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쉬는 길>
“악 징그러워!”
언니는 내가 멈춰 선 이유가 앞에서 꾸물거리는 지렁이임을 알고는 비명을 질렀다. 나는 손수건을 꺼내 지렁이를 덮고 존재를 확인할 정도로만 살며시 잡는다. 아스팔트와 가능한 먼 풀밭 안쪽을 눈으로 확인한 뒤, 서둘러 그곳으로 뛰어가 손수건을 푼다. 어둠 속에서 흙 위 지렁이의 활기찬 움직임이 얼핏 보인다. 또 멈추고 같은 과정을 반복하기를 여러 번. 다 큰 지렁이 몸에 비해 굵기가 반도 안 되는 꼬마 지렁이를 발견했다. 가느다랗고 작아서 집으려고 하면 자꾸만 어디론가 움직여 애를 먹었다. 옆의 언니는 이제 뒷걸음질 치는 대신 플래시를 켜준다. 혹여 내 손에 꼬마 지렁이가 다치진 않을까 같이 걱정하면서. 결국 꼬마 지렁이가 흙에 이르러 닿기까지 나와 언니는 바로 뒤에서 보초를 섰다. 폭 좁은 아스팔트 트랙에서 오가는 사람들의 발에 밟히지 않도록.
어느 지렁이가 트랙을 가로질러 턱으로 막힌 곳에 다다른다. 곧 턱을 기어 올라가리라 생각하던 나의 예상이 빗나간다. 턱과 아스팔트 사이, 지렁이의 몸 너비만 한 틈에 흙이 들어차 있다. 그 좁디좁은 흙길을 따라 움직이는 또 다른 지렁이가 있다. 트랙을 건너온 지렁이는 그와 만나고는 몸을 틀어 틈이 이어지는 길을 따라 저의 긴 몸을 곧게 자리한다. 두 지렁이가 마치 한 몸이 된 듯 움직인다. 한 지렁이의 꼬리와 다른 지렁이의 머리가 나란히 겹쳤다가 멀어지기를 반복하며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방향을 틀면 순식간에 죽음과 가까워지는 길. 제 몸의 너비만큼만 자유가 있는 길. 다른 생명들을 가장자리로 밀어내다 못해 움직일 자유마저 몰아내고 만들어진 바닥 위를 나는 걷는다. 내가 무얼 밟고 서 있는지를 실감한다.
동네에 흙길이 넓어지는 상상을 한다. 나무가 막힘없이 뿌리를 뻗을 수 있는 흙. 비 오는 날 지렁이가 바깥으로 나와 숨 쉬고 다시 제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흙. 뭇 생명을 죽일 듯한 열기를 식혀주는 흙. 내가 밟고 선 아스팔트를 걷어내는 상상을 한다. 비가 오면 장화를 신고 질퍽한 흙을 걷는 게 자연스러워진다면. 보이지 않게 덮인 흙이 드러나 울퉁불퉁하다면. 빗물이 매끈한 표면을 미끄러지는 대신 넓은 흙 사이로 고르게 흡수된다면. 낙엽이 종량제 봉투에 담기는 대신 저를 키워낸 흙으로 돌아가 다른 생명을 키워낸다면. 지렁이와 흙과 나무가 숨 쉬는 땅에서 사람들도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게 된다면.
25.09. 지렁이와의 만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