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실질적으로 누가 이득을 얻는가 따져보겠습니다. 시어머니가 얻을 수 있는 게 무엇이었을까요? 시종일관 시어머니 관심은 아들, 즉 남편이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시어머니가 달리 얻을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이것을 거짓 진술과 연결할 수 있습니다. 며느리와 각별했다는 거짓말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되레 본인 의심을 키웠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의 의심은 상대적으로 옅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본인 몸으로 아들을 막고 선 거죠. 살신성인 식으로 말입니다. 남편이 실제 범죄를 저질렀는지 아닌지 그건 상관없습니다. 그쪽으로 의심의 눈길이 가지 않도록 하는 게 첫 번째 과제였으니 말입니다.
시어머니는 사건 중심에 있는 인물이 분명합니다. 거짓말로 일관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요 참고인입니다. 의도적인 거짓말, 거기에 무언가가 숨겨져 있다고 봅니다. 편의점 사장을 지목했던 일도 이와 분명 관련 있을 것입니다. 이런 거 다 떠나서 더 큰 그림이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편의점 사장 언급, 거짓 진술 모두 자기 혐의를 감추기 위한 작전이었던 거죠. 이득을 보는 자는 시어머니 본인입니다. 편의점 사장은 미끼였던 것이고, 진술은 자기 죄를 덮으려는 이중 속임수로 볼 수 있습니다. 시어머니 작전에 죄다 딸려 들어갔던 겁니다. 범인은 시어머니이었고 이득은 며느리, 피해자 제거입니다. 지긋지긋한 피해자를 없애며 사랑스러운 아들을 되찾게 된 겁니다. 시어머니 일련의 행위는 자신을 위한 연기였던 셈입니다. 누군가를 위해 그런 행동을 한 것이다, 이런 추정은 시어머니가 최대 수혜자며 그 누군가는 시어머니 본인이었다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계획 살인이라고 생각합니다. 편의점 사장을 언급하며 조사 흐름을 바꿨습니다. 거기서부터 꼬였던 것입니다. 피해자 남편, 아들을 위한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본인을 위한 자구책이었고 탈출구였던 겁니다. 모두 사전에 짜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일기가 도화선이 되었겠죠. 방치하면 아들이 패배자가 되는 것일 테니까요.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었을 테고, 그 마음에 범행을 저지른 거지요. 가능성, 행동 그리고 이득, 여러 면에서 살인범은 시어머니입니다.”
“남편도 마무리 짓겠습니다. 이 사건으로 잃은 걸 따져보겠습니다. 아내, 가정, 가족, 평판, 이 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아내는 피해자이고요, 가정이나 가족은 엇비슷한 의미일 겁니다. 평판, 대내외적으로 피해 보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럼 얻은 게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명시하는 게 다소 억지이기는 한데 가정, 시어머니 정도가 떠오릅니다. 남편과 피해자 가정은 일대 전환이 일어납니다. 이걸 균형이 무너진 것으로 봤습니다. 일기와 진술에 따르면, 이후 주도권이 남편에게 넘어갔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피해자는 내내 주눅 들어 있었고, 남편은 집착, 잔소리하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불안정한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혼이 방안일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건 앞서 그럴듯하지 않다고 결론 내린 바 있습니다.
방안이 필요했을 겁니다. 균형을 맞추기 위한 방안 말이죠. 남편은 원인의 싹을 자르려 했습니다. 피해자를 제거하는 게 균형 맞추는 길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남편의 바람은 균형, 안정이었습니다. 아내를 잃는 한이 있더라도 이전과 같이 해놓고 싶었던 거지요. 그것도 자기 손으로 직접 말입니다. 놓아버린다는 건, 즉 이혼은 굴욕이었을 것입니다. 진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남편은 균형을 바랐고, 피해자를 죽여 사라지게 하는 거로 이루어낸 것입니다.
원흉 제거, 남편 행동의 결정적인 계기로 볼 수 있습니다. 위험을 감수하며 그렇게 행동해야 했는가, 의문을 가져야겠죠. 남편과 관련 있는 참고인으로 시어머니, 친구가 있습니다. 이 둘과 관련 점은 시어머니야 명백한 것이니 언급하지 않겠고요, 친구는 한 번 집에서 만났다고 했습니다. 걱정이 되어 찾아왔는데, 격한 반응을 보였다고 했습니다. 남편에게 친구는 불편한 존재였지 않나 생각합니다. 또 다른 눈엣가시였을 수 있습니다. 본인 치부를 알고 있는 사람일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더 피해자에게 냉정했을 수 있습니다. 주변 모든 것이 피해자를 향했고, 미움이 커져만 갔던 것입니다.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였던 거고요.
사건 이후 남편 모습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처음 침착하게 대응했습니다. 그러다 조금씩 변하기 시작하죠. 지속해서 누군가 가리킨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결국, 그건 시어머니였다는 게 드러납니다. 자기 혐의를 벗기 위해 시어머니를 활용한 것입니다. 등에 칼을 꽂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시어머니 품으로 돌아가지만, 그것을 이용해 도망치려 했습니다. 범행을 저질렀던 것도 감당할 사람이 있어 가능했을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남편은 이 사건으로 얻는 게 뚜렷합니다. 이득이 명확합니다. 그래서 남편에 더욱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피해자 일기를 한 번 더 검토하겠습니다.
친구와 편의점 사장 중심으로 재설정했고, 먼저 그 사람을 친구로 바꾸면 이러한 내용이 됩니다.
이런 감정 얼마 만인지. 사랑일까? 잡힐 듯 잡힐 듯 바라만 본다. 친구가 보고 싶다. 이제 이런 감정 안 올 줄 알았는데, 내게 아직 그리움이 남아 있나 싶어 기쁘다. 그냥 생각만 해도 좋은 걸 어찌하나. 남편 처음 봤을 때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오래전 일이니 그렇겠지. 요 며칠 잠을 제대로 못 잤다. 친구 얼굴이 아른거려 지워지지 않는다. 어제는 친구와 한참 얘기 나누는 상상을 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눈이 마주쳤을 때, 그 느낌 짜릿했다. 친구도 내게 사랑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행복했다. 꼭 껴안고 싶었다. 그래, 껴안고 싶었다. 하지만 자제했다. 아직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조금 더 있다가 말하려 한다. 그때는 친구도 내 마음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무쪼록 그런 날이 빨리 왔으면 한다. 오늘도 쉽게 잠들지 못할 거 같다. 지금 일기를 쓰면서도 머릿속은 온통 친구뿐이다. 내일은 어떨까? 어떤 옷을 입고 나갈까? 화장을 좀 짙게 해 볼까? 첫마디를 어떻게 할까? 표정을 어떻게 지을까? 이런 공상에 나는 오늘도 행복함을 느낀다. 남편에게 조금 미안한 감정이다.
친구와 오랜 시간 얘기를 나눴다. 함께 하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 없다. 별다른 내용도 아니었는데, 신이 나 떠들었다. 같이 있으면 그걸로 좋은 걸 어찌하겠는가. 이제 자연스럽다. 친구라면 셋방살이라도 행복할 거 같다. 셋방살이해 본 적 없기는 하지만. 어쨌든 같이 한다는 생각만으로 맘이 편하다. 나와 친구는 이제 영혼으로 하나가 된 느낌이다. 눈빛에서 나에 대한 감정을 느꼈다. 친구도 알고 있다는 생각이다. 아니 내 예감이 맞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그런 눈길을 보낼 수 있는 것이다. 너무 따뜻해 간장이 녹을 지경이었다. 어릴 적 소녀로 돌아간 심정이다. 너무 좋고, 너무 행복하고, 너무 소중했다. 행복해. (중략) 며칠 전 다툼 이후로 서로 남 보듯 하고 있다. 아침 차려놨는데도 그냥 가버렸다. 그럴 때는 정말 짜증 나고, 보기 싫어진다. 얄밉다. 남편만 아니면 한 대 쥐어박고 싶다. 미안했는지 저녁때 와인 한 병 사 왔다. 소고기 굽고 아스파라거스도 준비했다. 오래간만에 차분한 저녁이었다. 와중에 친구 생각이 났다. 이제 시도 때도 없이 생각난다. 남편에게 죄짓는 기분이다. 에이 몹쓸 남편인데 뭘, 이런 생각이 들다가도 어쩌겠어 싶어 마음을 내려놓게 된다. 욕심? 욕심일까. 요즘 이런 생각이 자주 든다. 욕심, 나는 욕심내면 안 되는 건가? 나도 욕심부리고 싶은걸. 아니 이건 욕심이 아니다. 새로운 삶을 꾸린다고 하면 이거야말로 욕심일까? 남편과 친구 얼굴이 번갈아 가며 스친다.
(중략) 시작부터 꼬인 탓이다. 분명 시작부터 좋지 않았다. 나의 변화, 뜻밖의 상황, 분명 당혹스러웠다. 그럭저럭 잘 살아왔다고 행복했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표독스럽던 시어머니와도 어느 정도 타협이 되었고, 남편을 통해 내려놓는다는 걸 배웠지만 나름 만족스러웠기 때문이다. 욕심도 미련도 거추장스러웠다. 그 이전까지. 아, 이제는 친구는 내 전부가 되었다. 우연일까, 아마 우연이었을 것이다. 내게 건넨 따뜻한 말에 애간장이 녹았다. 남편과 연애 시절 이후 첫 경험이었다. 나에게 한없이 따뜻했다. 오늘 같은 날 함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함께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았다면. 못내 아쉽다. 마음이 통했다면 아마도 같은 곳을 보고 있지 않을까 싶다.
학교에 갔다 왔다. 학생회 일로 간부들이 모였다. 친구 모습이 보였다. 공적인 자리에서 보니 꽤 신선했다. 눈치를 보내니 반응했다. 사랑스러웠다. 당장 달려가 껴안고 싶었다. 재킷이 왜 그렇게 잘 어울렸는지. 짜릿했다. 한 공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했다. 표현하지 못하는 이 심정을 알았을까? 그래, 그런 곳에서 눈 마주치는 것도 조심스러운 게 사실이니까. 딸 문제에 대해 친구는 항상 적극적이다. 오늘도 자기 의견을 내서 관철했다. 든든해서 좋아 보였다. 끝나고 나오다 어깨가 닿았다. 상냥한 눈매, 매력적이었다. 또 한 번 짜릿했다. 부름에 급히 자리 뜨는 친구 모습에 만족해야 했다. 집으로 오는 길, 부재를 느꼈다. 혹시 볼 수 있을까, 부질없는 짓이었지만 뒤돌아 친구를 찾았다. 알고 있었다, 볼 수 없다는 사실을.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 추스를 수 없을 것 같았다. 어제 만나 한참 얘기 나누고서도 오늘 또 욕심내고야 말았다. 과한 걸까? 사랑스러운 걸 어떻게 하나? 마음먹고 나면서 친구는 내 반쪽이 되었다. 걸림돌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내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아니 이미 걸림돌이 목을 조이지만 물러설 생각 없다. 그럴 거면 시작하지 않았을 거니까. 나는 알고 있었다. 이보다 더한 아픔이 찾아올 것이라는 사실을. 마음먹고 용기 내었을 때, 나는 나를 내려놓았다. 지금 나는 과거의 내가 아니다. 이전의 나는 사라진 지 오래이다. 지금의 나는 새롭게 태어난 나라는 존재이다. 나는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다.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 하지만 그게 내 맘대로 되는 건 아니었다. 손뼉도 서로 부딪쳐야 했으니까. 아쉽게도 아직 친구에게 고백하지 못했다. 날마다 고백하는 나를 그리지만, 아직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사랑이 일방통행이 아니니까. 친구에게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주어야 했으니까. 혹시 눈치 채지 않았을까? 이미 알고 있는 건 아닐까? 고백에 앞서 이런저런 상상을 하면서 위안 삼는다. 내가 당사자라면? 친구의 부재가 오늘따라 크게 느껴진다. 한쪽 어깨가 떨어져 나간 기분이다. 나만큼 친구도 나를 그리워할까? 오만가지 생각을 했다. 지금 이 시각 무엇을 하고 있을까? 오늘도 그리움에 밤을 새울 것 같다.
친구와 점심을 먹었다. 역시 냉면은 시원한 맛에 먹는다. 에어컨도 시원해 좋았다. 가끔 하는 외식은 활력소가 분명하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친구가 운동하자고 한다. 뛸까? 힘들어. 탁구는? 어려울 거 같아. 헬스는? 무서워. 수영은? 답하지 못했다. 운동하는 게 좋을 거 같다. 애들 핑계로 나태해진 건 사실이다. 내가 건강해야 돌볼 수 있다.
시어머니 전화는 오늘도 바빴다. 왜 점심 집에서 먹지 않고 외식했냐고 따지신다. 이제 답하는 것도 지쳤다. 어떤 대답도 그 양반을 만족시키지 못하기에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다. 왜 답이 없냐고, 목소리를 높인다. 조심스럽게 몰래 따라다니는 거 안 좋은 행동이라고 했다. 끙하는 소리가 났다. 아직도 모른다고 생각하신다. 이런저런 핑계를 댄다. 십 분은 족히 넘었을 거다. 알겠습니다, 주의하겠다고 끊었다. 반항심일까? 친구를 향한 사랑의 감정에 심장이 터질 것 같다. 심장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손에 느껴지는 심장 박동이 친구에게도 전해졌으면 좋겠다. 이렇듯 하루하루가 널뛰며 지나간다. 말마따나 운동을 제대로 해볼까? 그러면 시어머니 감시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남편 집착 잊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이 인간 진짜 진절머리가 난다. 자기 어머니보다 더 자극한다. 작은 것도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내게 남편은 편집증 환자가 분명하다. 언젠가는 이 일기도 들춰볼 인간이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한다. 내 의지로 먼저 남편에게 말할 것이다. 이래저래 해서 이렇다고 명확히 말할 셈이다. 남편이 먼저 안다는 건, 너무 굴욕적인 일이다. 아니 그래서는 절대 안 된다. 이건 내 삶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성품은 바뀌지 않는다. 남편은 쓰레기다. 그래서 무엇이든 왜곡한다. 숭고한 내 사랑이 왜곡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허락할 수 없다. 그런 인간과는 차원이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가끔 한 마리 나비가 되어 친구 머리에 앉는 상상을 한다. 책상 색깔의 머리, 바람에 날린 머리카락이 날개를 때린다. 아이, 싫어. 투정 부린다. 이번에는 조심스럽게 날개를 만진다. 친구 냄새가 느껴진다. 눈 감고 품에 안기는 호사를 누려본다. 짜릿했다. 오늘은 여기서 끝.
날이 덥다. 민소매를 꺼냈다. 머리 질끈 묶었다. 걸으니 땀이 났다. 찜찜한 기분. 친구 역시 연신 땀을 흘린다. 윗도리가 작은 것 같다고 했더니, 눈을 흘겼다. 정작 내 옷이 문제였다. 땀에 달라붙어 모양이 영 아니다. 뱃살이 튀어나와 있었다. 아닌 척 당기지만, 쉽지 않았다. 머리를 잘못 묶었는지 지끈지끈하다. 선글라스 챙기는 걸 잊었다. 이런 날에 선글라스가 딱인 데. 선글라스 낀 친구가 멋져 보였다. 운동선수 같았다. 옷이 자꾸 신경 쓰였다. 민소매는 완전 실패였다. 땀은 왜 그렇게 쏟아지는지, 진퇴양난이었다. 친구가 남편 문제를 털어놓았다. 요즘 수상하다고 했다. 늦게 들어오고, 카드 씀씀이도 예사롭지 않다고 한다. 남편이 떠올라 기분이 잡쳤다. 친구가 뭐라고 하는데 제대로 듣지 못했다. 눈이 마주쳤다.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운동 끝나려면 한참 남았는데 미안하고 무안했다. 옷까지 거추장스러워 짜증이 일었다. 연신 옷을 당겼다. 땀이 스쳐 따가웠다. 말없이 헤어졌다. 멋지게 차려입은 친구에게 멋있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 땀에 옷이 흠뻑 젖었다. 불쾌했다.
어젯밤 친구 생각으로 잠을 자지 못했다. 이달 들어 몇 번째다. 옆에서 자는 남편 눈치를 보게 된다. 가족? 사랑? 주제넘지만 우선순위를 따져본다. 가장 슬퍼할 사람은? 결단이 틀렸다면 그 책임은 누가? 친구가 거부하면? 눈물이 났다. 지금 이럴 때인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친구 얼굴이 떠나지 않는다. 잠이 오지 않는다. 죄짓는 기분이다. 나의 선택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온전히 나만을 위해서다. 이건 내 선택이고 책임이고 운명이다. 친구를 만나면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다. 내 과거, 현재, 미래. 친구와 함께 한다면 다 내놓을 수 있다. 친구는 이미 내 모든 것이 되어 버렸다. 모두 받아들일 준비를 마쳤다. 친구 품속으로 들어갈 일만 남았다. 신호를 보내고 있는데, 눈치챘는지 확신이 들지 않는다.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다. 단 하나, 딸 빼놓고. 딸만은 함께 하고 싶다. 애지중지 사랑스러운 딸은 허락받고 싶다. 그럴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 이런 생각 하루에도 수십 번 한다. 잘하는 짓일까?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것이 아닌지, 두렵고 무섭다. 혼자만의 상상이 아닐까.
(중략) 매일 아침 남편 눈빛에 주눅이 든다. 잡아먹을 듯 매섭다. 저녁 시간 남편의 한마디 한마디에 가슴이 막힌다. 남편과 나 사이 애정은 말라버린 지 오래다. 남편이 그렇게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아니 내가 친구를 사랑하기 시작하면서 애정은 사라져 버렸다. 휙 하고 날아갔다. 다 내가 뿌린 씨앗이라고 생각한다. 내 잘못이니까 내가 다 짊어질 것이다.
오늘 오전 도서관에서 친구를 만났다. 책 고르고 있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보았다. 여지없이 교육 코너에 있었다. 조심스럽게 맞은편 서가로 가 섰다. 책 사이로 모습이 보였다. 책상 색 머리카락이 여지없다. 들킬 것 같아 빠져나왔다. 책 빌려 나가는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다리 힘이 풀려 의자에 주저앉았다. 뿌듯한 이 마음에 찝찝한 이물감은 뭘까? 이제 결심할 때가 온 것 같다. 지금까지 짜 놓은 계획을 실행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모두 무탈하길 바라며 꼭 잘 되기를 바랄 뿐이다.
지금도 화가 풀리지 않는다. 남편이 일기를 훔쳐보았다. 그렇게 치사한 방법을 쓰다니. 어련히 보여줄까? 본인 입으로 그러지 않았는가. 이미 다 짐작하고 있었다고 하면서 볼썽사납게 남의 일기는 왜 몰래 볼 생각을 했는지 정말 꼴불견이다. 남편에게 털어놓을 예정이었다. 면전에 대고 강타를 날릴 계획이었다. 그런데 남편의 멍청한 행동이 그걸 망쳐놓았다. 이래저래 도움이 안 되는 인간이다. 나는 떳떳하고 싶었다. 이래서 이렇다고 표독스럽게 말하고 싶었다. 일그러진 남편 얼굴을 보고 싶었다. 울먹이는 얼굴이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망쳐졌다. 일기를 던지며 내뱉었던 말이 지금도 생생하다. 고상한 척하더니 이런 짓거리 하고 있었던 거냐. 자존심의 문제였다. 욱했지만 참았다. 맞받아치는 건 내가 꿀린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에 아무 말 없이 쳐다만 보았다. 육두문자가 쏟아져 나왔다. 일절 반응하지 않았다. 거실이 난장판이었다. 왜 말하지 않느냐고, 무시하는 거냐고 내 입을 강제로 벌리려 했다. 다음날 반복되었다. 남편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마치 로봇 같이 행동하는, 영혼 없는 존재였다. 내게 그렇게 차갑게 대하면서, 시어머니에게는 여전히 역겨운 마마보이였다. 통화 소리에 구역질이 나왔다. 개가 주인에게 꼬리 흔드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역겨웠다. 시어머니가 거들었다. 예상했지만, 막상 부닥치니 강도가 셌다. 펀치가 매서웠다. 위축되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어려움도 내 사랑을 방해하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이제 그 사랑밖에 없으니 퇴로가 없는 셈이다. 이겨내는 수밖에 없었다. 계획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이겨내라. 그래, 이겨내야 한다. 시간이 약일 것이다. 결국 참고 기다리는 사람에게 손 내밀기 마련이다. 나는 할 수 있다. 다짐하고 다짐한다.
충분히 시간을 줄 생각이다. 심사숙고해야 할 것이다. 그래도 나는 좋은 쪽으로 해결되리라고 생각한다. 내 마음을 이해할 것으로 생각한다. 내게 손 내밀고, 품을 것으로 생각한다. 내 진심을 이해해 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미치도록 그립다. 얼마나 행복할지, 얼마나 뿌듯할지. 천박한 이 두 사람과 하루라도 빨리 헤어지고 싶다. 정말 그러고 싶다.
바람 쐬러 가자고 제안했다. 한참 지나서야 답이 왔다. 상황 알지 않느냐며 면박했다. 그럴 시간 없다며 당분간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했다. 그런 반응 예상했다. 가까우면서 먼 상대. 그래서 더 사랑스럽다. 면박할 때 전화기로 들리는 음색마저 좋았다. 오늘도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다. 목소리가 아른거린다. 그런 거 있지 않은가? 옆에 있으면서도 전화로 통화하고 싶은 거. 그게 더 잘 통할 거 같은 느낌. 전화 속에서는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내 제안을 받는 순간 어떤 생각을 했을까? 습관대로 입 꼬리가 올라갔을까? 아니면 눈 껌뻑이며 곤란해했을까? 아마도 깜빡였을 것이다. 요즘 나를 대하는 태도가 많이 누그러졌다. 아니 다정해졌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지난번 얼굴 붉힌 이후로 상황이 달라졌다. 나를 이해하는 거 같다. 내게 많이 다가온 듯싶다.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얼굴에서 그게 나타난다. 모른 척 지나치려 해도 이제 반응이 그쪽에서 온다. (중략)
(중략) 의자에 앉아 쉬고 있으니 편의점 사장이 나오셨다. 특유의 웃음이 여전했다. 지난번 시험 성적에 관해 물으셨다. 친구가 준비한 듯 반응했다. 지켜보고 있었다. 책상 색 머리카락이 햇빛에 반사되어 더 짙어졌다. 입술 바로 위 점이 도드라져 보였다. 목소리가 격양되었다. 내친김에 눈을 감았다. 언제 들어도 좋았다. 대화 끊기는 게 아쉽기만 했다. 인사하고 자리를 떴다. 역시, 언제나 그랬듯이 저만치 시어머니가 보였다. 좋았던 기분이 달아났다. 저 화상, 아니 내 입만 더러워지니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지 마세요, 시어머니. 무엇을 원하는지 알겠지만, 이제 게임은 끝난 거 같아요. 소용없을 겁니다. 웃음이 절로 나왔다. 시어머니는 내 모습에 의아해할 것이다. 고소하게도.
우리 딸. 결국 학과를 정했다. 여러 번 바꾸더니 결정했다며 통보했다.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좋겠다. 하는 일마다 잘 되었으면 싶다. 친구가 잘했다며 격려해주었다. 자기 딸도 그런 성적이면 소원이 없을 거라고 말한다. 부러운 눈치다. 대견스럽다. 잘 자라주어 고맙다. 대학생이 된 딸을 보고 싶다. 그럼 이해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런 날이 올 수 있을까? 그나저나 담임 선생님 한 번 뵈러 가야겠다. 친구한테 같이 가자고 해야겠다. 내일 할 일이 생겼다.
놀이공원 간다고 했더니 무심히 잘 갔다 오라고 한다. 짜증이 났다. 왜 관심 없는 척하느냐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이러면 정말 감정이 상한다. 뻔히 아는 걸 아니라고 한들 뭐가 달라지는가 말이다. 오히려 솔직히 감정을 털어놓는 게 이제 우리 사이에서 자연스러운 게 아닐까 싶다. 다 알면서도 굳이 감정을 숨기려고 한다. 그래서 더 짜증 났던 것이다. 투정으로 들렸나 보다.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기지개를 켰다. 그러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사실 망설였다. 괜히 마음 상하게 하는 건 아닐까 걱정했다. 쌓였던 게 내려간 기분이다. 남은 음료 마시고 일어났다. 잘 가라고 손을 흔들어준다. 쑥스러웠던 걸까,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아마 얼굴이 붉어졌을 것이다. 뒤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숨이 가빠 집에 도착했다. 두 손으로 볼을 잡고 화장실 거울 앞에 섰다. 급히 온 탓인지 머리가 산발이었다. 눈도 충혈이 되어있었다. 땀 때문에 화장도 엉망이었다. 부끄러웠다. 하지만 기분은 좋았다. 마지막 잘 가라는 말이 귓가에 남아있었다.
(중략) 친구 생각이 났다. 이후 밥을 어떻게 먹었는지 모르겠다.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이렇게도 마음 빼앗기는 수가 있구나, 다시금 느꼈다. 나만 뿌듯했던 하루이지 않았나 싶어 미안하다. 딸만큼은 함께 했으면 하는데 그게 쉽지 않아 아쉽기만 하다.
내일 어떤 옷을 입을까? 멋 한번 부려볼까? 설렌다.
(중략) 커피 한 모금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딸 파마했다고 자랑한다. 사진 속 딸이 웃고 있다. 판박이다. 잠시 환상에 빠졌다. 좀 더 함께하고 싶었다. 헤어질 시간이다. 뒷모습에 잘 가요, 소곤거렸다. 이제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그래도 오늘은 다행히 별일 없이 끝났다.”
“이번에는 편의점 사장으로 그 사람을 대신했습니다.
이런 감정 얼마 만인지. 사랑일까? 잡힐 듯 잡힐 듯 바라만 본다. 편의점 사장이 보고 싶다. 이제 이런 감정 안 올 줄 알았는데, 내게 아직 그리움이 남아 있나 싶어 기쁘다. 그냥 생각만 해도 좋은 걸 어찌하나. 남편 처음 봤을 때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오래전 일이니 그렇겠지. 요 며칠 잠을 제대로 못 잤다. 편의점 사장 얼굴이 아른거려 지워지지 않는다. 어제는 편의점 사장과 한참 얘기 나누는 상상을 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눈이 마주쳤을 때, 그 느낌 짜릿했다. 편의점 사장도 내게 사랑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행복했다. 꼭 껴안고 싶었다. 그래, 껴안고 싶었다. 하지만 자제했다. 아직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조금 더 있다가 말하려 한다. 그때는 편의점 사장도 내 마음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무쪼록 그런 날이 빨리 왔으면 한다. 오늘도 쉽게 잠들지 못할 거 같다. 지금 일기를 쓰면서도 머릿속은 온통 편의점 사장뿐이다. 내일은 어떨까? 어떤 옷을 입고 나갈까? 화장을 좀 짙게 해 볼까? 첫마디를 어떻게 할까? 표정을 어떻게 지을까? 이런 공상에 나는 오늘도 행복함을 느낀다. 남편에게 조금 미안한 감정이다.
편의점 사장과 오랜 시간 얘기를 나눴다. 함께 하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 없다. 별다른 내용도 아니었는데, 신이 나 떠들었다. 같이 있으면 그걸로 좋은 걸 어찌하겠는가. 이제 자연스럽다. 편의점 사장이라면 셋방살이라도 행복할 거 같다. 셋방살이해 본 적 없기는 하지만. 어쨌든 같이 한다는 생각만으로 맘이 편하다. 나와 편의점 사장은 이제 영혼으로 하나가 된 느낌이다. 눈빛에서 나에 대한 감정을 느꼈다. 편의점 사장도 알고 있다는 생각이다. 아니 내 예감이 맞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그런 눈길을 보낼 수 있는 것이다. 너무 따뜻해 간장이 녹을 지경이었다. 어릴 적 소녀로 돌아간 심정이다. 너무 좋고, 너무 행복하고, 너무 소중했다. 행복해.
(중략) 아침 차려놨는데도 그냥 가버렸다. 그럴 때는 정말 짜증 나고, 보기 싫어진다. 얄밉다. 남편만 아니면 한 대 쥐어박고 싶다. 미안했는지 저녁때 와인 한 병 사 왔다. 소고기 굽고 아스파라거스도 준비했다. 오래간만에 차분한 저녁이었다. 와중에 편의점 사장 생각이 났다. 이제 시도 때도 없이 생각난다. 남편에게 죄짓는 기분이다. 에이 몹쓸 남편인데 뭘, 이런 생각이 들다가도 어쩌겠어 싶어 마음을 내려놓게 된다. 욕심? 욕심일까. 요즘 이런 생각이 자주 든다. 욕심, 나는 욕심내면 안 되는 건가? 나도 욕심부리고 싶은걸. 아니 이건 욕심이 아니다. 새로운 삶을 꾸린다고 하면 이거야말로 욕심일까? 남편과 편의점 사장 얼굴이 번갈아 가며 스친다.
아지트를 청소했다. 며칠 비가 온 탓인지 흙이 꽤 쌓여 있었다. 갖고 간 모종삽으로 퍼냈다. 다듬었더니 그럴싸해졌다. 깔개를 깔고 앉았다. 친구가 일이 있어 함께 하지 못했다. 그래서 오늘은 혼자였다. 늘 어깨를 함께 하던 존재가 없으니 허전하다. 그래도 하늘이 좋기만 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나는 나에게 솔직한 것일까? 이런 생활을 언제까지 하려는 걸까? 모르겠다. 머릿속이 뒤죽박죽, 정리되지 않는다. (중략) 아, 이제는 편의점 사장이 내 전부가 되었다. 우연일까, 아마 우연이었을 것이다. 내게 건넨 따뜻한 말에 애간장이 녹았다. 남편과 연애 시절 이후 첫 경험이었다. 나에게 한없이 따뜻했다. 오늘 같은 날 함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함께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았다면. 못내 아쉽다. 마음이 통했다면 아마도 같은 곳을 보고 있지 않을까 싶다.
학교에 갔다 왔다. 학생회 일로 간부들이 모였다. 편의점 사장 모습이 보였다. 공적인 자리에서 보니 꽤 신선했다. 눈치를 보내니 반응했다. 사랑스러웠다. 당장 달려가 껴안고 싶었다. 재킷이 왜 그렇게 잘 어울렸는지. 짜릿했다. 한 공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했다. 표현하지 못하는 이 심정을 알았을까? 그래, 그런 곳에서 눈 마주치는 것도 조심스러운 게 사실이니까. 딸 문제에 대해 편의점 사장은 항상 적극적이다. 오늘도 자기 의견을 내서 관철했다. 든든해서 좋아 보였다. 끝나고 나오다 어깨가 닿았다. 상냥한 눈매, 매력적이었다. 또 한 번 짜릿했다. 부름에 급히 자리 뜨는 편의점 사장 모습에 만족해야 했다. 집으로 오는 길, 부재를 느꼈다. 혹시 볼 수 있을까, 부질없는 짓이었지만 뒤돌아 편의점 사장을 찾았다. 알고 있었다, 볼 수 없다는 사실을.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 추스를 수 없을 것 같았다. 어제 만나 한참 얘기 나누고서도 오늘 또 욕심내고야 말았다. 과한 걸까? 사랑스러운 걸 어떻게 하나? 마음먹고 나면서 편의점 사장은 내 반쪽이 되었다. 걸림돌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내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아니 이미 걸림돌이 목을 조이지만 물러설 생각 없다. 그럴 거면 시작하지 않았을 거니까. 나는 알고 있었다. 이보다 더한 아픔이 찾아올 것이라는 사실을. 마음먹고 용기 내었을 때, 나는 나를 내려놓았다. 지금 나는 과거의 내가 아니다. 이전의 나는 사라진 지 오래이다. 지금의 나는 새롭게 태어난 나라는 존재이다. 나는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다.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 하지만 그게 내 맘대로 되는 건 아니었다. 손뼉도 서로 부딪쳐야 했으니까. 아쉽게도 아직 편의점 사장에게 고백하지 못했다. 날마다 고백하는 나를 그리지만, 아직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사랑이 일방통행이 아니니까. 편의점 사장에게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주어야 했으니까. 혹시 눈치 채지 않았을까? 이미 알고 있는 건 아닐까? 고백에 앞서 이런저런 상상을 하면서 위안 삼는다. 내가 당사자라면? 편의점 사장의 부재가 오늘따라 크게 느껴진다. 한쪽 어깨가 떨어져 나간 기분이다. 나만큼 편의점 사장도 나를 그리워할까? 오만가지 생각을 했다. 지금 이 시각 무엇을 하고 있을까? 오늘도 그리움에 밤을 새울 것 같다.
(중략) 편의점에 갔다. 사장님 얼굴 어두운 게 딸 때문인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넋두리를 털어놓으신다. 이럴 때는 어깨가 으쓱해진다. 흐뭇하게 바라보니, 그쪽도 따라 웃었다. 후후. 속으로 그렇지 않을 텐데. 이 뿌듯함과 안도감, 누구도 부럽지 않았다. 내일도 오늘만 같았으면 좋겠다. 가끔, 아주 가끔 사랑이 깨지는 상상을 해본다. 과연 감당할 수 있을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 사랑은 새 삶이라는 의미이기에, 차선을 생각해보지 않았다. 나는 다시 태어나고 있는 중이다. 지금 새 삶을 키우고 있는 중이다. 꼭 끝까지 이루고 싶다. 주변 사람들이 이해해줄 거라 낙관한다. 진심은 통한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말이다. 통할까? 오늘 편의점 사장은 내 마음을 알아챘을까? 결국 내 행동이 옳은 것인가, 원론으로 돌아온다. 그동안 수없이 했던 질문이다. 언제 끝날 것인가? 내 마음속 평온은 언제 이루어질 것인가? 내 마음속 평온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질 수 있을 것인가? 무한 반복하고 만다. 하지만 사랑은 놓칠 수 없다. 결실을 보아야 한다. 언젠가 사람들이 이해할 거라 믿는다. 그러기를 바란다.
(중략) 반항심일까? 편의점 사장을 향한 사랑의 감정에 심장이 터질 것 같다. 심장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손에 느껴지는 심장 박동이 편의점 사장에게도 전해졌으면 좋겠다. (중략) 가끔 한 마리 나비가 되어 편의점 사장 머리에 앉는 상상을 한다. 책상 색깔의 머리, 바람에 날린 머리카락이 날개를 때린다. 아이, 싫어. 투정 부린다. 이번에는 조심스럽게 날개를 만진다. 편의점 사장 냄새가 느껴진다. 눈 감고 품에 안기는 호사를 누려본다. 짜릿했다. 오늘은 여기서 끝.
어젯밤 편의점 사장 생각으로 잠을 자지 못했다. 이달 들어 몇 번째다. 옆에서 자는 남편 눈치를 보게 된다. 가족? 사랑? 주제넘지만 우선순위를 따져본다. 가장 슬퍼할 사람은? 결단이 틀렸다면 그 책임은 누가? 편의점 사장이 거부하면? 눈물이 났다. 지금 이럴 때인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편의점 사장 얼굴이 떠나지 않는다. 잠이 오지 않는다. 죄짓는 기분이다. 나의 선택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온전히 나만을 위해서다. 이건 내 선택이고 책임이고 운명이다. 편의점 사장을 만나면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다. 내 과거, 현재, 미래. 편의점 사장과 함께 한다면 다 내놓을 수 있다. 편의점 사장은 이미 내 모든 것이 되어 버렸다. 모두 받아들일 준비를 마쳤다. 편의점 사장 품속으로 들어갈 일만 남았다. 신호를 보내고 있는데, 눈치챘는지 확신이 들지 않는다.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다. 단 하나, 딸 빼놓고. 딸만은 함께 하고 싶다. 애지중지 사랑스러운 딸은 허락받고 싶다. 그럴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 이런 생각 하루에도 수십 번 한다. 잘하는 짓일까?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것이 아닌지, 두렵고 무섭다. 혼자만의 상상이 아닐까.
(중략) 매일 아침 남편 눈빛에 주눅이 든다. 잡아먹을 듯 매섭다. 저녁 시간 남편의 한마디 한마디에 가슴이 막힌다. 남편과 나 사이 애정은 말라버린 지 오래다. 남편이 그렇게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아니 내가 편의점 사장을 사랑하기 시작하면서 애정은 사라져 버렸다. 휙 하고 날아갔다. 다 내가 뿌린 씨앗이라고 생각한다. 내 잘못이니까 내가 다 짊어질 것이다.
오늘 오전 도서관에서 편의점 사장을 만났다. 책 고르고 있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보았다. 여지없이 교육 코너에 있었다. 조심스럽게 맞은편 서가로 가 섰다. 책 사이로 모습이 보였다. 책상 색 머리카락이 여지없다. 들킬 것 같아 빠져나왔다. 책 빌려 나가는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다리 힘이 풀려 의자에 주저앉았다. 뿌듯한 이 마음에 찝찝한 이물감은 뭘까? 이제 결심할 때가 온 것 같다. 지금까지 짜 놓은 계획을 실행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모두 무탈하길 바라며 꼭 잘 되기를 바랄 뿐이다.
시어머니와 갈등. 어디까지 갈 건지 이제 지겹다. 남편이 시어머니에게 일기 얘기를 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래서 그렇게 난리였나 보다. 미친년 소리까지 들었다. 참아야지. 참아야지.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참아야 한다. 계획대로 흘러간다. 더 심하게 대해주었으면 한다. 폭발할 때까지 끓었으면 한다. 이제 공공연히 쫓아다닌다. 돌아보아도 반응조차 하지 않으신다. 전화로 하루의 반, 감시로 하루의 반이 흘러간다. 남편 역시 쥐 보듯 쳐다보기 일쑤다. 말도 거의 걸지 않는다. 딸 있을 때나 아는 척하지 남 대하듯 한다. 내 주위에 편의점 사장뿐이다. 시어머니와 남편은 이제 남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외롭지 않다. 어차피 바라지 않았으니까. 정을 놓은 지 한참 되었다. 의리였으니 그건 힘든 게 아니다. 편의점 사장의 사랑이라면 이 모든 게 풀릴 것으로 생각한다.
바람 쐬러 가자고 제안했다. 한참 지나서야 답이 왔다. 상황 알지 않느냐며 면박했다. 그럴 시간 없다며 당분간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했다. 그런 반응 예상했다. 가까우면서 먼 상대. 그래서 더 사랑스럽다. 면박할 때 전화기로 들리는 음색마저 좋았다. 오늘도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다. 목소리가 아른거린다. 그런 거 있지 않은가? 옆에 있으면서도 전화로 통화하고 싶은 거. 그게 더 잘 통할 거 같은 느낌. 전화 속에서는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내 제안을 받는 순간 어떤 생각을 했을까? 습관대로 입 꼬리가 올라갔을까? 아니면 눈 껌뻑이며 곤란해했을까? 아마도 깜빡였을 것이다. 요즘 나를 대하는 태도가 많이 누그러졌다. 아니 다정해졌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지난번 얼굴 붉힌 이후로 상황이 달라졌다. 나를 이해하는 거 같다. 내게 많이 다가온 듯싶다.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얼굴에서 그게 나타난다. 모른 척 지나치려 해도 이제 반응이 그쪽에서 온다. 전화하는 내내 입가에서 웃음이 가시지 않았다. 그런 소리 하지 말라는 말이 투정으로 들렸다. 아기가 하는 그런 투정 말이다. 짜릿했다. 이제 됐다는 생각이 든다.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다. 새 삶이 펼쳐질 준비가 잘 진행되고 있다는 뜻이다. 시간이 약일 것이다. 서두르지 않을 것이다. 이제부터 기다리는 역할을 할 셈이다. 전화에서 그걸 느꼈다. 지금부터 제가 다가갈 테니 당신은 받으시면 됩니다. 사랑은 고귀한 것이다. 마침내 이루었다는 성취감이 몰려온다. 만족감에 몸이 노곤해진다. 남편 코 고는 소리에 오늘 별 감흥이 없다. 시어머니에 시달린 핸드폰도 수고한 하루였다.
(중략) 의자에 앉아 쉬고 있으니 편의점 사장이 나오셨다. 특유의 웃음이 여전했다. 지난번 시험 성적에 관해 물으셨다. 친구가 준비한 듯 반응했다. 지켜보고 있었다. 책상 색 머리카락이 햇빛에 반사되어 더 짙어졌다. 입술 바로 위 점이 도드라져 보였다. 목소리가 격양되었다. 내친김에 눈을 감았다. 언제 들어도 좋았다. 대화 끊기는 게 아쉽기만 했다. 인사하고 자리를 떴다. 역시, 언제나 그랬듯이 저만치 시어머니가 보였다. 좋았던 기분이 달아났다. 저 화상, 아니 내 입만 더러워지니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지 마세요, 시어머니. 무엇을 원하는지 알겠지만, 이제 게임은 끝난 거 같아요. 소용없을 겁니다. 웃음이 절로 나왔다. 시어머니는 내 모습에 의아해할 것이다. 고소하게도.
놀이공원 간다고 했더니 무심히 잘 갔다 오라고 한다. 짜증이 났다. 왜 관심 없는 척하느냐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이러면 정말 감정이 상한다. 뻔히 아는 걸 아니라고 한들 뭐가 달라지는가 말이다. 오히려 솔직히 감정을 털어놓는 게 이제 우리 사이에서 자연스러운 게 아닐까 싶다. 다 알면서도 굳이 감정을 숨기려고 한다. 그래서 더 짜증 났던 것이다. 투정으로 들렸나 보다.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기지개를 켰다. 그러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사실 망설였다. 괜히 마음 상하게 하는 건 아닐까 걱정했다. 쌓였던 게 내려간 기분이다. 남은 음료 마시고 일어났다. 잘 가라고 손을 흔들어준다. 쑥스러웠던 걸까,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아마 얼굴이 붉어졌을 것이다. 뒤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숨이 가빠 집에 도착했다. 두 손으로 볼을 잡고 화장실 거울 앞에 섰다. 급히 온 탓인지 머리가 산발이었다. 눈도 충혈이 되어있었다. 땀 때문에 화장도 엉망이었다. 부끄러웠다. 하지만 기분은 좋았다. 마지막 잘 가라는 말이 귓가에 남아있었다.
(중략) 편의점 사장 생각이 났다. 이후 밥을 어떻게 먹었는지 모르겠다.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이렇게도 마음 빼앗기는 수가 있구나, 다시금 느꼈다. 나만 뿌듯했던 하루이지 않았나 싶어 미안하다. 딸만큼은 함께 했으면 하는데 그게 쉽지 않아 아쉽기만 하다.
내일 어떤 옷을 입을까? 멋 한번 부려볼까? 설렌다.
(중략) 커피 한 모금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딸 파마했다고 자랑한다. 사진 속 딸이 웃고 있다. 판박이다. 잠시 환상에 빠졌다. 좀 더 함께하고 싶었다. 헤어질 시간이다. 뒷모습에 잘 가요, 소곤거렸다. 이제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그래도 오늘은 다행히 별일 없이 끝났다.
욕심을 버리세요. 그러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욕심이 왜 없겠습니까? 하지만 그런다고 달라지는 게 없잖아요. 포기하면 하나는 건지게 됩니다. 마음의 평안. 그거면 훌륭하지 않나요? 저도 돈 많이 벌어 떵떵거리며 살고 싶습니다. 보란 듯이 좋은 차도 끌고 싶고요. 왜 그런 마음이 없겠습니다. 하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저는 욕심을 되도록 부리지 않으려고 합니다. 흘러가게 놔두는 거죠. 물 내려가듯이 자연스럽게 놓고 보는 거죠. 뭐 한들 바뀌는 게 있겠습니까? 사람 사이도 그렇겠죠. 아등바등해봐야 뭐 자기만 힘든 거 아니겠어요. 저는 놔두겠습니다. 흘러가는 대로, 운명에 따르는 걸 택하겠습니다. 그게 아픔이어도 받아들여야죠. 운명이니까요. 여기 편의점 매출도 제가 아무리 뛰어다닌들 크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벌인 일이니까 잘 흘러가게끔 관리할 뿐이죠. 먹고사는 거로 만족합니다. 그러고 보면 저는 운명론자일 수도 있습니다. 운명이 그렇다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결국 개인 선택이죠.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마세요. 분명 이겨낼 수 있을 겁니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 같이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