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잡식가족의 딜레마>
나는 한 번도 돼지를 직접 보거나 만져본 적이 없다. 닭, 소, 돼지 중에서 나에겐 가장 거리가 먼 가축 동물이다. 아, 초등학교 때 현장학습이라는 이름으로 햄 공장에 갔던 적이 있다. 그때 허옇고 살집이 퉁퉁한 목 없는 돼지가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서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 이동하는 것을 본 것이 돼지에 대한 최초의 기억이다. 그 돼지는 곧 커다란 칼날에 세로로 쭉 반토막이 났다. 우리는 다 같이 '으... 으아앗' 소리를 내었다. 그 견학은 아이들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아무튼 그날 공장에서 점심으로 나온 햄 반찬이 도저히 목구멍으로 넘어가질 않았다. 한동안은 햄을 못 먹기도 했었는데 어느새부턴가 다시 돼지고기와 햄을 열심히 먹고 있더라만.
시간이 흐른 뒤 다큐멘터리 <잡식가족의 딜레마>를 통해 화면 속에서 다시 돼지들을 만났다. 채식을 결심하고 난 뒤라서 였을까, 전보다 조금은 동물들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된 나에게 그 돼지들은 많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동물은 말을 할 수 없어서 인간과 다르다고 하지만 강아지 태평이와 5년째 함께 사는 동안 배운 것이 있다. 동물은 말을 한다. 들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들리는 방법으로.
<잡식가족의 딜레마>를 제작한 황윤 감독은 대대적인 구제역 때문에 돼지들이 살처분당하는 모습을 뉴스에서 본다. 도중에 TV를 꺼버렸을 만큼 불쾌하고 찝찝한 장면이었지만 점점 돼지에 대해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돼지 농장을 직접 찾아가게 된다. 감독은 지리산 자락에서 돼지에게 적합한 서식 환경을 제공하며 기르는 농장 한 곳과 공장식 사육을 하는 돼지 농장 한 곳을 어렵사리 섭외해 (대부분의 공장식 농장들은 외부인의 출입이나 촬영을 완강히 거부했다) 돼지를 직접 만난다.
지리산 자락에 위치한 돼지 농장은 우리에 돼지가 좋아하는 지푸라기가 잔뜩 깔아 두고, 당근 잎이나 달맞이꽃 같은 풀들도 직접 재배해서 특식으로 나눠주는 곳이다. 돼지가 좋아할 만한 환경을 위해 나름의 열과 성을 다 했다. 일순이, 뚱순이, 지순이, 용순이, 돈수 등 돼지들 저마다 이름도 있었다. 그중 십순이는 임신 중이었다. 주인아저씨는 출산을 앞둔 십순이에게 지푸라기를 계속해서 가져다주었는데, 출산이 임박한 돼지는 본능적으로 지푸라기를 동그랗게 모아서 둥지를 짓기 때문이란다. 태어날 새끼들에게 폭신한 침대를 마련해주려는 것이다. 사람에게도 이와 비슷한 본능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산모가 막달에 이르면 무의식적으로 대청소를 하고, 새벽에 설거지를 하거나 욕실을 치우는 등의 행동을 하는 때가 있는데, 본능적으로 아이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 이 같은 행동을 '네스팅'이라 부른다고 했다. 그날 밤새 끙끙 앓아가면서도 열심히 몸으로 둥지를 지은 십순이는 이내 8마리의 새끼를 낳았다. 눈도 제대로 못 뜨면서 엄마 젖을 힘차게 찾고 쫄랑대는 모습들이 어찌나 귀엽던지. 어릴 적 '토실토실 아기 돼지~ 젖 달라고 꿀꿀꿀~' 하며 자주 부르던 노래가 절로 떠올랐다.
하지만 그 노래가 가르쳐주지 않은 뒷 이야기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아무리 좋은 환경의 농장이라고 해도 이곳의 돼지들 역시 고기가 될 운명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했다. 새끼 돼지 중 수컷들은 공장식 농장의 아이들과 다를 것 없이 거세를 당하는데, 이때 마취는 없었다. 황윤 감독이 농장 주인에게 왜 마취를 하지 않냐고 물으니 그저 '마취를 하고서 거세를 한 경우는 어느 농장에서도 없다'는 대답만 되돌아왔다. 굳이 거세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가? 거세를 하지 않으면 사람이 먹을 때 불쾌한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거세를 하면 돼지의 활동성이 떨어져서 살도 더 쉽게 붙는다고 한다. 그래서 새끼 돼지들은 생으로 고환에 칼집이 나고 사람의 손으로 뜯기는 고통을 당한다. 더러는 그 과정에서 쇼크와 출혈로 죽기도 한다. 수컷 새끼 돼지들이 한 마리씩 주인아저씨의 손에 붙들려가 끼약!(이라고 쓸 수밖에 없지만 직접 들은 비명은 어떠한 표현으로도 대체 불가능하다) 비명을 지르며 피를 흘리자 엄마 십순이는 자식들을 자기 뒤에도 숨겨보고, 황급히 지푸라기를 물어다 나르며 그 속에 새끼들을 파묻어도 본다. 그러나 걷잡을 수는 없다. 전쟁 같은 절차가 모두 끝난 뒤, 내심 미안한 마음의 주인아저씨가 십순이에게 다가가 보지만 그렇게나 잘 따르던 아저씨를 세차게 밀어내고 등을 보이던 십순이.
그런 십순이를 보면서 엄마의 얼굴이 겹쳐졌다. 내가 아주 어릴 적, 엄마 친구가 나를 안고 있다가 계단에서 떨어뜨렸는데 절친했던 친구에게 엄마는 다시는 안 볼 것처럼 벼락 같이 화를 냈다고 했다. 작은 아이였던 나를 초보 부부인 엄마 아빠가 씻기다가 뜨거운 물에 내 발을 잘못 담가서 내가 약한 화상을 입은 적이 있는데, 엄마는 아빠에게 빨리 병원에 데려가자고 소릴 지르며 머리카락과 눈에서 물을 뚝뚝 흘렸다고 했다. 내 기억 속 보일 듯 말 듯 한 엄마의 얼굴에 십순이의 표정을 옮겨보니 맞아떨어지는 듯했다. 자식이 다치거나 아플 때 마음이 짓이겨지듯 아픈 건 사람만의 일이 아니란 것을 새삼 확인했다.
돼지에게 좋은 환경을 제공하는 농장에서조차 마취 없는 거세와 같은 모순적인 일이 일어나는 것을 알고 실망스러웠지만, 공장식 돼지 농장에서는 최소한의 모성애를 표현할 기회조차 없었다. 새끼들이 생으로 이빨이 뽑히든, 고환이 잘리든 어미는 딱 몸집만 한 스툴에 꽉 낀 채로 축 늘어져 무기력하게 젖만 빨리고 있었다. 그런 어미 돼지를 보고 있자니 처참했다. 낳고 빼앗기고, 낳고 빼앗기고, 낳고 빼앗기고를 반복하는 동안 새끼들에게 둥지 한번 마음껏 지어주지 못한 어미. 돼지는 원래 위협으로부터 자식들을 숨기고 싶어 하고, 분노를 표현할 줄 아는 동물인데, 그것마저 박탈당한 채 보고만 있어야 하는 어미 돼지의 심정이 어떨지 상상조차 하기 두려웠다.
우리는 돼지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오해와 편견으로만 일생을 살아간다. 나 역시 그럴 뻔 했다. 돼지는 평생을 한 곳에 갇혀있어도 아무 생각 없을 것이고, 부드럽고 맛있는 살코기만 안겨줄 수 있으면 그만이라고 여겼다. 이렇게까지 강력한 착각과 단절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지구 상엔 돼지 10억 마리가 있다는데, 나는 돼지를 한 번도 직접 만나보지 못한 것에 그 이유가 있는 걸까? 우리가 만약 살아있는 돼지를 경험할 수 있다면 달라졌을까 생각해본다. 돼지를 직접 만져서 육질이 아니라 실제 피부가 얼마나 부드러운지, 껴안았을 때는 얼마나 따뜻한지, 이렇게 '꿀꿀'했을 때는 좋다는 뜻이고 저렇게 '꿀꿀'했을 때는 싫다는 뜻이라는 것을 구별할 수 있었다면... 지금처럼 돼지에게 대하기가 정말 미안했을 텐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