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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팡스키 Sep 27. 2022

안녕히 가세요. 네가 원하는 어떤 것도 여기엔 없습니다

비건 사람 친구입니다 ep. 복숭아


8월의 어느 비 오는 아침, 주말 오전 아홉 시. 커다란 유리문이 열리자마자 들어가 창가 쪽 책상에 자리를 잡았다. 신간이 들어온 서가 앞에 쪼그리고 앉아 읽어보고 싶은 책들을 골랐다. 오랜만에 도서관에 오면 이렇게 신간 코너를 스캔하곤 한다. 신나고 즐거운 시간이다. (에세이 섹션에서 유난히 퇴근, 퇴사, 그만두다 라는 단어가 자주 보이는 건 나의 심리 상태가 투사된 것일까, 세태가 투영된 것일까. 아직은 알 수 없지만 '둘 다' 일수도 있다)


실컷 책을 고른 뒤 책상에 쌓아두고 천천히 살펴본다. 오늘은 그중 마음을 뺏긴 소설집 하나를 펼쳐 읽었다. 구석에 틀어박혀 여섯 시 안내방송으로 퇴실 권유를 받을 때까지 책을 읽었다. 쓰디쓴 단편 소설 여러 편 덕분에 마음도 쓰고 맴도는 생각도 쓰다.

 주인공은 끝내 본인과 사랑하는 이에게 다가온 역경을 들어 버티지 못하고 그 무게에 깔려 주저앉고 말았다. 작가는 주인공이 일어서는 장면까지 써주지 않았다. 입 안이 매우 쓰다. 텀블러에 담아온 커피도 쓰고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하늘도 쓰다. 분명 아침에 원두를 갈고 서버에 내릴 때는 향긋한 커피였는데 이토록 쓴 커피가 되어버렸다.


가방을 챙겨 도서관을 나서는데 갑자기 달고 달아서 마음도 생각도 달아질 것 같은 뭔가를 먹고 싶어졌다. 그렇지만 늘 그렇듯 이런 욕구가 들 때의 비극은 손쉽게 먹을 수 있는 달다구리를 구할 수 없다는 점, 쓰디쓴 마음을 빠르고 간편하게 달랠 수 없는 나의 고집이자 약속이겠다.


쓰고 써서 저절로 찌푸려지는 마음을 데리고 장대비가 쏟아지는 길을 걸어 집으로 향한다. 커피나 마저 마셔야지. 한 손엔 우산을 한 손엔 텀블러를 들고 비 내리는 도로의 원경을 바라본다.

 줄지어선 베이커리, 카페, 도넛이나 꽈배기 전문점, 그리고 편의점들. 저들이 터벅터벅 걷는 나에게 자꾸만 꾸덕꾸덕한 초코 브라우니! 엄마는 외계인! 상큼 달콤한 딸기 타르트! 쫀득쫀득한 치즈 케이크!라고 말풍선을 던지는 듯하다. 애써 외면하고 발걸음을 옮겨보지만 ‘바보야 그냥 편의점에서 견과류바라도 사서 먹어 그러다 집 가기 전에 당 떨어져’라고 편의점이 말을 걸어오는 것 같다.


 '와, 그래 견과류바는 먹을 수 있는 게 하나라도 있지 않을까?!'


나는 편의점에 들어가 초콜릿과 젤리, 에너지바가 진열되어 있는 매대 앞에 서서 초코바와 에너지바를 종류별로 들어 성분표를 확인했다. [땅콩, 대두, 밀, 쇠고기, 우유 함유] 아 역시 초콜릿이 발라져 있는 건 우유가 들어가 있다. 아니 근데 쇠고기는 도대체 왜 들어가는 건데. 자 그럼 어쩔 수 없고 다음. 너는 이름에 단호박이 들어가니까 왠지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보자. 성분 함량이.. [땅콩, 대두, 밀, 꿀 함유] 다 좋은데.. 꿀..! 꿀이라니! (아니 꿀 대신 조청으로 넣어주시면 안 됐던 건가요..)

 빈손으로 편의점 문을 열고 걸어 나온다. 문을 열 때 딸랑~ 하고 울리는 종소리가 ‘어서 오세요. 고객이 원하는 무엇이든 여기에 있습니다’ 같은 나를 반기는 소리가 아니라 ‘안녕히 가세요. 네가 원하는 어떤 것도 여기엔 없습니다’ 같은 차가운 쇠와 쇠가 부딪치는 소리로 들렸다.


배가 고프고 마음이 허하다. 집까지는 십오 분만 걸으면 되긴 하지만 몸도 발도 너무 무겁다. 나는 날 때부터 이 도시에서 자라고 지내왔는데 일순간 이방인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된다. 왜 나는 능숙하게 간편한 달다구리 하나 사서 입에 쏙 넣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게 된 건가. 분식집 옆에 베이커리가 있고 역 근처 사거리에 프랜차이즈 카페와 편의점이 있는 것도 아는데! 그곳에서 파는 게 무엇인지도 속속들이 알고 있는데! 주머니에 만 원짜리 한 장도 찔러 넣고 왔는데!


나 참. 이런 날엔 이 세상은 내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곳이 아닌가 싶어 진다. 한 사람에게 이렇게도 우호적이지 못한 세상이라니.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내가 세상에 우호적이지 못한 건가 싶기도 하다.


그래도 뭐 어떡해. 이제 ‘비건’하는 일보다 ‘논비건’하는 일이 더 어려운 사람이 되어 버렸는데.








기분을 바닥에 질질 끌고 집에 도착했다. 축 처진 어깨로 방에 들어가 가방을 내려놓으니 엄마가 부엌에서 소리쳤다.


"왔어? 배고프겠네~ 엄마 복숭아 샀다! 복숭아 먹자!"


복숭아는 내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제일 좋아하는 과일이다.


"엄청 달아! 얼른 와!"


식탁에 앉아 복숭아 향을 맡으며 나는 생각했다. 90년대 도심에서 나고 자란 나의 달다구리 리스트에는 초콜릿 아이스크림, 과일이 올라간 파이나 타르트, 초콜릿 옷을 입은 과자와 빵들이 있었지만 날 때부터 열아홉까지 전라북도 수박의 고장에서 밭일을 도우며 자랐던 엄마의 달다구리 리스트에는 복숭아, 자두, 살구, 수박, 조청에 버무린 쌀과자, 깨나 땅콩으로 만든 강정이 있었다.


나는 여덟 조각으로 나뉜 복숭아를 한 조각 들어 입에 넣었다. 아삭아삭했다. 달고 맛났다.

'그래. 나는 이제부터 엄마가 먹는 간식을 따라먹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니 언제 그랬냐는 듯 하나도 서글프지 않았다. 오늘 느꼈던 외로움과 슬픔은 비건 초보자가 논비건 세상에서 비건 세상으로 한 발자국씩 옮겨가는 중에 겪는 과도기의 시행착오일 것이다. 그렇다. 한 세상이 나를 본체만체하면 나를 반겨주는 또 다른 세상에서 기쁘면 된다. 내가 몰랐을 뿐 늘 그 자리에 있던 세상에서.











커버 사진 :    농사를 시작한 사촌 언니가  계절마다 공을 들여 가꾸고 애정을 쏟아부어 노랗게 사랑스럽게 익어가는 복숭아입니다복숭아가   가득  향을 퍼뜨리며 목구멍을 넘어갈 때마다 감사함을 느낍니다. 복숭아라는 열매가 탄생하게  경이로운 진화 과정  겹겹의 우연에게. 복숭아 알레르기 없이 나아준 고마운 엄마에게. 복숭아 나무가 열매를 맺을  있도록 해마다 시간과 수고를 아끼지 않았을 초보 농부 언니에게.     다치거나 멍들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운전했을 배송기사님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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