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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git Nov 18. 2021

아욱국 배춧국

밭에 보물이 있다.

64년만에 10월 한파가 찾아왔다. 10월 중순에 최저기온 0도라니, 말도 안돼! 


이런게 기후위기의 징조일까? 며칠전까진 작년보다 훨씬 따뜻했는데, 갑자기 기온이 말도안되게 떨어졌다. 하루만에 기온이 15도이상 차이가 나는건 좀 반칙 아닌가? 반팔만 입어도 되고 조금만 움직이면 땀이나는 따뜻한 가을을 느끼다가 갑자기 초겨울 날씨라니, 나도 나지만 야생동물이나 식물들도 적잖이 놀랐을 것 같다. 옷을 따뜻하게 입고 갔지만 볼이 차가워지는 느낌이 예사롭지 않다. 조금 과장하면 볼에 살얼음이 생기는것 같은 느낌이었다. 0도에 거의 가까워진 최저기온이 밭작물의 잎들을 살짝 얼려버렸다. 늦게 씨를 뿌려 아직은 꼬마 사이즈인 무우잎들이 피해를 많이 입었다. 얇고 부들부들한 잎들이 낮은 기온에 살짝 얼었다가, 해가 나면 언것이 녹으면서 힘이 없이 없어지고 색도 허옇게 되어 버렸다. 밭에 계신 분들은 잎이 이렇게 된걸 보고 ‘삶아졌다’라는 표현을 쓰시던데 그 표현이 딱 맞는 표현이다. 이렇게 삶아진 잎들은 다 정리하고 생생한 잎들이 잘 살 수 있도록 해야한다.  무우잎처럼 추우면 힘을 잃는 식물이 있는가하면 이정도 날씨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튼실하게 자라는 식물도 있다. 배추와 파들, 그리고 부추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 날이 추워지니 여기저기 보이는 식물들도 붉게 단풍이 들고 있다. 


미나리도 날씨가 추워지니 잎끝이 붉어졌다. 고구마를 캐고난 자리의 흙을 정리하고 고랑과 가까운 곳에 자라고 있어  밟혀버린 미나리를 고구마 자리로 옮겨심었다. 미나리는 처음 경험해보는 식물이라 옮겨 심는게 쉽지 않았지만, 먹어보니 맛있고 신선한 미나리를 없던 셈 치는게 아까워서 낑낑대며 작업을 했다.

뿌리가 다치지 않게 호미와 모종삽으로 흙과 뿌리를 떠내어 정리한 밭쪽으로 옮겨 심었다. 약간 뉘여놓은 듯 뿌리와 가까운 줄기 부분까지 깊게 심었다. 땅속에 뿌리를 내리면 알아서 줄기를 들어올리겠지. 

예쁘게 심어지지 않고 멧돼지가 헤집어놓은 느낌으로 심어지긴 했지만, 내년 봄에 신선한 미나리를 먹을 생각을 하니 약간 기대가 된다. 미나리 뿌리가 활착이 잘 되도록 물조리에 물을 가득 담아와서 물을 주기로 했다. 그래도 해가 있으니 괜찮을거라고 생각하면서 응원의 마음을 담아 잘 커야 한다~ 이야기를 하면서 물을 넉넉히 주었다.


물조리와 도구들을 제자리에 정리하고나서 씨앗통을 가지고 와 부추 씨앗을 수확했다. 초가을에는 부추에 길쭉한 꽃대가 올라오고 하얀 꽃이 폭죽이 터지듯이 방사형으로 폈었다. 이제 꽃이 있던 자리는 모두 씨앗이 되었다. 하얀꽃이 있던 자리에는 베이지색 모시옷에 감싸진 까만 씨앗들이 예쁘게 자리잡고 있다. 꽃대를 잘라서 통에다가 넣는다. 꽃대를 자를때 까만 씨앗이 밭으로 떨어지기도 하는데 상관없다. 이 자리에서 또 싹을 틔우면 되는거니까. 부추는 한번 심어두면 계속 밑둥을 잘라 요리해먹을 수 있고 추운 겨울도 씩씩하게 이겨내는 멋쟁이다. 내 밭의 든든한 친구라는 느낌이 있어서 먹지않아도 항상 든든한 느낌이 든다. 

벌레들과 함께 먹는 나의 배추



밭 일을 하고나서 집에 가기전에는 항상 밭 여기저기에서 조금씩 저녁 식재료를 준비한다. 대파를 두줄기정도 자르고 - 원랜 뿌리까지 푹 뽑으려 했는데 호미질을 너무 많이 해서인지 손에 힘이 없다 - 아욱과 토종 배추잎을 몇개 땄다. 잎이 크고 잎자루가 도통하게 자란 녀석들 중심으로 솎는다. 우리 밭의 아욱은 잎이 크고 부드럽다. 잎자루도 튼실하지만 부드러운 느낌이라 손으로 잡고 톡 딸때 쾌감이 느껴진다. 아욱잎자루를 손으로 부드럽게 잡고 위로 툭 끊어올리면 된다. 아욱잎을 따다보면 아욱의 향기가 느껴진다. 아욱된장국을 먹을때 된장향 사이로 슬쩍 느껴지는 기분좋은 풀향이 난다. 

선녀님의 부채처럼 커다랗게 자란 토종배추잎도 몇개 자른다. 이 배추는 뿌리배추라고 한다는데, 뿌리가 커다랗게 자라 엄마아빠가 어릴적에는 겨울철 이 배추뿌리가 맛난 간식중 하나였다고 한다. 배추는 포기로 수확해야하는걸 알지만.. 이런날씨엔 배추와 아욱을 같이 넣어서 된장국을 끓이고 싶기 때문이다. 배추잎을 자를때는 잎의 아래쪽 하얀부분을 잡고 아래로 꺾으면 배추대에서 잎이 분리된다. 사각! 소리가 나면서 배추잎이 끊어진다. 배추잎의 향기는 아욱의 향기보다 몇배나 더 향긋하다. 

나비애벌레들이 열심히 갂아먹은 케일과 브로컬리 잎도 몇장 땄다. 여기저기 구멍은 났지만 아직은 먹을만 잎사귀들을 따고 잎 뒤에 숨어있던 벌레도 몇마리 잡았다. 



일을 대략 끝내고 나니 이제 노을 지는 하늘이 보인다. 큰 숨을 몇번 들이키니 가슴속으로 차가운 공기가 들어와서 온몸에 퍼진다. 텃밭에 왔다가면 마음은 한없이 가볍고 몸은 너덜너덜해진다.

농사도구들과 수확한 작물을 담은 가방을 메고 터덜터덜 집으로 간다. 

쌀을 씻어 냄비에 밥을 하고, 멸치 육수를 낸다. 수확한 작물들을 얼른 씻어서 한번 데쳐낸 후 된장국을 끓인다. 특별한 반찬이 없어도, 금새 지어 김이 모락모락 나는 향긋한 밥과 된장국이면 추위와 노동에 지친 몸이 스르륵 녹고 기분이 좋아진다.


오늘 하루도 꽉 채웠다. 껄껄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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