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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 라디오 Oct 13. 2021

일기

 어젯밤 그 사람 생각으로 잠을 자지 못했다. 이달 들어 몇 번째다. 옆에서 자는 남편 눈치를 보게 된다. 가족? 사랑? 주제넘지만 우선순위를 따져본다. 가장 슬퍼할 사람은? 결단이 틀렸다면 그 책임은 누가? 그 사람이 거부하면? 눈물이 났다. 지금 이럴 때인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 사람 얼굴이 떠나지 않는다. 잠이 오지 않는다. 죄짓는 기분이다. 나의 선택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온전히 나만을 위해서다. 이건 내 선택이고 책임이고 운명이다. 그 사람을 만나면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다. 내 과거, 현재, 미래. 그 사람과 함께 한다면 다 내놓을 수 있다. 그 사람은 이미 내 모든 것이 되어 버렸다. 모두 받아들일 준비를 마쳤다. 그 사람 품속으로 들어갈 일만 남았다. 신호를 보내고 있는데, 눈치챘는지 확신이 들지 않는다.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다. 단 하나, 딸 빼놓고. 딸만은 함께 하고 싶다. 애지중지 사랑스러운 딸은 허락받고 싶다. 그럴 수 있다면 보다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 이런 생각 하루에도 수십 번 한다. 잘하는 짓일까?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것이 아닌지, 두렵고 무섭다. 혼자만의 상상이 아닐까.

 남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내게 이 사람은 어떤 존재인가? 예전 남편은 내 삶의 전부였다. 한없이 자상했고 부족한 걸 메워 주는 사람이었다. 시어머니와 부딪힐 때도 내 편을 들어주던 사람이었다. 그런 줄 알았다. 영원할 줄 알았다. 사랑이 영원할 것이라 순진한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런 사람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 남편은. 매일 아침 남편 눈빛 주눅이 든다. 잡아먹을 듯 매섭다. 저녁 시간 남편의 한마디 한마디에 가슴이 막힌다. 남편과 나 사이 애정은 말라버린 지 오래다. 남편이 그렇게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아니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기 시작하면서 애정은 사라져 버렸다. 휙 하고 날아갔다. 다 내가 뿌린 씨앗이라고 생각한다. 내 잘못이니까 내가 다 짊어질 것이다.

 오늘 오전 도서관에서 그 사람을 만났다. 책 고르고 있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보았다. 여지없이 교육 코너에 있었다. 조심스럽게 맞은편 서가로 가 섰다. 책 사이로 모습이 보였다. 책상 색 머리카락이 여지없다. 들킬 것 같아 빠져나왔다. 책 빌려 나가는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다리 힘이 풀려 의자에 주저앉았다. 뿌듯한 이 마음에 찝찝한 이물감은 뭘까? 이제 결심할 때가 온 것 같다. 지금까지 짜 놓은 계획을 실행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모두 무탈하길 바라며 꼭 잘 되기를 바랄 뿐이다.



 시어머니와 갈등. 어디까지 갈 건지  이제 지겹다. 남편이 시어머니에게 일기 얘기를 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래서 그렇게 난리였나 보다. 미친년 소리까지 들었다. 참아야지. 참아야지.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참아야 한다. 계획대로 흘러간다. 더 심하게 대해주었으면 한다. 폭발할 때까지  끓었으면 한다. 이제 공공연히 쫓아다닌다. 돌아보아도 반응조차 하지 않으신다. 전화로 하루의 반, 감시로 하루의 반이 흘러간다. 남편 역시 쥐 보듯 쳐다보기 일쑤다. 말도 거의 걸지 않는다. 딸 있을 때나 아는 척하지 남 대하듯 한다. 내 주위에 그 사람뿐이다. 시어머니와 남편은 이제 남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외롭지 않다. 어차피 바라지 않았으니까. 정을 놓은 지 한참 되었다. 의리였으니 그건 힘든 게 아니다. 그 사람의 사랑이라면 이 모든 게 풀릴 것으로 생각한다.



 지금도 화가 풀리지 않는다. 남편이 일기를 훔쳐보았다. 그렇게 치사한 방법을 쓰다니. 어련히 보여줄까? 본인 입으로 그러지 않았는가. 이미 다 짐작하고 있었다고 하면서 볼썽사납게 남의 일기는 왜 몰래 볼 생각을 했는지 정말 꼴불견이다. 남편에게 털어놓을 예정이었다. 면전에 대고 강타를 날릴 계획이었다. 그런데 남편의 멍청한 행동이 그걸 망쳐놓았다. 이래저래 도움이 안 되는 인간이다. 나는 떳떳하고 싶었다. 이래서 이렇다고 표독스럽게 말하고 싶었다. 일그러진 남편 얼굴을 보고 싶었다. 울먹이는 얼굴이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망쳐졌다. 일기를 던지며 내뱉었던 말이 지금도 생생하다. 고상한 척하더니 이런 짓거리 하고 있었던 거냐. 자존심의 문제였다. 욱했지만 참았다. 맞받아치는 건 내가 꿀린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에 아무 말 없이 쳐다만 보았다. 육두문자가 쏟아져 나왔다. 일절 반응하지 않았다. 거실이 난장판이었다. 왜 말하지 않느냐고, 무시하는 거냐고 내 입을 강제로 벌리려 했다. 다음날 반복되었다. 남편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마치 로봇 같이 행동하는, 영혼 없는 존재였다. 내게 그렇게 차갑게 대하면서, 시어머니에게는 여전히 역겨운 마마보이였다. 통화 소리에 구역질이 나왔다. 개가 주인에게 꼬리 흔드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역겨웠다. 시어머니가 거들었다. 예상했지만, 막상 부닥치니 강도가 셌다. 펀치가 매서웠다. 위축되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어려움도 내 사랑을 방해하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이제 그 사랑밖에 없으니 퇴로가 없는 셈이다. 이겨내는 수밖에 없었다. 계획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이겨내라. 그래, 이겨내야 한다. 시간이 약일 것이다. 결국 참고 기다리는 사람에게 손 내밀기 마련이다. 나는 할 수 있다. 다짐하고 다짐한다.

  충분히 시간을 줄 생각이다. 심사숙고해야 할 것이다. 그래도 나는 좋은 쪽으로 해결되리라고 생각한다. 내 마음을 이해할 것으로 생각한다. 내게 손 내밀고, 품을 것으로 생각한다. 내 진심을 이해해 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미치도록 그립다. 얼마나 행복할지, 얼마나 뿌듯할지. 천박한 이 두 사람과 하루라도 빨리 헤어지고 싶다. 정말 그러고 싶다.



 왜 그랬을까? 기회였는데. 조절이 잘 안 된다. 요즘 감정 기복이 심하다. 집안에서 그런 건 어쩔 수 없다 해도, 밖에서도 툭하면 성질을 낸다. 참는다. 참는다고 하면서도 그게 쉽지 않다. 나대로 최선을 다한다고 하는 데 에 차지 않는 것 같다. 어떻게 행동해야 했던 것일까? 얼굴이 안 좋아 보여 위로한 건데, 그게 마음에 걸린 거다. 괜히 성질을 부려 나도 거기에 맞받아쳤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끝내 안 좋은 소리까지 했다. 걱정돼서 그런 건데 과민반응을 한 게 아닌가 싶다. 기분이 찝찝하다. 그래도 그렇게 쏘아붙인 건 섭섭하다. 걱정돼서 그런 건데, 마음이 그렇다. 기회 봐서 진지하게 대화하려고 요 며칠 엿보고 있었는데, 별수 없었다. 일기 이후 뚜렷이 달라진 모습이었다. 어제만 해도 분위기가 좋았다. 그래서 오늘 마음을 다잡았는데,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내 마음을 알고 있는 것일까? 온갖 생각이 다 든다. 잘 되면 좋겠지만, 만약 잘 안 된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계획에 실패를 상정하지 않았다. 성공만을 생각했기에 실패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무모한 계획이다. 실패를 생각하지 않았다니. 아니 꼭 하지 않지 않았던 건 아니다. 실패의 경우 답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실패하게 되면 그 뒤 나는 없는 것이 된다. 그렇게 무너진 뒤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냥 떠나는 게 서로에게 맞는 일일 것이다. 두려우냐고, 두려울 게 뭐가 있겠는가. 새 삶을 위해 모든 걸 포기했는데, 무슨 미련이 있겠는가. 딸이 마음에 걸리기는 해도 어쩌겠는가 그게 운명인 걸. 이해할 거로 생각한다. 내 선택을 위해 나는 모든 걸 포기했다. 그래서 실패를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늘 언짢은 일이 안타깝다. 전환점이라 생각했는데, 없던 것이 되어버렸다. 내일 하면 되지 않겠는가. 모레도 있는데 뭘.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바람 쐬러 가자고 제안했다. 한참 지나서야 답이 왔다. 상황 알지 않느냐며 면박했다. 그럴 시간 없다며 당분간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했다. 그런 반응 예상했다. 가까우면서 먼 상대. 그래서 더 사랑스럽다. 면박할 때 전화기로 들리는 음색마저 좋았다. 오늘도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다. 목소리가 아른거린다. 그런 거 있지 않은가? 옆에 있으면서도 전화로 통화하고 싶은 . 그게 더 잘 통할 거 같은 느낌. 전화 속에서는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내 제안을 받는 순간 어떤 생각을 했을까? 습관대로 입 꼬리가 올라갔을까? 아니면 눈 껌뻑이며 곤란해했을까? 아마도 깜빡였을 것이다. 요즘 나를 대하는 태도가 많이 누그러졌다. 아니 다정해졌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지난번 얼굴 붉힌 이후로 상황이 달라졌다. 나를 이해하는 거 같다. 내게 많이 다가온 듯싶다.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얼굴에서 그게 나타난다. 모른 척 지나치려 해도 이제 반응이 그쪽에서 온다. 전화하는 내내 입가에서 웃음이 가시지 않았다. 그런 소리 하지 말라는 말이 투정으로 들렸다. 아기가 하는 그런 투정 말이다. 짜릿했다. 이제 됐다는 생각이 든다.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다. 새 삶이 펼쳐질 준비가 잘 진행되고 있다는 뜻이다. 시간이 약일 것이다. 서두르지 않을 것이다. 이제부터 기다리는 역할을 할 셈이다. 전화에서 그걸 느꼈다. 지금부터 제가 다가갈 테니 당신은 받으시면 됩니다. 사랑은 고귀한 것이다. 마침내 이루었다는 성취감이 몰려온다. 만족감에 몸이 노곤해진다. 남편 코 고는 소리에 오늘 별 감흥이 없다. 시어머니에 시달린 핸드폰도 수고한 하루였다.



 시어머니 간섭이 도를 넘었다. 죄인 취급받는 기분이다. 불쌍한 양반. 전화가 줄을 이었다. 별일도 아닌 걸 갖고, 트집이다. 일상인가 싶다가도 순간 마음이 끓는다. 친구도 고개를 젓는다. 속으로 삭이는 수밖에 없다. 왜 저러는 걸까, 안타깝다. 지칠 때도 됐는데 극성이시다. 말없이 산책로를 걸었다. 아파트 상가 편의점으로 향했다. 습관대로 무가당 콜라를 집었고, 친구는 탄산수를 선택했다. 의자에 앉아 쉬고 있으니 편의점 사장이 나오셨다. 특유의 웃음이 여전했다. 지난번 시험 성적에 관해 물으셨다. 친구가 준비한 듯 반응했다. 지켜보고 있었다. 책상 색 머리카락이 햇빛에 반사되어 더 짙어졌다. 입술 바로 위 점이 도드라져 보였다. 목소리가 격양되었다. 내친김에 눈을  감았다. 언제 들어도 좋았다. 대화 끊기는 게 아쉽기만 했다. 인사하고 자리를 떴다. 역시, 언제나 그랬듯이 저만치 시어머니가 보였다. 좋았던 기분이 달아났다. 저 화상, 아니 내 입만 더러워지니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지 마세요, 시어머니. 무엇을 원하는지 알겠지만, 이제 게임은 끝난 거 같아요. 소용없을 겁니다. 웃음이 절로 나왔다. 시어머니는 내 모습에 의아해할 것이다. 고소하게도.



 우리 딸. 결국 과를 정했다. 여러 번 바꾸더니 결정했다며 통보했다.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좋겠다. 하는 일마다 잘 되었으면 싶다. 친구가 잘했다며 격려해주었다. 자기 딸도 그런 성적이면 소원이 없을 거라고 말한다. 부러운 눈치다. 대견스럽다. 잘 자라주어 고맙다. 대학생이 된 딸을 보고 싶다. 그럼 이해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런 날이 올 수 있을까? 그나저나 담임 선생님 한 번 뵈러 가야겠다. 친구한테 같이 가자고 해야겠다. 내일 할 일이 생겼다.



 남편과 한바탕 했다. 말끝마다 어머니, 어머니 소리 듣기 싫어서 어머니 잠시라도 없으면 밥 하나 못 먹는 병신이라고 했더니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맞받아 니 잡아끌었다. 네가 뒤지면 내가 한 거로 알아라. 나 버리고 잘 살 거 같으냐. 무서웠다. 참아야 했는데, 후회가 크다.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 이런 사달 일어날 걸 알면서도 자극을 하고 만다. 내가 뿌린 씨앗이라는 걸 잊고 말았다. 무엇이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고 다짐, 다짐하는 데 실제로 그게 잘 안 된다. 감정에 너무 쉽게 무너진다. 이번도 못 들은 척했으면 되는데, 그만 부닥치고 말았다. 더 힘든 난관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이렇게 쉽게 무너지는 건 문제가 분명하다. 좀 더 마음을 다잡아야 할 것이다. 오늘 남편 모습 무서웠다. 진짜 죽일 것 같은 기세였다.



 놀이공원 간다고 했더니 무심히 잘 갔다 오라고 한다. 짜증이 났다. 왜 관심 없는 척하느냐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이러면 정말 감정이 상한다. 뻔히 아는 걸 아니라고 한들 뭐가 달라지는가 말이다. 오히려 솔직히 감정을 털어놓는 게 이제 우리 사이에서 자연스러운 게 아닐까 싶다. 다 알면서도 굳이 감정을 숨기려고 한다. 그래서 더 짜증 났던 것이다. 투정으로 들렸나 보다.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기지개를 켰다. 그러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사실 망설였다. 괜히 마음 상하게 하는 건 아닐까 걱정했다. 쌓였던 게 내려간 기분이다. 남은 음료 마시고 일어났다. 잘 가라고 손을 흔들어준다. 쑥스러웠던 걸까,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아마 얼굴이 붉어졌을 것이다. 뒤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숨이 가빠 집에 도착했다. 두 손으로 볼을 잡고 화장실 거울 앞에 섰다. 급히 온 탓인지 머리가 산발이었다. 눈도 충혈이 되어있었다. 땀 때문에 화장도 엉망이었다. 부끄러웠다. 하지만 기분은 좋았다. 마지막 잘 가라는 말이 귓가에 남아있었다.

  나들이에 기분 전환했다. 남편, 딸 모두 들떠 개구쟁이가 되었다. 얼마 만에 웃는 건지 모르겠다. 옛날 생각도 나고 즐거운 하루였다. 고기도 먹고 맥주도 한잔했다. 딸이 유독 행복해 보였다. 남편과 싸움에 스트레스받았을 텐데 고맙기 그지없다. 그 사람 생각이 났다. 이후 밥을 어떻게 먹었는지 모르겠다.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이렇게도 마음 빼앗기는 수가 있구나, 다시금 느꼈다. 나만 뿌듯했던 하루이지 않았나 싶어 미안하다. 딸만큼은 함께 했으면 하는데 그게 쉽지 않아 아쉽기만 하다.

 내일 어떤 옷을 입을까?  한번 부려볼까? 설렌다.



 커피 마시고 있으니 기다렸다는 듯 전화가 왔다. 대뜸 왜 소리 죽여 받느냐. 속사포가 이어졌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돌려주었다. 부끄러웠다. 잔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예, 예를 반복했다. 거북했다.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하필 이럴 때. 참아야 했다. 얼굴이 붉어졌다. 목이 타 커피를 들이켰다. 이럴 때 정말 밉다. 빨리 돌아가셨으면 좋겠다. 저주할 수 있으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다. 아니 이럴 때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이 상황을 끝내고만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배설하고 만족한 듯 전화를 끊었다. 허탈하고 민망했다. 시어머니만이 아니다. 남편 역시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며칠 전 난데없이 자기 동선을 보여주었다. 그날 내 동선과 겹쳤다. 웃는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모자가 아주 날 죽이려 한다. 화내라고 하는 짓거리에 맞장구칠 생각 없었다. 알겠다며 딸 방으로 갔다. 그래도 양심 있는지 따라오지 않았다. 식은땀이 흘렀다.

 커피 한 모금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딸 파마했다고 자랑한다. 사진 속 딸이 웃고 있다. 판박이다. 잠시 환상에 빠졌다. 좀 더 함께하고 싶었다. 헤어질 시간이다. 뒷모습에 잘 가요, 소곤거렸다. 이제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그래도 오늘은 다행히 별일 없이 끝났다.



 욕심을 버리세요. 그러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욕심이 왜 없겠습니까? 하지만 그런다고 달라지는 게 없잖아요. 포기하면 하나는 건지게 됩니다. 마음의 평안. 그거면 훌륭하지 않나요? 저도 돈 많이 벌어 떵떵거리며 살고 싶습니다. 보란 듯이 좋은 차도 끌고 싶고요. 왜 그런 마음이 없겠습니다. 하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저는 욕심을 되도록 부리지 않으려고 합니다. 흘러가게 놔두는 거죠. 물 내려가듯이 자연스럽게 놓고 보는 거죠. 뭐 한들 바뀌는 게 있겠습니까? 사람 사이도 그렇겠죠. 아등바등해봐야 뭐 자기만 힘든 거 아니겠어요. 저는 놔두겠습니다. 흘러가는 대로, 운명에 따르는 걸 택하겠습니다. 그게 아픔이어도 받아들여야죠. 운명이니까요. 여기 편의점 매출도 제가 아무리 뛰어다닌들 크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벌인 일이니까 잘 흘러가게끔 관리할 뿐이죠. 먹고사는 거로 만족합니다. 그러고 보면 저는 운명론자일 수도 있습니다. 운명이 그렇다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결국 개인 선택이죠.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마세요. 분명 이겨낼 수 있을 겁니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 같이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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