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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팡스키 Oct 07. 2022

맛있으면 아끼는 사람들에게도 먹게 해주고 싶다

비건 사람 친구입니다 ep. 스쿼시



누구나 한 번쯤 맛있는 음식을 발견할 때 "와 이거 진짜 맛있다!" 생각하다 소중한 사람이 떠오른 적이 있을 것 같다. 사당역 근처 비건 레스토랑의 애피타이저 메뉴인 스쿼시는 비건을 시작하고 나서 만난 유일한 나의 소울푸드이자 최애 메뉴였다. 누구에게 소개해도 실패한 적 없던.

 원래 맛있으면 아끼는 사람들에게도 먹게 해주고 싶다. 특히 아끼는 사람이 기운 없는 날에는 더더욱. “먹어봐. 먹어봐.” 하고 잠자코 기다렸다가 “진짜 엄청 맛있네?” 하며 행복해하는 얼굴을 보고 싶어지니까.


스쿼시는 불향 가득하게 구운 애호박 위에 방울토마토와 달달한 소스가 얹어져 나오는 간단한 한 입 요리다. 맛은. 맛은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나는 맛을 묘사하는 데는 일가견이 없는 편이고 미식가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너무 맛있다고만 표현하기에는 아쉬운 마음이 들기 때문에 내식대로 표현해보자면, 고마운 사람들이 생각나는 맛이라고 쓰고 싶다.


 비건은 아니지만 매번 나와 함께 집밥을 비건으로 먹어주는 엄마, 비건은 아니지만 나랑 만날 때마다 비건 식당을 검색해주고 지도 어플을 켜 골목골목을 누벼가며 함께 가주는 친구들, 비건은 아니지만 점심 메뉴를 고를 때마다 내가 먹을 메뉴가 있는 곳으로 기꺼이 가주는 동료들이 생각나는 맛. 데려와서 맛을 보여주고 동그랗게 커지는 눈과 올라가는 입꼬리를 보고 싶어지는 맛.


실제로 나는 참새가 방앗간 들리듯 스쿼시를 찾았다. 그러니까 친구가 출장을 왔는데 며칠 동안 열심히 쓴 기획안이 논의 테이블에도 못 올라가고 갑자기 취소됐다는 통보를 받았다며 나에게 잠깐 나올 수 있냐고 물어왔을 때 (심지어 친구가 하고 싶다고 한 것도 아니고 선배들이 안 한다고 안 한다고 토스해서 떠맡은 프로젝트였다)

 혹은 썸 타는 사람이 분명 마음이 있는 것 같은데 금요일에는 같이 저녁 먹으면서 그렇게 대화가 잘 통했는데 주말 내내 연락을 '읽씹' 하고 전화도 안 받고 있다고 우울하다는 친구의 연락이 왔을 때

 혹은 대학원 연구실에서 교수 눈치 보랴 선배들 눈치 보랴 가기 싫은 자리에 불려 다니느라 아주 파김치가 된 친구가 터덜터덜 저녁 약속에 나타났을 때

 그럴 때는 정말 현실에 잠시 스탑 버튼을 눌러줄 일탈이 필요하다. 일상에 새카맣게 눌어붙은 피로, 골머리를 앓게 하는 불안, 속을 타게 하는 긴장 따위를 잊게 해 줄 수 있는 맛의 세계로 데려가고 싶은 것이다. 특별하고 확실한 행복을 소환할 시간을, 선물하고 싶은 것이다.






내가 처음 스쿼시를 먹었던 날도 협력업체랑 갈등이 생겨서 공동 프로젝트가 엎어진 날이었다. "일하다 보면 이런 일도 종종 생겨. 괜찮아"라는 선배의 말도 위로가 되지 않았고 그저 앞날이 캄캄하기만 했다. 사과를 드리고 양해를 부탁드려야 할 사람들의 얼굴이 뭉게뭉게 떠올랐다.


한숨이 푹푹 나오던 퇴근길. 익숙한 맛을 찾아 들어간 친근한 식당에서 우연히 스쿼시를 만났다. 입맛이 없으니 간단히 먹고 어서 집에 가고 싶은 심산이었고 그동안 먹어본 적 없는 샐러드를 시켜봐야지 했던 것 같다. (애피타이저 메뉴에 샐러드 메뉴들과 나란히 적혀 있어서 샐러드 같은 건 줄 알았다)

 그러나 나는 애호박이 어떻게 이렇게 맛있는지 놀라느라 프로젝트 엎어진 이야기보다 도대체 이 맛을 어떻게 내는지 소스에는 어떤 재료가 들어가는지 오븐엔 몇 분을 구워야 하는지 궁금해하는 대화에 더 몰입하게 됐던 것 같다.

 그리고 집에 가는 길에는 '아끼는 사람들과 꼭 스쿼시를 먹으러 와야지' 하고 메모장에 적었다. 비건인데 아직 이 식당은 안 와봤다고 했던 동료가 떠올라서 메신저로 찍어놓은 스쿼시 사진을 보내고는 느낌표를 수십 개 쳐서 보냈던 기억도 난다. ‘같이 와야지. 와서 꼭 먹게 해 줘야지.’ 생각하면서.






그런데 사라졌다. 오늘(22.9.29) 오랜만에 모인 대학 동아리 친구들을 데려갔는데! 맛있을 거라고 호언장담을 했는데! 자신있게 메뉴판을 펼쳤는데! 메뉴판을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리 뒤져봐도 스쿼시란 세 글자를 찾을 수 없었다. 설마 하는 안타까운 마음에 직원에게 물으니 메뉴가 새롭게 개편되며 단종되었다고 했다. "이제 아예 안 나오는 거예요? 다른 계절에도요? 아예?"하고 물으니 한치의 망설임도 없는 "네"라는 간명한 답을 받았다.


 재료 수급에 문제가 있었을까. 요즘 식재료 물가가 워낙 올라서 수지 타산이 맞지 않는 걸까. 그동안 사람들이 스쿼시를 잘 안 시켜 먹은 걸까. 내가 더 자주 와서 먹을 걸 그랬나. 지인들한테 더 임팩트 있게 말할 걸 그랬나. 별 생각이 다 들면서 아쉬움이 증폭됐다. 친구들은 다른 메뉴도 충분히 맛있다며 모든 접시를 깨끗이 비웠지만 나의 허탈함은 비워지지 않고 자꾸만 차올랐다.

 집에 돌아오는 길엔 그간의 추억이 휘몰아치며 발걸음에 껌딱지처럼 덕지덕지 미련이 들러붙었다. 아직 못 데려온 사람이 있는데. 이렇게 사라질 줄 몰랐는데. 늘 있어줄 줄 알았는데. 역시 후회는 너무 늦다.






스쿼시와 작별할 날이 올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지만 인사를 몇자 적어 본다.

 돌이켜 보면 스쿼시는 내 기분이 바닥까지 추락한 날이나 친구들의 우울이 치솟는 날 찾아가곤 했다. 그만큼 나에겐 이 자랑스러운 메뉴가 그동안 비장의 무기가 되어주었던 것 같다. 삶의 굴곡을 지울 순 없겠지만 맛있다고 느끼고 맛있다고 말하며 다시 힘을 비축할 기운을 낼 수 있게 해주는, 조커 같은 카드. 그 방식이 누구도 해치지 않는 비건이라서 더 좋았고. 함께 했던 모든 친구들이 하나같이 맛있게 먹어서 뿌듯했던.


힘들고 지칠 때마다, 아끼는 사람을 위로하고 싶을 때마다 그리울 것 같은. 때마다 나의 몸도 정신도 온전히 '지금'에 머무를 수 있도록 도와준 스쿼시야, 많이 고마웠다. 안녕.








커버 사진 : 처음 먹었던 날 스쿼시의 사진입니다. 단종된 후 여태 마음이 허하지만 이렇게 글로라도 추억을 남기고 애도의 시간을 가져봅니다. 단골 손님들이 "스쿼시 없어졌어요?" "스쿼시가 사라졌네요. 맛있었는데" "스쿼시 이제 안 나오나요?" 같은 말을 많이 많이 해서 직원들의 기억 데이터에 사람들의 소망이 차곡차곡 쌓여서 혹시라도 다음 메뉴 개편 때 부활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랬으면 정말 좋겠다는 작은 바람을 품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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