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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anitas Jul 22. 2019

잘 오셨어요


제정신으로 살아가기 힘들다

찾아온 당신에게

나는 미친 사람처럼 

시간을 때울 수 있는 약을 

두둑하게 제조해주었다


당신과 나는 이 주에 한번씩 

정해진 장소에서 의례적으로 만났다

아주 더운 여름날에도

아주 추운 겨울날에도

당신은 나를 찾아왔고

당신은 나를 기다렸고

나는 당신을 만나주었다


한 동안 당신이 찾아오지 않음에

문득 당신이 궁금해졌으나

나는 당신에 대한 얄팍한 궁금증만을 품은 채

스스로 잊혀지게 내버려두는 것만이 최선인 사람이었다


일 년이 지나 당신이 다시 내게 찾아왔다

그 사이 당신은 더 살집이 붙어있었고

머리카락은 아주 짧게 잘려 있었고

얼굴은 무척이나 창백했으며

입술은 까슬하게 메말라있었다


과거에 지녔던 당신에 대한 궁금증이

흔적도 남겨지지 않을 정도로 퇴색되었을 즈음에

찾아온 당신에 대한 기억은 한 줌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설핏 기억나는 당신의 외형

그 하나만이 내 기억의 어쭙잖은 편린이었다


나에게 찾아오지 않는 동안 

당신은 제 정신을 찾았다고 했다

약 따위 먹지 않고서 살아가고 싶다 

소망했다고 했다


당신은 

증오로 점철된 

주체할 수 없이 뛰고 있는 심장의 소리를

잠재워달라고 재촉했고


허무로 매워진

축 처진 어깨를 잘라달라

애원했으며


그 마저도 어렵다면

잠시간의 잠이라도 제대로 잘 수 있게 

도와달라 말했다


잘 오셨어요

라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 미친 사람처럼 

생을 살아갈 수 있는 약 몇 알을 처방해주었다


그는 웃었다

텅 빈 웃음이었다

나는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서 보는 웃음의 종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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