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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팡스키 Oct 04. 2022

우유는 끊었지만 시리얼은 먹고 싶어서

비건 사람 친구입니다 ep. 시리얼

귀여운 호랑이 캐릭터가 나와 “호랑이 기운이 솟아나요!”라고 말하는 광고를 보고 자랐다. 학창 시절부터 나에게 시리얼은 간편하고 빠르게 아침식사를 대체할 수 있는 아침 메이트였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고 나는 비건을 결심하던 밤, 일기에 다짐을 끄적이던 그날조차도 아침은 시리얼에 과일 잘라 넣고 우유를 부어 먹었을 정도였다.

 그래! 나는 이제 엄마 소의 몸에서 나온 (아기 송아지를 위한) 모유를 먹지 않을 테지만, 시리얼은 먹고 싶은데. 시리얼이랑 그래놀라는 비건도 많은데… 그때부터 나의 '시리얼 메이트 찾기'는 시작됐다.


흔히 알고 있던 두유는 특유의 비린 향이 시리얼의 고소한 맛과 어우러지지 않아 원하는 조합이 아니었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두유를 만난 시리얼들은 너무 금방 눅눅해져 버렸다. 다음은 그나마 대중적이라 마트나 편의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던 아몬드 밀크. 종류별로 사다 먹어보았지만 뭐랄까 필요하지 않은 향을 첨가한 밍밍한 물처럼 느껴졌다. 땡. 이것도 내가 원하는 조합은 아니었다. 다음으로 시도한 건 귀리로 만든 오트 밀크. 이것도 아몬드 밀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게다가 비싸! 우유보다 비싸! (아니 근데 왜 우유가 더 싸?)


가격 측면을 헤아려 보고 나니 분노 버튼이 움찔움찔했다. 아니 비건 음료 먹는데 이 정도의 값을 내야 한다면, 우유가 훨씬 비싸야 맞지 않나. 우유라는 상품의 가격에는 소 한 마리, 한 마리의 자유를 제한하고 몸을 착취한 값을 매기지 않고 있으니까 이런 가격이 도출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소는 아마 엄청 해방되고 싶을 것이다. 익숙한 분노와 한숨의 소용돌이가 몸을 훑고 입과 코로 나왔다.






밋밋한 기분으로 시리얼 먹기를 몇 주.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 했던가. 아몬드 밀크, 비건 밀크를 여러 차례 검색한 나의 검색기록이 유튜브 알고리즘에게 유효한 재료가 되었는지 뿅! 하고 내게 귀한 유튜버를 소개해줬다.

 영상을 꼼꼼히 보니 요리를 연구하는 사람이고 대부분의 재료는 가공품을 사는 대신 필요한 원재료로 만들어 쓰는 사람 같았다. 채널에 올라온 영상을 쭉 살펴보니 비건을 지향하는 사람이었다. 어떤 제목이나 썸네일에도 동물을 재료로 한 단어나 이미지는 보이지 않았다. 차곡차곡 쌓인 피드에는 비건 밀크 만드는 방법뿐 아니라 비건 치즈 만드는 법, 비건 김치 담그는 법, 비건 떡국 끓이는 법까지 풍성한 메뉴들이 채워져 있었다. 초보 비건인 나에게는 이거 정말 무료로 봐도 되는 건가 싶은 은혜로운 정보들이 가득했다.

 나는 육성으로 "감사합니다"를 외치며 구독과 좋아요 알림 설정을 눌렀다. (유튜브 알고리즘 거의 지니 수준. 땡큐 쏘 머치.)


감사한 요리연구가 유튜버님 덕에 나는 세상 모든 식물성 음료를 한 번씩 사서 맛보고 입맛에 맞는 브랜드를 고르는 대신 집에서 견과류로 비건 밀크 만드는 방법을 익혔다. 직접 만들어 보니 밍밍한 물이 전혀 아니었고 엄청 고소한 데다 풍성한 맛과 향이 났다. 구운 아몬드로도 만들어 보았고 생아몬드로도 만들어보았고 반나절 물에 불려 껍질을 벗긴 아몬드로도 만들어 보았다. 캐슈넛을 섞어 봤고 호두도 섞어 봤다.


여러 날 테스트를 거친 결과, 내 시리얼메이트가 될 버전으로 구운 아몬드, 구운 캐슈넛 반반 조합을 찾았다. 돌이켜보면 우유 특유의 향이 그리 달갑진 않았던 것 같은데 왜 더 훌륭한 선택지를 찾으려는 시도를 해보지 않았는지 의아할 정도의 맛이었다. 그동안 나는 어린 시절 수동적으로 학습해 온 맛들에 너무 익숙해져 도처에 널린 선택지를 쳐다도 보지 않은 게 아닐까 싶어졌다. 심지어 이제 일반팩, 멸균팩 쓰레기도 안 나온다.






주에 한 번씩 시리얼메이트를 만들어 냉장고에 넣어 놓고 아침마다 꺼내 과일, 시리얼과 함께 먹는다. 때로는 요리에 쓰기도 한다. 우유나 생크림이 들어가는 레시피에 같은 비율로 넣으면 완벽한 제 몫을 해준다. 예를 들면 크림 파스타, 인도식 커리 같은 요리를 비건으로 해 먹을 수 있다.

 처음엔 스마트폰에 유튜브를 띄워 놓고 일시정지 눌렀다가 재생 눌렀다가, 10분 걸릴 요리를 20분, 30분 걸려 하기도 했지만 이제 스마트폰 없이도 뚝딱뚝딱 만들어 낼 수 있게 됐다. 역시 반복 학습은 정직하다.


생각해보면 비건으로 살아가는 일은 하루아침에 급작스럽게 무지를 경험하다 새로운 정보와 방식을 하나씩 하나씩 습득해나가는 일인 것 같다. 비건을 지향하겠다는 것은 의식주를 바꿔가는 일이기에, 기존에 알던 모든 지식이 무용지물이 되는 경험이기에 그렇다. (바꿔 말하면 이전엔 나의 일상 유지와 영위 전반에 동물 착취가 전제되어 있었다는 말이 된다)


 새로운 언어를 배울 때 느끼는 감정도 떠오른다. 처음 외국어를 익힐 때 느끼는 답답함.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모국어로는 비유와 상징을 섞어서 현란하게 지금 이 상황과 내가 느끼는 감정을 설명할 수 있는데 외국어로는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입이 떨어지지 않고 애써서 만들어낸 표현은 모국어의 그것과 비교해 너무나 일차원적이고 납작해서 드는 자괴감. 그런 감정들이 초보 비건에게도 있는 것 같다. 가지고 있던 습관을 들어내고 새로운 습관들로 일상을 쌓아 올려야 하니까. (처음 비건을 접했을 때는 밥이랑 풀만 먹어야 하는 줄 알았다)


그래도 우린 반복해서 단어를 외우고 부끄러워도 입을 떼서 틀려가면서 때론 뿌듯함느껴가면서  언어를 배울  있다.  것이 아니었던 언어와 문화에 끝내 발을 담글  있게 된다. 포기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언어와 문화의 바다에서 수영도 서핑도   있게 된다. 비건도 그런 새로운 언어이지 않을까. 동물을 괴롭히지 않기 위해 최선을  해보는 언어. 그런 바다.








"딸, 그거 만드는 거야?"


부엌에서 믹서를 돌리며 주말 아침의 고요를 깨뜨린 내게 방에서 나오던 엄마가 눈을 비비며 물었다.


나 : 응, 어제저녁에 파스타 만드느라 남은 거 다 썼더라구

엄마 : 그래? 잘 됐네. 그거는 만들자마자 먹는 게 제일 고소하고 맛있어

나 : 엄마도 시리얼 먹을 거야?

엄마 : 아니 엄마는 미숫가루 타서 먹을래. 오곡라떼처럼 먹어야지

나 : 그래, 그럼 한 잔은 따뜻하게 데워줄게

엄마 : 근데 딸, 그거 부르는 이름은 없어? 그거 그거 하니까 안 친한 느낌이야

나 : 음. 우유는 안 붙이고 싶은데.. 우리 집에만 있는 거니까 우리가 붙이자 이름!


엄마는 거실에 있는 화분들에 안부를 물으며 물을 주기 시작했다. 나는 믹서 전원을 끄고 시리얼 볼에 한 잔, 머그컵에 한 잔을 따랐다. 머그컵에 미숫가루 두 스푼을 넣어 잘 저은 다음 전자레인지에 넣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유나 밀크 같은 단어는 붙이고 싶지 않았다. 근데 또 아몬드유, 캐슈유라고 하자니 뭔가 식용유 느낌이 났다. 아보카도유, 올리브유 같은 느낌..


따끈하게 데워진 머그컵을 식탁에 놓자 엄마가 그 앞에 앉으며 말했다.


엄마 : 아침햇살 어때? 아침마다 먹으니까?

나 : 오. 그런 느낌 좋다! 근데 아침햇살 이미 있는 거잖아. 아니면 햇살만 바꿔서 아침메이트 어때?

엄마 : 메이트가 뭔데?

나 : 음. 자주 보는 친구 같은 느낌이야

엄마 : 그럼 시리얼메이트 해~ 네 시리얼 친구잖아


나는 믹서에 남은 나머지 하얗고 뽀얗게 갈린 내용물을 유리병에 담고 마스킹테이프에 이렇게 적어 병뚜껑에 붙였다.

‘시리얼메이트 9/23~’


그치만 요즘 엄마는 모닝이라고 부른다. 모닝.

시리얼메이트 너무 길다고 :]








추신 하나. 시리얼메이트 레시피 :

자기 전에 볼에 아몬드와 캐슈넛을 넣고 물을 부어 불린다. 아침에 일어나서 견과류와 물을 1:3 비율로 믹서에 넣고 소금 조금 친 다음 곱게 간다. 끝!



추신 둘세상 모든 카페에서 비건 밀크를 디폴트로 하고 고객 요청 시 값을 더 받고 우유 옵션으로 변경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그러면 우유 소비가 줄어들지 않을까.









커버 사진 : 가장 최근에 만든 시리얼메이트입니다. 글을 쓸 당시에는 국내에 비건 음료 종류가 다양하지 않았습니다. 해외 오트 밀크 브랜드가 들어오기 전이었어요. 지금도 만들어 먹는 게 익숙하지만 가끔 지인의 추천이 있으면 사서 먹어보기도 하는데 그중 현재 저의 최애는 오틀리 초코맛, 그리고 마이너피겨스 오트 두 가지입니다. 마이너피겨스 오트를 시리얼 볼에 담고 러브크런치의 레드 베리 그래놀라에 딸기와 블루베리, 아몬드 5개를 넣어 먹는 것을 좋아합니다. 달다구리가 먹고 싶을 때는 같은 조합에 오틀리 초코맛을 부어 먹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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