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가지는 알고 있다

#053

by 서하

겨울 가지는 알고 있다

by 서하


겨울 가지는
스스로를 버릴 줄 안다


바람이 할퀴고
서리가 내려앉을 때
붙잡고 있던 잎을
하나씩 내려놓는다


남김없이 떠나보낸 자리
어느덧 텅 비고,
침묵 속에
자신의 속살을 듣는다


나는 아직
살아 있다


잎이 없다고
끝이 아니었다

해가 돌아오고
흙 속이 풀릴 때
그 빈자리 위로
가만히 무엇이 피어난다


겨울 가지는 알고 있다
자기를 비운 만큼
봄은 깊게 온다는 것을



✥ 모티브: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요한 12,25)


『겨울 가지는 알고 있다』

이 시는 '비움'과 '견딤'의 아름다움을 겨울 가지에 빗대어 묵상한 작품입니다.
삶에서 우리가 붙잡고 있던 것들을 내려놓는 일, 그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을 위한 공간 마련입니다.
‘잎이 없다고 끝이 아니었다’는 구절은 소유가 사라진 자리에야 비로소 본질적인 생명이 움튼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봄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비운 만큼” 깊이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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