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건 사람 친구입니다 ep. 심야식당
밤, 움직일 체력은 남지 않았는데 잠이 쏟아질 정도로 피곤한 건 아니고 그렇다고 책을 읽기엔 에너지가 부족할 때 넷플릭스를 켠다. 여기저기 헤매지 않고 곧바로 시청 중인 컨텐츠를 재생해 20분에서 30분 안에 끝나는 에피소드를 보고 잠을 청하곤 한다. 이때 보는 시리즈물을 선택하는 기준은 두 가지. 너무 어둡지 않을 것, 인물이 고통을 겪더라도 괜찮아지는 장면까지 나올 것.
넷플릭스 구독을 시작한 이래 최근까지 나의 픽은 <프렌즈> 시리즈였다. 요즘엔 <심야식당> 시리즈를 보기 시작했다.
<심야식당>은 에피소드마다 한 가지 음식을 매개체로 등장인물의 얽힌 인생사를 다루고 있다. 가볍게 볼 수 있는 날도 있지만 이야기에 담긴 삶의 함의를 생각하다 보면 가볍게 볼 수만은 없는 날도 있다. 간혹 의도치 않게 오랫동안 재생된 적 없던 기억 속 한 장면의 버튼을 눌리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어제 봤던 에피소드의 음식은 '돈스테이크'. 방향이 아주 명확한 삼각관계와 짝사랑 중인 인물들이 등장했다. 마스터가 만든 돈스테이크 메뉴는 동그란 사기그릇에 잘 익힌 스테이크 한 점과 잘게 썬 양배추 샐러드를 올린 정갈하고 단촐한 한 접시였다. 스크린을 통해서는 맛도 냄새도 느낄 수 없었지만 그 모양새가 프루스트의 마들렌을 삼킨 것처럼 기억을 되살렸다.
대학 시절 나의 소울푸드는 우동 전문식당의 사이드 메뉴. 두껍고 바삭하게 튀긴 카츠와 참깨 향이 솔솔 나는 양배추 샐러드였다. 학교 앞 좁은 골목길 끝자락에 있던 우동 전문식당은 중간고사나 기말고사가 끝나면 수고했다는 의미로 나에게 선물하듯 가기도 했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전하지 못해 마음이 갈리는 날이면 친구와 함께 가기도 했다. (그런 날은 카츠와 함께 맥주 혹은 얇은 레몬 조각이 동동 띄워진 하이볼을 마셨다.)
식당의 외관과 내부는 <심야식당>의 비주얼과 거의 흡사했다. 호두나무 정도의 어두운 톤의 목재로 만들어진 바(bar)와 주방이 마주하고 있었고 젓가락과 냅킨이 놓인 곳곳마다 요정 같은 고양이 피규어가 놓여 있었다.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설 때마다 풍기는 고소한 참깨 향이 좋았고 주문하기 전에 물과 함께 내주는 뜨끈한 우동국물 한 그릇이 뭉쳐진 목과 어깨도 풀어주고 차게 언 마음도 녹여주는 것 같았다.
입천장이 까질 듯 바사삭한 카츠가 나오면 따로 조그마한 종지에 내어주시는 소스에 찍어 입에 넣고 조심조심 씹었다. 간혹 배스킨라빈스의 아이스크림을 푸는 스쿱으로 떴을 것 같은 동그란 모양의 하얀 밥을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게 먹는 데 집중하기도 했고 너무 매운 할라피뇨를 삼키다 사레가 들려 고생하기도 했다. 그러나 언제나 카츠를 다 먹을 때까진 온전히 먹는 행위에만, 입안에서 느껴지는 감각에만 집중할 수 있어 마음이 소란스럽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식당은 내가 졸업한 이후 직장을 다니는 동안 명확히 알 수 없는 언젠가의 시점에 사라졌다.
나는 이제 21학점을 수강한 학기말 마지막 시험을 마쳤을 때처럼 고생스러운 타사 협업 프로젝트를 끝냈을 때도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여 마음을 비롯한 기억을 관장하는 모든 영역들이 삐그덕거리다 고장이 났을 때도 소울푸드를 찾아갈 수는 없는 형편이 됐다.
찾아갈 수 없어서 아쉽기도 하지만 찾아갈 수 있는데 먹을 수 없는 것은 또 다른 불행이어서 한편으로 다행이지 싶기도 하다. (가끔 내가 정말로 카츠를 포기하고 살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 싶은 마음에 새삼스레 놀랄 때가 있다. 카츠는 내가 <짱구는 못 말려>를 보던 시절부터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아직도 종종 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날 카츠와 함께 마셨던 산토리 하이볼이나 서비스로 주셨던 교자 세트가 그리운 날이 있다. <심야식당>의 마스터는 주문하는 사람의 요청에 따라 면요리를 면 없이 만들어주기도 하고 메뉴에 없는 요리를 근처 슈퍼에서 사 온 재료로 만들어주기도 하던데, 동네에 심야식당 같은 공간이 생기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마음이 헛헛할 때 따끈한 음식을 먹으러 찾아갈 수 있는 곳이 비건 사람들에게도 많이 늘어났으면 좋겠다. 꼭.
그건 그렇고, <심야식당> 속 인물들이 희로애락을 느끼며 각자의 소울푸드를 먹는 장면에서 에피소드가 전하려는 온전한 그것에만 집중할 수 없는 이 불화는 어찌하면 좋을까.
대파와 배추, 당근과 숙주를 넣고 볶던 팬에 돼지고기가 들어갈 때, 혹은 두툼한 고깃덩어리가 기름에 지글지글 익어갈 때, 흠칫 흠칫 굳어버리는 나는 과연 <심야식당> 시리즈를 완주할 수 있을까. (심지어 나는 이 글에 '고기' 대신 ‘동물 사체’라고 쓰고 싶지만 일단은 '고기'라고 쓰고 있는 불화도 함께 겪는 중이다.)
사람들의 살아가는 이야기, 오래 잊고 지내던 은인에 대한 마음 혹은 사랑하던 날들의 추억을 전하려는 이야기와 불화하고 싶지 않은데. 나는 오늘도 세상과 필사적으로 불화하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유쾌하지 못한 글을 쓰게 되고 만다. (말랑말랑하게 시작해서 애틋하게 마무리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이럴 때면 비건을 지향하는 사람으로서 불편함 없이 볼 수 있는 영화나 드라마, 책이 몇이나 있을까 싶은 아찔함도 드는 게 사실이다. 잔인한 고어물이나 깜짝깜짝 놀라게 되는 스릴러물은 미리 알고 거를 수 있지만 논비건 요리 과정은 로맨스에도 여행 다큐멘터리에도 아이들이 보는 애니메이션에도 전조 없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실제로 내가 사랑해 마지않던 영화와 책 중 절반 이상이 보기 힘든 숙제처럼 되었고 애정하던 음식들과도 다신 만날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예리한 나이프로 스테이크를 써는 장면이나 뜨거운 기름 속에 카츠를 넣는 장면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고어물이 아닐 텐데 나에게는 고어물이 되어버려서 그렇다.
이젠 돌이킬 수도 없다. 그러니까 이렇게 된 이상 내 약속은 늘 명징하다. 과거에 느낄 수 있던 특정 행복감들이 모조리 내 미래에서 소거된다 해도 비건으로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던 날, 그날 느꼈던 생경한 깨달음 이전의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그리움은 그리움으로 두려고 한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해 동물을 덜 괴롭히고 싶다. 인간에게 그렇듯이.
이렇게 살기로 한 내가 좋고, 더욱 나라고 느낀다. 사랑하지만 다신 볼 수 없게 된 수많은 것들에 대해, 기꺼이 상실과 그리움을 감당하기로 한 나에게 큼지막한 응원을 보내고 싶다.
커버 사진 : 펑-펑- 눈이 내리던 날, 친구와 나란히 바(bar) 자리에 앉아 마셨던 맥주입니다. 친구가 고른 라거와 제가 고른 흑맥주, 맛과 향을 기억해낼 수 있는 사진. 술이랑은 사이가 좋지 못해 종류를 꿰고 있진 않습니다만 맥주도 비건이 있고 논비건이 있습니다. 재료는 전부 식물성이지만 양조과정에서 침전물 제거를 위해 동물성 성분을 쓰는 브랜드가 있다고 해요. 제가 아는 비건 맥주는 기네스, 스텔라, 호가든, 칭따오, 버드와이져, 아사히, 카스 정도입니다. 참고하셔요. 혹, 맥주를 사랑하는 독자라면 위키를 활용해보셔요. 링크 남겨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