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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git Nov 25. 2021

바람인형이 되고싶진 않아

볏짚을 구했다

오늘은 일찍 눈이 떠졌다. 밭에 가야 하는 날엔 항상 일찍 눈이 떠진다. 

오.. 밤늦게부터 비가 오더니 하늘이 맑다. 미세먼지가 확 줄었다는걸 다락방 천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의 느낌만으로도 알 수 있다.

어제 밭에 가기 싫어 하루종일 요가매트위에서 몸부림 쳤지만 그래도 해야하는 일을 해야한다는건 바뀌지 않는다. 아침 일찍 을밀님이 밭에 갈 준비를 하자고 톡을 해서 나도 준비를 시작한다. 날이 너무 추워졌단 예보를 들어서 옷을 엄청 껴입었다.  

내복에 터틀넥 스웨터를 입고 그위에 겨울 셔츠와 두꺼운 스웨터를 입었다. 두꺼운 농사멜빵바지에 두꺼운 후드티를 또 입었다. 여기에 패딩조끼를 입으면 오늘 농사용 일복 완성이다. 아참 니트양말을 신었다. 고무장화 속 발은 금새 차가워지니까. 이정도면 왠만한 추위는 참을 수 있겠지? 아직 영하는 아니니까. 가기전에 집의 창문을 모두 열어 환기를 한번 시키면서 외부 공기를 한번 경험해본다. 아..역시, 차갑다.


날이 추워서 오늘은 꿀물을 준비했다. 물을 뜨겁게 끓이고 꿀을 섞은 차를 보온병에 담는다. 도자기 컵도 여러개 챙긴다. 그런데 오늘은 집에 간식거리가 없다. 에너지 소모가 많은 날에 이렇게 먹을것이 없으면 곤란한데… 일단 집에 있는 생강사탕을 한주먹 도시락가방에 넣었다. 생강은 몸을 따뜻하게 해주고 당분은 없던 에너지도 생기게 해주니까!  지난주에 다친 왼손에 밴드를 다시 붙이고 라텍스 장갑 한벌과 그 위에낄 작업용 목장갑을 넉넉히 챙긴다. 어제 비가와서 밭이 어떤 상태일지 잘 모르겠지만, 춥고 축축해서 감기에 걸릴까봐 너무 걱정이 된다. 집을 뒤져보니 핫팩이 있어서 핫팩도 두개 넣었다. 등줄기가 서늘해지면 뒷목에 붙이고 추위를 이겨내야겠다.  도시락 가방과 가드닝 백, 장화를 챙겨들고 밭으로 간다. 


올해까지만 하는 파주밭에서 루꼴라와 갓, 상추와 배추같은것들을 수확했다. 이제 다 했다 생각했는데 아직도 이 밭에 초록으로 자라는 것들이 많아 아쉽고 미안해진다. 갓이 얼마나 깊이까지 뿌리를 내렸는지 뽑는데 애를 먹었다. 결국 제일 튼실하게 자란 녀석은 을밀님이 대신 뽑아주었다. 뿌리가 아주 깊고 줄기가 튼실해서 이녀석을 겨울내내 그냥 키우고 싶단 마음이 들 정도다. 새 밭에 가면 꼭 해봐야지.

잎 크기가 5센티 남짓 되는 상추들은 상추대를 잘랐다. 이제 더 추워지면 얼어버릴텐데 여리여리한 상추잎들이 꽤 많이 자라있다. 이 상추대를 자르는것으로 파주밭일을 마무리한다. 


올해로 이별해야하는 우리밭. 아쉽고 미안하다.


을밀님이 새 파주밭에 구절초를 심어두고 이동하자고 해서 새 파주밭에 갔다. 임시 텃밭에 구절초를 심는동안 나는 지난번에 가져다 심어둔 작물들이 잘 크고 있는지 확인한다. 비가 많이 온데다 이곳의 흙은 끈적이는 산흙이라 미끌미끌하다. 넘어지지 않게 조심조심 걸으며 임시텃밭에 옮겨심은 녀석들에게 인사를 한다. 비들비들해보이는 쪽파들과 머위, 아스파라거스 줄기가 죽은것 같진 않지만 그렇다고 막 잘 살아난것 같이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도 내년 봄이 되면 또 초록초록 건강하게 자라겠지? 내 실력은 못믿지만 이놈들의 생명력을 믿는다!


노루뫼로 가면서 윤임언니를 만났다. 밭으로 가는길에 볏짚을 좀 주워가자고 해서 거그뫼논에 들렀다. 역시 논길도 미끄럽긴 마찬가지다. 빨간 장화를 신고 논두렁을 걸어가면서 두번이나 미끌어질뻔 했지만 다행히 중심을 잘 잡아 엉덩방아를 찧지는 않았다. 윤임언니가 뒤에서 웃는 소리가 들렸다. 뒤에서 본 내 모습이 웃기긴 웃겼을것 같다. 엉덩방아를 찧지않고 목표지점까지 갈 수 있다면 몇번 더 미끄덩해도 상관없다! 

사실 볏짚을 주워오는 일정을 예상하진 못했었지만, 날이 추워지는 시점에 보온재를 구하는건 기쁜일이다. 커다란 마대자루와 큰 비닐봉투에 짚을 주워 담는다. 볏단으로 만들어둔건 사람들이 다 가져가고 남은것은 논 바닥에 남은 지푸라기뿐이다. 하지만 건강한 논에서 잘 큰 벼를 베어내고 난 지푸라기를 구하는것도 고마운 일이다. 장갑 낀 손을 갈퀴모양으로 만들어 논바닥을 살짝 긁는다. 손끝에 논바닥의 질감이 느껴지고 갈퀴모양을 한 손가락에는 지푸라기들이 걸려 한곳으로 모아 작은 덤불이 만들어진다. 지푸라기들이 없어진 논바닥에 벼이삭들이 남아있다. 이런 낱알을 먹으려고 기러기떼와 까치, 까마귀가 항상 논바닥에 앉아있는거구만! 우리 닭들을 여기 데려와서 산책도 시키고 알곡도 먹으라고 하고싶어진다. 손가락 끝이 점점 차가워지는게 느껴진다. 

몇년동안 건강한 볏짚을 제공해주던 거그뫼 논은 새로운 주인에게 땅이 팔려 올해까지만 논으로 쓸 수 있다. 어짜피 없어질 논이라 가능하면 많이 지푸라기를 가져가야 겠다 생각하지만 바람이 너무 많이 불어 춥고 힘들다. 옷을 많이 껴입었는데도 춥고, 내 농사용 밀짚모자는 바람에 벗겨지기까지 한다. 바람에 얼굴이 얼고 머리카락이 날리고 콧물이 흐른다. 아무리 코를 훌쩍여 마셔도 흐르는 콧물을 막을수가 없다.

후드를 둘러쓰고 끈을 당겨 외부로 노출되는 피부가 최대한 안보이도록 한다. 남색 성냥갑 머리와  초록패딩조끼, 빨간장화로 이곳저곳을 다니며 지푸라기를 모은다. 

커다란 마대자루가 바람때문에 펄럭여서 나도 휘청휘청한다. 미끄러지거나 바람에 밀려 넘어지지 않고 싶어서 나도 몸부림을 친다. 바람이 나를 밀어내면 나도 바람에 대항해서 바람을 밀어낸다. 이곳에서 새로 오픈한 가게 앞의 바람인형이 될 수 없다! 휘청이지 말고 단단하게 서있자는 마음뿐이다. 바람이 쎄게 불어 칼바람이 옷속으로 스며들면 나도 윤임언니도 으아아아아~~ 하고 소리를 지른다. 

이렇게 미치도록 바람이 부는날 지푸라기 덤불을 마대자루 속으로 집어넣는건 더 어렵다. 발을 벌려 선채로 한발로는 땅을 디디고 다른 한발로는 자루 입구를 밟는다. 한손으론 자루 입구 위쪽을 들고 바람을 이용해 입구가 커다란 고래가 입을 벌린것처럼 만든 후 얼른 짚덤불을 던져넣는다. 지푸라기들은 바람을 타고 마대자루 속으로 들어가기도 하지만 덤불가의 가느다란 지푸라기들은 바람을 타고 멀리 날아가버린다. 모아놓은 짚덤불의 40%는 다시 논바닥으로 날려보내는 바보같은 작업을 하지만, 그래도 마대자루 하나를 꽉 채우는걸 멈추지 않는다. 짚들을 넣으며 바닥에 떨어진 벼이삭을 볼때마다 밀레의 이삭줍기가 생각난다. 기계도 없이 낫으로 풀을 베었을테니 아마 떨어진 이삭도 꽤 있었을거다. 이걸 줏으려고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장갑도 없이 맨손으로 추운 날씨에 그걸 했겠지 하다가, 밀레는 밀 이삭 줍는 그림이었을테니 지금같은 추위는 아니겠구나 하고 정신을 차린다. 하지만 날이 적당한 계절에도 허리를 굽혀 이삭을 줍는게 어디 쉬웠을까.


가지고 갔던 마대들에 모두 짚을 담았다. 나와 윤임언니는 짚을 담고, 을밀님은 꽉 채운 마대를 차로 실어나르고, 노루뫼에 일부를 가져다 두는 작업을 했다. 혼자하면 더 오래걸리고 힘들었을 작업을 같이 하니 금새 끝내게 되는것이 신기하다. 

바람속에서 일할땐 힘이 막 나는것 같았는데, 을밀님 차를 타고 밭으로 가는길에 진이 쭉 빠져버렸다. 

이대로 노루뫼로 가서 배추를 뽑을 생각을 하니 한숨만 나오지만.. 나는 아직 에너지가 남아있다! 나는 씩씩하다!를 마음속으로 되뇌이며 노루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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