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팡스키 Sep 06. 2022

열세 개의 김밥 조각과 열세 개의 햄 조각

비건 사람 친구입니다 ep. 야채 김밥




-사장님, 이 친구가 고기 못 먹으니까 햄이랑 계란은 꼭 빼주셔야 해요!


선배가 재차 강조하며 짧게 끊긴 종이의 주문 내용을 확인했다. 우리는 몇 개 남지 않은 빈 테이블 중 구석 자리를 찾아 앉았다. 테이블과 테이블 사이 좁은 공간에 가방을 내려놓을 수 없어 의자에 비스듬하게 걸었고 각자의 패딩은 돌돌 말아 무릎 위에 놓았다. 선배는 수저 두 개와 젓가락 두 세트를 꺼내 들고 짝을 맞추며 말했다.


-오늘 고생 많았어 진짜, 내가 했어도 정신없었을 거야. 기특하다 기특해!

-아니에요. 선배 없었으면 저 막판에 정신 놓을 뻔했어요.


나는 이마를 짚고 그새 삼십 분이 흘러버린 행사의 마지막을 떠올렸다. 리허설 때도 멀쩡했고 라이브 전에도 분명 서너 번 확인했을 텐데 생중계로 무대가 송출되고 있는 와중에 마무리 영상이 재생되지 않았다. 다시 떠올려도 아찔했다. 선배에게 복사본이 없었다면... 뒷일은 상상하기도 싫은 사고였다. 그러나 기적처럼 선배 주머니 속에서 USB가 나타났고 빠르게 의사소통이 이루어졌고 진행자의 은혜로운 너스레 덕분에 마무리도 무탈했다. 이제 들어가서 송출 장비랑 소품들 정리하고 내일 오전에 발행할 뉴스레터 내용만 뽑아두면, 끝이다. 쉴 수 있다.


선배는 내일과 또 다른 내일, 이번 주에 해내야 할 크고 작은 일에 대한 피로를 공유했다. 선배는 아마 내가 처리해야 할 일보다 더 신경 쓸 게 많고 복잡한 일들을 떠안고 있겠지. 말을 잇지 못한 채 턱을 괴고 끄덕끄덕하며 겨우 선배의 말을 따라잡는 가운데 빨간 앞치마를 두르고 양손에 쟁반을 든 아주머니가 테이블 위로 조심스럽게 음식을 내려놓았다. 비좁은 테이블 사이의 공간을 아슬아슬하게 비껴 비스듬히 선 채였다.


-제육 하나 야채김밥 하나 맞죠?


선배와 나는 "감사합니다" 하고 고개를 숙이며 차례로 각자의 접시를 받았다. 아주머니는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어묵 국물 두 그릇을 선배 쪽에 하나 내 쪽에 하나 내려놓고는 “맛있게 먹어요" 하며 바삐 돌아섰다.

 하얗고 동그란 접시 위 일정한 두께로 가지런하게 잘린 김밥에는 윤기 나는 참기름이 발라져 있었고 그 위로 통깨가 뿌려져 있었다. 고소한 향이 났다. 아주머니가 막 테이블 사이를 벗어나려는 찰나, 김밥에 머무르던 선배와 나의 시선이 동시에 한 곳에 멈추었다. 김밥 꽁다리에 햄이 삐죽 나와 있었다. 선배가 다급하게 손을 뻗어 아주머니를 붙잡았다.


-아주머니, 많이 바쁘신데 실례합니다. 이 친구가 고기를 못 먹거든요. 햄은 빼 달라고 주문했는데 들어가 있네요. 혹시 바꿔주실 수 있을까요?


선배는 한 문장 한 문장 예의 바르게 물었고 아주머니는 앞치마 주머니에 삐져나온 주문서를 꺼내 확인하더니 당황한 눈치였다. 야채김밥 하나 제육볶음밥 하나라고 프린트된 종이에는 '김밥 : 햄 X 계란 X'라고 검은색 사인펜으로 휘갈겨 쓴 자국이 남아 있었다.


-아이고 그랬네. 음... 근데 햄이 고기야? 고긴가?

-아니 근데 김밥에서 이걸 다 빼면 학생은 뭘 먹어..


아주머니는 궁금하다는 표정을 하며 우리에게 묻는 듯도 하고 스스로에게 묻는 듯도 한 말투로 말했다. 한 손에는 여전히 무거운 쟁반을 든 채 카운터에 선 사장님에게 한 번, 연신 김밥을 말고 계신 아주머니의 분주한 뒷모습에 한 번 눈길을 두던 아주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학생, 너무 미안한데 우리가 지금 제일 주문이 밀리는 시간이고 많이 바쁜데, 그냥 빼고 먹으면 안 될까? 미안해요.


과연 그랬다. 회사촌 한복판에 이름난 분식집의 퇴근 시간은 정말 엄청나게 바쁜 러시아워였다. "제육 하나 고기만두 하나요", "오징어볶음 하나에 라면 둘이요", "참치김치 둘에 잔치국수 하나요" “2번 테이블에 만두 추가요” 주문서가 끊임없이 밀려들었고 영수증이 프린트되고 찢기는 소리가 리드미컬하게 이어졌다. 나는 손을 뻗어 선배의 손등을 두드리며 아주머니에게 말했다.


-빼고 먹을게요. 괜찮습니다.


아주머니는 미안하고 고맙다는 듯 내 어깨를 두드렸고, 비좁은 테이블 사이를 요리조리 지나가며 맞은편에 있는 테이블에 만두 접시와 간장 종지, 그리고 아직도 뜨겁게 끓어오르고 있는 뚝배기와 밥 한 공기를 내려놓았다.

 나는 선배를 향해 애써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였다. 푹 한숨을 내쉰 선배와 나는 말없이 그리고 신속정확하게 13개로 잘린 김밥 조각들에서 13개의 햄 조각들을 툭툭 밀어 젓가락으로 빼내는 데 열중했다.


-햄이 고기죠. 그럼 뭐겠어요, 햄이. 아니 햄, 계란 뺀다고 깎아주는 것도 아니고 다른 야채 더 넣어주는 것도 아니면서 그냥 빼주는 것도 안 해주네


선배는 덩그러니 모인 햄 조각들을 가져가 제육볶음밥에 넣고 쓱쓱 비비면서 궁시렁거렸다. 햄이 쏙 빠진 김밥들은 비슷비슷한 모양으로 네모난 빈자리가 생겨 있었다. 나는 내 쪽에 있던 어묵 국물을 선배 쪽으로 밀어주고 컵에 물을 따랐다. 방금 만 김밥은 따뜻하고 맛있었다.


-근데, 빨리 먹고 들어가야 하니까 분식집 오긴 했다만.. 이거 먹고 괜찮겠어? 오늘 늦게 끝날 것 같은데. 너무 시원찮게 먹는 것 같아 걱정이다.


꼬박 한 달을 준비한 행사 장소 근처에는 그 분식집 외에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옆 건물 한정식집은 너무 비싸고 오래 걸렸고 커스텀 주문이 가능한 프랜차이즈 샌드위치 가게는 두 블럭이나 걸어야 해서 시간 내에 다녀오기엔 멀었다. 분식집에서는 햄, 계란을 뺀 김밥 말고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고.






 야채김밥에서 미처 빠지지 못한 햄 혹은 계란. ‘아니 이걸 다 빼면 뭘 먹어?’ 같은 의문 가득한 걱정. 익숙한 오류였고 익숙한 질문이었다. 비건이 뭔지 비건 메뉴가 뭔지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은 사회였고 사원증을 걸고 있지 않으면 학생으로 보이는 선배와 나는 청바지에 후드티 차림이었다. 일 년에 한 번 정장 입을 일이 생길까 말까 하는 업무 문화 안에서도 차림새로써의 격식이 거의 필요하지 않은 선배와 나는 사회초년생이었다.


-어쩔 수 없죠. 저 프린트할 거 몇 개 남아서, 먼저 올라갈게요.


나는 마지막 남은 김밥 한 조각을 마저 입에 욱여넣고 찬물을 털어 넣었다. 어쨌든 '야채김밥에 햄이랑 계란 빼주세요'나 '야채피자에 치즈 빼고 만들어주실 수 있나요?' 혹은 '잔치국수요, 멸치육수 말고 그냥 맹물로 끓여주실 수 있나요?' ‘바지락칼국수 시킬 건데요, 바지락 빼고 끓여주시겠어요?’ 같은 해괴한 주문을 해야 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기로 한 건 내 선택이었다.


-아, 선배 혹시 담배 태우고 시간 괜찮으면 1층 스벅에서 바나나 하나만 사다 주세요!








커버 사진 : 햄이 쏙쏙 빠진 김밥 사진을 찾아 첨부하고 싶었지만, 그런 때에는 늘 너무 지치고 피로했던 탓인지 못 찍어버렸습니다. 사진첩에 그런 사진은 있질 않네요. 대신 커버 사진은 이 글을 끄적거릴 당시 제 옆에 있어주던 사랑하는 가족의 사진입니다.

이전 03화 네가 고기를 안 먹고 산다고? 앞으로 평생?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