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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추천하는아나운서 Apr 11. 2020

[좋아하는 시] 벚꽃이 달아난다 _ 이규리

좋아하는시_03

벚꽃이 달아난다_이규리


그는 나를 옆에 두고 옆사람과 너무 화사하다
이젠 그늘까지 화사하구나
죽방령 사이를 빠져나가는 한 마리 멸치처럼
빠른 내 그늘을 눈치채지 못한다
나무둥치라 여긴 내 중심은 자주 거무스름하다
임산부가 행복하다면 가득 낀 기미는 말할 수 없었던
속내일까

덜컹거리며 꽃길 백 리,
어쩌자고 화염길 천 리

나는 역방향에 앉아
그가 다 보고 난 풍경을 뒤늦게 훑는다

그 자리 그대로인데
풍경은 왜 놀란 듯 달아나고 있는지

벚꽃은 제가 절정인 줄 모르고
절정은 또한 제 시절을 모르고


한 친구가 문득 시집을 선물로 주었다. 새로운 직장으로의 발걸음, 그리고 여전한 도전의 발걸음을 응원한다며.


같이 건네준 편지에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시라고 적어놓은 것이 해당 구절과 함께 있었다. 그 날부터 꼬박 나흘 동안 매일같이 이 시를 읽으며 곱씹어봤다.


벚꽃은 제가 절정인 줄 모르고
절정은 또한 제 시절을 모르고


친구의 마음을 울렸듯, 내 마음을 가장 울린 구절은 역시 이 부분.


살면서 꽃 피우는 매 순간이 내 절정임을, 그래서 그 순간순간이 매번 소중함을 느껴야 한다는 것.


그런 뜻이 아닐까.


지나고서야 그때가 소중했음을 느끼는 것도 늘 그래서인 거니 말이다.


그래서, 오늘도 너무나 귀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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