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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coming Oct 25. 2020

채식주의자가 마트에서 장바구니를 채울 수 있을까?

대기업들이 채식을 시작했다

 중학교 2학년 무렵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 장르는 일본 비주얼 락이었다. 친구들이 일제히 g.o.d나 신화에 미쳐있을 당시, 나는 옷에 피를 묻히고, 머리를 형형색색으로 염색하고, 온갖 곳에 피어싱을 뚫어댄 비주얼 락밴드에만 심장이 반응했다. 고등학교로 진학한 이후로는 학업 스트레스 때문인지 취향이 더 하드 해졌다. 브릿락 같은 대중적인 장르도 듣기는 했지만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는 주로 스래쉬 메탈을 선곡했다. 지지징 쿠궁 쿠와아아! 같은 소리에 속이 다 시원했다. 하지만 이런 취향을 공유할 수 있는 또래 친구들은 없었다.

 "수미야~ 넌 뭐 들어?"

하면서 옆에 앉아 내 이어폰 한쪽을 슬며시 귀에 가져다 댔다가

 "으... 으응... 이런 거 좋아하는구나"

하고 갸웃거리며 물러서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사실 이런 음악을 반에서 나 혼자 좋아한다는 것이 내심 기분 좋기도 했다. 내가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모두가 다 좋다고 하는 것들에는 어쩐지 괜한 반감이 슬그머니 드는 편이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아웃사이더 기질도 한몫하는 것 같다.


홍대병... 그거... 내 얘기야...




 하지만 어디까지나 스스로 자처해서 아웃사이더나 소수가 되었을 때 신이 나는 법이지, 외부 요인에 의해서 매번 선택지가 적거나 없는 상황을 겪어야 한다는 건 조금 고달픈 일이다. 그런 상황을 채식을 결심한 뒤로 거의 매번 겪어야 했다. 물론 식당이나 카페에서 내가 고를 수 있는 메뉴 선택의 여지가 몇 없다는 게 오히려 홀가분하고 마음 편한 날도 많았다. 그러나 채식(페스코)을 10년째 해오면서 한 번도 빠짐없이 그런 상황들이 좋기만 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예를 들어 '오늘은 너무 피곤하니까 대충 라면으로 때울까'라고 마음을 먹어도 마트나 편의점에 가면 채식주의자가 고를 수 있는 라면은 없다. 모두 소고기 또는 닭고기 등이 함유되어있다고 적혀있기 때문이다. 레토르트 식품 중에 떡국이나 비빔밥 같이 고기가 굳이 없어도 될 것 같은 것들도 조미를 위해서인지 꼭 그놈의 '소고기 함유'가 적혀있다. 채식 만두가 맛있게 잘 만들어져 나오는 시대이건만 마트에서 판매하는 야채 만두는 왜 야채 말고 고기도 잔뜩 들어있는 건지. 늘 전투태세처럼 비건 식품을 인터넷에서 주문해서 상비해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요리하기 힘들 만큼 피곤한 날 편의점에서 뭐 먹을까 고르다가 더 힘들어지는 수가 있다. 채식이 힘겨워지는 가장 큰 이유는 고기가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고르는 즐거움을 누리고 싶거나 선택권이 필요할 때마저도 '선택권 없음'을 감내해야 하는 순간들 때문일 것이다.



 많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확실한 수익을 낼 수 있는 식품업계 대기업들로부터 채식주의자는 줄곧 외면을 받아왔다. 이를 테면 불닭볶음면 수출용의 경우, 해외에서는 종교적 이유 등으로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들의 수요가 제법 많기 때문에 대부분 비건 성분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비건 불닭볶음면을 먹어본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맛이 똑같다는데, 여전히 한국에서는 고기 성분을 함유한 제품을 판매 중이다. 똑같은(혹은 거의 비슷한) 맛을 낼 수 있는데도 굳이 한국 제품에 고기 성분이 들어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우리나라 소비자 중에 '고기를 먹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없거나 극소수라고 여겼기 때문 아닐까. 불닭볶음면을 예로 들었지만 식품 업계에 있어 '고기를 먹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지금까지 그다지 중요한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최근 분위기가 많이 바뀌고 있음을 체감한다. 작년 말, CU와 세븐일레븐에서 잇따라 비건 간편식을 출시했다. 입맛에 따라 호불호가 나뉘기도 했지만 내가 먹어봤던 CU의 비건 도시락과 비건 김밥은 채식주의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맛있다는 호응을 얻었다. 세븐일레븐이 출시한 비건 만두도 쫄깃하고 자극적이라는 평과 함께 주변 반응이 폭발적이었다.(사는 동네에 세븐일레븐이 없어서 결국 나는 맛보지 못했지만...) 한시적으로 출시됐다는 게 지금도 너무 아쉬운 지점이긴 한데, 간편식 시장에서 채식을 주목하고 있다는 게 놀랍고 반가웠다.

 

왼쪽부터 CU, 세븐일레븐에서 출시한 비건 간편식. 사진 출처 뉴시스(왼), 연합뉴스(오)



 뿐만 아니라 마트에서 채식 라면도 골라먹을 수 있게 됐다. 오뚜기 '채황', 농심 '야채라면', 풀무원 '정면'등 식품 기업들이 앞다투어 비건 라면을 출시한 것이다. 이전에도 채식주의자가 먹을 수 있는 비건 라면이 있기는 했지만 주로 대중적이지 않은 업체에서 만들다 보니 마트나 편의점 등에서는 구매하는 게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제는 장을 보러 가면 라면 코너에 당당히 비치되어 있는 채식 라면들을 만날 수 있다. 무려 뭘 먹을지 고를 수도 있다! (세 가지 다 맛봤는데 모두 맛있다. 채황은 조금 순한 편, 야채라면과 정면은 칼칼한 편이다.)



 반찬으로 즐길 수 있는 비건 가공 식품도 다양해지고 있다. 사조대림에서 비건으로 출시한 채담만두가 이마트에서 판매되면서 마트에서 채식주의자가 살 수 있는 만두가 생겼다. 풀무원에서도 비건 만두 출시를 준비 중이라고 한다. 동원F&B는 미국의 식물성 고기인 '비욘드 미트'라인을 독점 공급하고 있다. 롯데푸드는 더욱 공격적이다. 최근 제로미트 너겟과 까스를 출시해 식물성 대체육 시장의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특히 롯데 자이언츠의 투수인 노경은 선수가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더 게임 체인저스>를 접한 이후 비건 식단으로 전환했는데, 롯데푸드가 노경은 선수에게 제로미트 라인을 지원하면서 더 널리 알려지게 됐다. 현재는 롯데푸드의 식물성 대체육이 롯데 자이언츠 선수단 전체의 식단으로 제공되고 있다.  



 롯데리아의 미라클 버거, 최근 서브웨이의 언리밋썹 등 패스트푸드 업계에도 식물성 고기, 비건 열풍은 마찬가지다. 물론 예전에도 드문 드문 기획성으로 채식 제품이 출시되었다가 홀연히 사라지는 등의 이벤트는 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내로라하는 많은 기업들이 가열차게 채식 시장에 뛰어드는 건 유례없던 일이다.



 얼마 전 누군가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체질이나 건강 때문에 고기를 안 먹는 경우는 봤는데, 일부러 고기를 안 먹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있을까요?

 나 역시 '채식주의자가 150만 명(한국채식협회, 2018년 기준)으로 추산된다'는 통계 정도는 기사에서 접한 적이 있지만 다들 어떤 이유로 채식을 하는지, 과도한 육류 소비에 경각심을 느끼고 채식을 고려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되는지 알 길이 없었기에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채식에 관심 갖고 채식 식단을 자신의 일상에 조금씩 끌어들이려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고, 앞으로 훨씬 더 늘어난다는 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다. 많은 기업들이 채식 시장을 미래 사업의 중요한 한 축이 될 것이라 직감했다는 게 그 방증이다.




 요즘은 그런 세상을 꿈꿔본다. 마트에 장을 보러 나갔는데 이것저것 다 욕심껏 장바구니에 잔뜩 담았다가 '뭘 내려놓지?' 고민하는 상상. '어휴~ 다 비건이야. 뭘 먹어야 되나... 고를 수 있는 게 너무 많아 피곤하네'라고 푸념하는 어느 아웃사이더의 모습. 마냥 허황되거나 먼 훗날의 이야기일까?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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