어떻게 지을까? 이런 공상에 나는 오늘도 행복함을 느낀다. 남편에게 조금 미안한 감정이다.



 그 사람과 오랜 시간 얘기를 나눴다. 함께 하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 없다. 별다른 내용도 아니었는데, 신이 나 떠들었다. 같이 있으면 그걸로 좋은 걸 어찌하겠는가. 이제 자연스럽다. 그 사람이라면 셋방살이라도 행복할 거 같다. 셋방살이해 본 적 없기는 하지만. 어쨌든 같이 한다는 생각만으로 맘이 편하다. 나와 그 사람은 이제 영혼으로 하나가 된 느낌이다. 눈빛에서 나에 대한 감정을 느꼈다. 그 사람도 알고 있다는 생각이다. 아니 내 예감이 맞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그런 눈길을 보낼 수 있는 것이다. 너무 따뜻해 간장이 녹을 지경이었다. 어릴 적 소녀로 돌아간 심정이다. 너무 좋고, 너무 행복하고, 너무 소중했다. 행복해.

 오후 친오빠와 전화 통화했다. 또 싸운 모양이다. 싸움은 내가 한 수 위 맞다. 조언해주려다가 티 날까 봐 그만두었다. 요즘 남편과 다툼이 잦은 게 사실이다. 툭하면 별것도 아닌 일에 언쟁을 벌인다. 서로 신경이 날카로운 게 사실이다. 살짝만 건드려도 날 서기 부지기수다. 며칠 전 다툼 이후로 서로 남 보듯 하고 있다. 아침 차려놨는데도 그냥 가버렸다. 그럴 때는 정말 짜증 나고, 보기 싫어진다. 얄밉다. 남편만 아니면 한 대 쥐어박고 싶다. 미안했는지 저녁때 와인 한 병 사 왔다. 소고기 굽고 아스파라거스도 준비했다. 오래간만에 차분한 저녁이었다. 와중에 그 사람 생각이 났다. 이제 시도 때도 없이 생각난다. 남편에게 죄짓는 기분이다. 에이 몹쓸 남편인데 뭘, 이런 생각이 들다가도 어쩌겠어 싶어 마음을 내려놓게 된다. 욕심? 욕심일까. 요즘 이런 생각이 자주 든다. 욕심, 나는 욕심내면 안 되는 건가? 나도 욕심부리고 싶은걸. 아니 이건 욕심이 아니다. 새로운 삶을 꾸린다고 하면 이거야말로 욕심일까? 남편과 그 사람 얼굴이 번갈아 가며 스친다.



 오늘도 전화에 불이 났다. 시도 때도 없이 울린다. 내팽개치고 싶을 적이 한두 번 아니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도 싶다. 때론 이렇게 살아 뭐하나 생각이 들기도 한다. 교도소도 이런 교도소가 없을 거다. 왜 그러시냐고 따졌다. 그러지 말라고 하신다. 되풀이 그러지 말라고 한다. 미칠 지경이다. 이런 소리를 듣고 있으면 피가 거꾸로 솟는다. 남편 얼굴이 떠오른다. 뭘 어떻게 해야 할까. 시어머니 입장을 이해 못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이건 정도가 심하다. 피를 말린다. 예전처럼 머리끄덩이라도 잡는 거라면, 억울하지 않을 거다. 이건 피를 말린다. 시어머니 얼굴 이면에 감춰진 표독스러운 독기가 이제 무서울 지경이다. 전화기 속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내 몸을 훑을 때, 모골이 송연해진다. 정말 싫다. 이런 지경인데 남편은 천하태평이다. 상황을 전해도 듣는 둥 마는 둥 시큰둥하다. 그래서 더 열 받는다. 그리고 한다는 말이, 다 네가 벌인 일이란다. 정말 어떻게 하고 싶다. 밉다. 아주 밉다. 안팎에서 나를 옥죄니 버틸 여력이 없다. 이러다 쓰러지는 게 아닌가 싶다. 시어머니야 그러려니 하는데, 남편까지 그러고 있다. 일거수일투족 지켜보는 기분이다. 점점 힘들어진다. 어떻게 풀어야 하나. 결심해야 하나. 모든 걸 털어놓고 다시 시작해야 하나. 고민이 이만저만 아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뭘까? 털어놓는 거? 모른 척 참는 거? 결심이 서지 않는다. 욱하는 마음에 인생을 걸 수는 없으니까. 남편의 눈이 두렵고, 시어머니 전화 또한 두렵기만 하다. 그냥, 그냥 일이 커지지 않길 바랄 뿐이다.



 아지트를 청소했다. 며칠 비가 온 탓인지 흙이 꽤 쌓여 있었다. 갖고 간 모종삽으로 퍼냈다. 다듬었더니 그럴싸해졌다. 깔개를 깔고 앉았다. 친구가 일이 있어 함께 하지 못했다. 그래서 오늘은 혼자였다. 늘 어깨를 함께 하던 존재가 없으니 허전하다. 그래도 하늘이 좋기만 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나는 나에게 솔직한 것일까? 이런 생활을 언제까지 하려는 걸까? 모르겠다. 머릿속이 뒤죽박죽, 정리되지 않는다. 왜 하늘은 저리 맑은지. 서러웠다. 시작부터 꼬인 탓이다. 분명 시작부터 좋지 않았다. 나의 변화, 뜻밖의 상황, 분명 당혹스러웠다. 그럭저럭 잘 살아왔다고 행복했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표독스럽던 시어머니와도 어느 정도 타협이 되었고, 남편을 통해 내려놓는다는 걸 배웠지만 나름 만족스러웠기 때문이다. 욕심도 미련도 거추장스러웠다. 그 이전까지. 아, 이제는 그 사람이 내 전부가 되었다. 우연일까, 아마 우연이었을 것이다. 내게 건넨 따뜻한 말에 애간장이 녹았다. 남편과 연애 시절 이후 첫 경험이었다. 나에게 한없이 따뜻했다. 오늘 같은 날 함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함께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았다면. 못내 아쉽다. 마음이 통했다면 아마도 같은 곳을 보고 있지 않을까 싶다.



 학교에 갔다 왔다. 학생회 일로 간부들이 모였다. 그 사람 모습이 보였다. 공적인 자리에서 보니 꽤 신선했다. 눈치를 보내니 반응했다. 사랑스러웠다. 당장 달려가 껴안고 싶었다. 재킷이 왜 그렇게 잘 어울렸는지. 짜릿했다. 한 공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했다. 표현하지 못하는 이 심정을 알았을까? 그래, 그런 곳에서 눈 마주치는 것도 조심스러운 게 사실이니까. 딸 문제에 대해 그 사람은 항상 적극적이다. 오늘도 자기 의견을 내서 관철했다. 든든해서 좋아 보였다. 끝나고 나오다 어깨가 닿았다. 상냥한 눈매, 매력적이었다. 또 한 번 짜릿했다. 부름에 급히 자리 뜨는 그 사람 모습에 만족해야 했다. 집으로 오는 길, 부재를 느꼈다. 혹시 볼 수 있을까, 부질없는 짓이었지만 뒤돌아 그 사람을 찾았다. 알고 있었다, 볼 수 없다는 사실을.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 추스를 수 없을 것 같았다. 어제 만나 한참 얘기 나누고서도 오늘 또 욕심내고야 말았다. 과한 걸까? 사랑스러운 걸 어떻게 하나? 마음먹고 나면서 그 사람은 내 반쪽이 되었다. 걸림돌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내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아니 이미 걸림돌이 목을 조이지만 물러설 생각 없다. 그럴 거면 시작하지 않았을 거니까. 나는 알고 있었다. 이보다 더한 아픔이 찾아올 것이라는 사실을. 마음먹고 용기 내었을 때, 나는 나를 내려놓았다. 지금 나는 과거의 내가 아니다. 이전의 나는 사라진 지 오래이다. 지금의 나는 새롭게 태어난 나라는 존재이다. 나는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다.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 하지만 그게 내 맘대로 되는 건 아니었다. 손뼉도 서로 부딪쳐야 했으니까. 아쉽게도 아직 그 사람에게 고백하지 못했다. 날마다 고백하는 나를 그리지만, 아직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사랑이 일방통행이 아니니까. 그 사람에게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주어야 했으니까. 혹시 눈치 채지 않았을까? 이미 알고 있는 건 아닐까? 고백에 앞서 이런저런 상상을 하면서 위안 삼는다. 내가 당사자라면? 그 사람의 부재가 오늘따라 크게 느껴진다. 한쪽 어깨가 떨어져 나간 기분이다. 나만큼 그 사람도 나를 그리워할까? 오만가지 생각을 했다. 지금 이 시각 무엇을 하고 있을까? 오늘도 그리움에 밤을 새울 것 같다.



 딸이 이번에도 일 등을 했다. 마음이 흡족했다. 공부 머리는 아빠 닮았다. 사랑스러운 내 딸. 세상 다 가진 기분이다. 오늘 마음대로 놀라고 했다. 이만큼만 이런 식으로만 유지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더 원하는 게 없지 않을까? 욕심일까? 아니 이건 내 삶을 찾아가는 과정일 뿐. 다시 나로 태어나는 것이라고 다짐하고 다짐해야만 했다. 딸도 이해할 거라 믿는다. 딸은 나의 분신이니까.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딸 몇 등이냐고 물어 당연히 일 등이라고 했다. 뿌듯했다. 친구 딸이 노력한다는 사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타고나야 하는 게 아니냐고, 무심코 튀어나올 뻔했다. 붉어졌을 얼굴이 떠오른다. 내 딸이 얼마나 노력하는지 세상 누구도 모를 것이다. 딸은 내 자랑이다. 한참 투정 듣고 전화를 끊었다. 입 꼬리가 올라갔다. 편의점에 갔다. 사장님 얼굴 어두운 게 딸 때문인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넋두리를 털어놓으신다. 이럴 때는 어깨가 으쓱해진다. 흐뭇하게 바라보니, 그쪽도 따라 웃었다. 후후. 속으로 그렇지 않을 텐데. 이 뿌듯함과 안도감, 누구도 부럽지 않았다. 내일도 오늘만 같았으면 좋겠다. 가끔, 아주 가끔 사랑이 깨지는 상상을 해본다. 과연 감당할 수 있을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 사랑은 새 삶이라는 의미이기에, 차선을 생각해보지 않았다. 나는 다시 태어나고 있는 중이다. 지금 새 삶을 키우고 있는 중이다. 꼭 끝까지 이루고 싶다. 주변 사람들이 이해해줄 거라 낙관한다. 진심은 통한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말이다. 통할까? 오늘 그 사람은 내 마음을 알아챘을까? 결국 내 행동이 옳은 것인가, 원론으로 돌아온다. 그동안 수없이 했던 질문이다. 언제 끝날 것인가? 내 마음속 평온은 언제 이루어질 것인가? 내 마음속 평온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질 수 있을 것인가? 무한 반복하고 만다. 하지만 사랑은 놓칠 수 없다. 결실을 보아야 한다. 언젠가 사람들이 이해할 거라 믿는다. 그러기를 바란다.



 친구와 점심을 먹었다. 역시 냉면은 시원한 맛에 먹는다. 에어컨도 시원해 좋았다. 가끔 하는 외식은 활력소가 분명하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친구가 운동하자고 한다. 뛸까? 힘들어. 탁구는? 어려울 거 같아. 헬스는? 무서워. 수영은? 답하지 못했다. 운동하는 게 좋을 거 같다. 애들 핑계로 나태해진 건 사실이다. 내가 건강해야 돌볼 수 있다.

 시어머니 전화는 오늘도 바빴다. 왜 점심 집에서 먹지 않고 외식했냐고 따지신다. 이제 답하는 것도 지쳤다. 어떤 대답도 그 양반을 만족시키지 못하기에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다. 왜 답이 없냐고, 목소리를 높인다. 조심스럽게 몰래 따라다니는 거 안 좋은 행동이라고 했다. 끙하는 소리가 났다. 아직도 모른다고 생각하신다. 이런저런 핑계를 댄다. 십 분은 족히 넘었을 거다. 알겠습니다, 주의하겠다고 었다. 반항심일까? 그 사람을 향한 사랑의 감정에 심장이 터질 것 같다. 심장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손에 느껴지는 심장 박동이 그 사람에게도 전해졌으면 좋겠다. 이렇듯 하루하루가 널뛰며 지나간다. 말마따나 운동을 제대로 해볼까? 그러면 시어머니 감시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남편 집착 잊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이 인간 진짜 진절머리가 난다. 자기 어머니보다 더 자극한다. 작은 것도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내게 남편은 편집증 환자가 분명하다. 언젠가는 이 일기도 들춰볼 인간이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한다. 내 의지로 먼저 남편에게 말할 것이다. 이래저래 해서 이렇다고 명확히 말할 셈이다. 남편이 먼저 안다는 건, 너무 굴욕적인 일이다. 아니 그래서는 절대 안 된다. 이건 내 삶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성품은 바뀌지 않는다. 남편은 쓰레기다. 그래서 무엇이든 왜곡한다. 숭고한 내 사랑이 왜곡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허락할 수 없다. 그런 인간과는 차원이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가끔 한 마리 나비가 되어 그 사람 머리에 앉는 상상을 한다. 책상 색깔의 머리, 바람에 날린 머리카락이 날개를 때린다. 아이, 싫어. 투정 부린다. 이번에는 조심스럽게 날개를 만진다. 그 사람 냄새가 느껴진다. 눈 감고 품에 안기는 호사를 려본다. 짜릿했다. 오늘은 여기서 끝.



 날이 덥다. 민소매를 꺼냈다. 머리 질끈 묶었다. 걸으니 땀이 났다. 찜찜한 기분. 친구 역시 연신 땀을 흘린다. 윗도리가 작은 것 같다고 했더니, 눈을 흘겼다. 정작 내 옷이 문제였다. 땀에 달라붙어 모양이 영 아니다. 뱃살이 튀어나와 있었다. 아닌 척 당기지만, 쉽지 않았다. 머리를 잘못 묶었는지 지끈지끈하다. 선글라스 챙기는  잊었다. 이런 날에 선글라스가 딱인 데선글라스 낀 친구가 멋져 보였다. 운동선수 같았다. 옷이 자꾸 신경 쓰였다. 민소매는 완전 실패였다. 땀은 왜 그렇게 쏟아지는지, 진퇴양난이었다. 친구가 남편 문제를 털어놓았다. 요즘 수상하다고 했다. 늦게 들어오고, 카드 씀씀이도 예사롭지 않다고 한다. 남편이 떠올라 기분이 잡쳤다. 친구가 뭐라고 하는데 제대로 듣지 못했다. 눈이 마주쳤다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운동 끝나려면 한참 남았는데 미안하고 무안했다. 옷까지 거추장스러워 짜증이 일었다. 연신 옷을 당겼다. 땀이 스쳐 따가웠다. 말없이 헤어졌다. 멋지게 차려입은 친구에게 멋있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 땀에 옷이 흠뻑 젖었다. 불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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