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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git Nov 23. 2021

밭에 가기 싫어!

머릿속의 무한 루프

곧 12월이다. 농사를 쉴 수 있는 계절이 온다는거다.

맘놓고 쉬려면 밭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일을 먼저 해두어야 한다. 하지만 밭을 깔끔하게 정리한다는게 말이 쉽지, 씨앗을 챙기고 자연적으로 자라난 작물들에 덩쿨들, 두꺼운 장대로 자란 줄기들을 정리한다는게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콩 줄기며 많은 작물을 수확했지만, 아직도 밭을 돌아다녀보면 수확하지 못한것들이 있다. 물론 이녀석들이 이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새 잎을 계속 내고 더 단단하고 맛나게 성장하고 있기때문이기도 하고. 

다음주부턴 진짜로 추워지니까 이젠 정말로 갈무리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씨앗들을 수확해야 하고, 아직 이사시키지 못한 허브들이 있는지 확인해야 하고, 초록으로 싱싱하게 자라고 서리에도 튼튼히 살아남은 녀석들도 모두 잘라서 식재료로 써야 한다. 밭에 괜히 남겨두었다가 얼어서 못먹게 되면 그거야 말로 서로에게 서운한 일이 될테니까. 앗 콜라비와 양배추도 수확하고 아욱도 수확해야 하는구나. 파도 좀 뽑아야 하고. 고수랑 시금치도 수확해야 한다. 아참 양파와 마늘에 왕겨도 더 두껍게 한번 더 덮어주어야 한다. 싹도 안난 감자들은 어쩌면 좋담? 밭을 생각하니 꼬리잡기하는것처럼 계속 할 일이 하나씩 하나씩 생각난다. 내 체력으로 이걸 다 할 수 있으려나? 걱정부터 된다. 


하지만.. 텃밭은 사방이 뚫려있어 더 추울거고 바람도 더 차갑게 느껴질것이다. 살짝 바람이 불면 볼에 닿는 겨울바람이 눈의 여왕의 입김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옷을 아무리 따뜻하게 입어도 날때부터 수족냉증을 장착한 내가 이미 공기가 차고 슬슬 바람이 불어 은근히 내 체온을 뺏어가는 텃밭에서 오랜시간 추위를 참는게 가능할까? 뭐, 손가락이 곱은채로 오들오들 떨면서도 일은 해내겠지만, 이 일들이 오늘 하루에 다 해낼 수 있는 일의 양일지 또 집으로 돌아와 따뜻한 아랫목에서 흐물흐물 목아버리면 어쩌지 라는 고민도 미리 해본다. 농사도 짓지만 돈 버는 일도 하는 사람이니 내가 할 일들을 나래비세우고 어쩌지 어쩌지? 하는 생각만 하고 있다. 뭐니뭐니해도 제1의 목표는 감기에 걸리지 않고 밭일을 끝내는 것이다. 


티브이를 켜두고 요가매트위에서 고관절을 풀어준단 명목으로 다리를 건들건들 거리며 누워 머릿속으로는 밭일 시뮬레이션을 한다. 밭일을 생각하면 할수록 할 일은 더 많이 생각나는데 할일 리스트에 비례해서 아, 가기 싫다!!는 마음은 더 커진다. 밭일을 생각할땐 단단한 마음으로 이거해야지! 저거해야지 결심을 하니 마음이 단단한 정육면체 모양이 되었다가 하기 싫단 마음으로 변한다. 하기싫은 마음은 빵반죽처럼 뭉글뭉글 되었다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다.  심을때는 즐거운데 마지막 정리는 왜이리 힘든걸까. 사실 가져오는게 끝이 아니니 그런거다. 가져와서 손질해서 저장하거나 요리를 해야하는데, 내 저질체력이 거기까지 하기에 쫌 모자라달까. 밭에 가는것이 귀찮은데다 오늘은 미세먼지가 최악수준인데다 습도까지 높으니 영 머리가 띵하고 몸이 축 가라 앉는것이 이상하다. 마음도 우울하다.  

매트위에 대자로 누운채로 발목을 와이퍼처럼 좌우로 흔들면서 내일도 미세먼지가 이렇게 심하면 어쩌나 걱정을 하다가 잠깐 눈을 감았는데 전화벨 소리에 눈을떠보니 벌써 네시간이 지나버렸다. 

낮잠을 밤잠처럼 자다니… 난 분명히 점심즈음부터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눈을 떠보니 저녁먹을 시간이 다 되었다. 침대위를 보니 치치가 포옥포옥 작은 소리로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져있다. 

내 일요일은 미세먼지속으로 사라졌다. 

잠을 자서 좋았는데 잠을 자서 아쉬운 일요일이다.



잠자는 치치얼굴. 언제봐도 사랑스럽다


하기로 한 일이 많았는데, 몇시간이 숭덩 없어져버렸으니 힘을 내고 싶은데 영 힘이 안난다. 아무래도 밥힘이 부족해 그런가 싶어 작은 무쇠솥을 꺼내고 냉동실에서 전복을 한마리 꺼낸다. 전복대란때 왕창 사다 손질해두고 마음이 우울한 날, 기력이 부족한 날 하나씩 삶거나 구워먹는 전복. 오늘이 딱 그런날이다. 전복을 꺼내면서 미리 손질해둔 나를 칭찬해본다. 오늘 컨디션으론 전복을 씻는것도 귀찮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진도 형님네 표고버섯을 물에 슬렁슬렁 씻고, 전복도 씻어둔다. 쌀을 전분기가 없도록 씻어서 1인용 무쇠솥에 담는다. 표고버섯과 전복을 함께 넣고 물을 부으며 생각한다.  혹시 밥이 모자라진 않겠지? 밥물이 끓어 넘치진 않겠지? 마른 표고를 밥에 넣을거라 물을 조금 더 하고 솥밥을 만든다. 

냉장고에 있는 물외 장아찌와 김치도 준비한다.

솥의 밥물이 끓어서 불을 중불로 낮추고 빨래감을 세탁기에 넣고 빨래를 돌린다. 싱크대 안의 그릇들도 설겆이를 한다. 치치와 뽀뽀는 밥대신 간식을 달라고 다리에 제 머리를 부비고 야옹 야옹 울며 눈을 맞춘다. 하지만 지금은 간식을 줄 시간이 아니다. 고양이들의 밥그릇을 뜨거운 물로 씻고 키친타올로 한번 닦아 사료를 조금씩 부어준다. 


이런 저런 일을 하고나니 밥이 맛있게 완성되었다.

전복을 작은 접시에 꺼내고 솥에는 들기름 한숟갈과 계란 노른자를 넣고 비볐다. 김을 꺼내서 밥을 먹기 시작한다. 밥이 모자랄까봐 걱정했는데, 먹다보니 숨이 찰 정도로 배가 부르다. 조금 모자라다 싶게 밥을 했어야 하는데, 항상 밥이 모자랄까 걱정하고 반국자 더 부으면 이 밥때문에 과식을 하게 된다. 

살까말까 할땐 사지말고 더 먹을까 말까할땐 참으랬는데, 나는 살까말까 할땐 사고 더먹을까말까 할땐 더 많이 먹는다. 밥을 먹을때마다 후회를 하지만, 솥에 붙은 누른밥을 긁어먹다보니 기분이 좋아진다. 누른밥의 마법인걸까. 먹기만 하면 신이난다. 


내 일요일은 이렇게 끝나간다. 

내일 밭에 가야하는데 오늘 기분으론 진짜로 밭에 가기 싫다. 내일도 미세먼지가 심하면 어쩌나 하고 있는데 장대비가 쏟아진다. 비가 오면 땅이 질척이려나, 아님 잎사귀들이 축축하려나? 이제 날씨가 추워지겠지? 얼른 갈무리를 해야겠지? 날이 추워져서 감기걸리면 어쩌지? 이번주엔 일이 많아서 아프면 안되는데. 

밥을 먹고 에너지가 나서인지 다시 머릿속 해야할일과 귀찮아!의 무한루프가 시작된다. 


아 내일 밭에 가기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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