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보라 Sep 08. 2020

녹음 인형 : 가장 좋은 소리

그래, 세상에서 가장 좋은 건 원래 보이지 않는 거니까.

손을 잡는 것도 부끄러워 친구들 앞에서는 등 뒤로 손을 숨길 만큼 우리의 사랑이 참을 수 없게 부끄럽던 그 시절. 키가 많이 클 거라며 통이 큰 교복을 입고 교과서를 들고 다니느라 축 늘어진 가방을 멘 채로 둑을 걸어 학교에 가던 그 시절에 나와 그 애가 있었다. 


 나는 맑은 날 운동장에서 하얀 태권도 도복을 입고 이단 앞차기를 하던 그 애에게 반했고, 그 애는 중학교로 올라가는 배치 고사 시험날 창가에서 햇빛을 받으며 문제를 푸는 내 모습을 보고 반했다고 했다. 


서로에게 반했다는 그 날 날씨가 흐렸다면, 

어쩌면 우린 서로에게 처음일 수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아직도 기억하는 그 애의 인사법은 복도를 빠른 잰걸음으로 걸어가며 들고 있는 우산을 위로 쭉 뻗었다가 내려놓는 정도의 약식 인사였다. 나와 눈을 마주치거나 ‘안녕’이라는 말을 건네는 것조차 버거워 고작 반이 2개뿐인 작은 학교에 다니면서도 얼굴 한 번을 마주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그 애는 내 남자친구고, 또 나는 그 애의 여자친구인데 어찌 된 일인지 그 학교에서 우리 둘이 가장 안 친한 사이가 된 것 같았다. 사귀기 전까지는 매일 등굣길에 누가 키가 더 큰지 서로의 등을 대보기도 하고 티격태격하며 어깨를 부딪치기도 했던 것 같은데.  

그 날은 아마도 우리가 사귀고 처음 맞이하는 기념일인 내 생일이었을 것이다. 공기는 차가웠지만 햇볕은 따뜻했던 그 날, 방과 후에 남아 선생님과 해야 할 일이 있어 남아있는 나를 기다리기 위해 그 애와 내 친구들은 빈 교실에 모여 있었다. (당시 우리의 ‘연애’는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 주목받을 만한 일이었고 수줍음 많은 우리를 위해 서로의 메신저가 되어주던 몇몇 친구들이 있었다) 


잠깐 나온 나를 부르는 친구들의 손짓에 그 애가 앉아있다는 빈 교실을 보았을 때, 내 눈에 비친 건 혼자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그 애였고, 그 애는 책상에 앉아 곰 인형을 들고 무언가를 녹음하고 있었다. 아마도 내 생일을 축하한다는 메시지였을 것이다. 그 애는 그렇게 내가 선생님과 있는 시간 내내 ‘보라야 생일 축하해’로 시작하는 짧은 메시지를 곰 인형에 녹음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쉬운 일일지 모르겠지만 그 애에게는 고해성사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고 한다. 10초도 되지 않는 메시지를 위해 1시간이 넘도록 발을 동동거리고 있는 그 애를 보며 나는 그 날이 15년 전 내가 태어났다던 생일인 게 참 좋았다. 


그러고도 그 애는 집 앞에 도착할 때까지도 선물을 준비한 걸 숨겼고 내 앞에 서서 몇 번을 망설이다가 두 눈을 질끈 감고 검은색 가방에서 빨간 하트가 가슴에 새겨진 곰 인형을 꺼냈다. 그리곤 내게 안겨주며 딱 1초짜리 포옹을 하고는 후다닥 자리를 떴다. 메시지가 녹음되어있다는 이야기도 하지 않았고 소리를 내어 생일 축하한다고 내게 말하지도 않은 채 그렇게 말이다. 대체 무엇이 태권도 검은 띠던 그 아이의 모든 담력을 앗아간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얼떨떨하게 남겨진 나는 이미 이 곰 인형에 그 애의 목소리가 녹음되어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짜식’하며 심호흡을 하고 곰 인형의 손을 눌렀다. 떨리지만 진심 어린 그 애의 목소리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이게 왠 걸? 곰 인형이 ‘칙-‘하는 소리 이외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몇 번을 더 눌러 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아마 가방을 움직거리다 녹음 버튼이 잘못 눌린 모양이었다. 


칙-. 

칙-. 

칙-. 


나는 조금 허탈했지만 그러고도 몇 번을 더 꾹꾹 눌러보았다. 그리곤 그 ‘칙-‘소리를 ‘보라야 생일 축하해. 그리고 많이 좋아해’로 알아듣기로 했다. 분명 내가 아는 그 애는 딱 그만큼의 표현을 담아두었을 테니, 똑똑한 내가 알아서 알아듣지 뭐.  


그 후로도 나는 그 곰 인형에 다른 말을 녹음해두지 않았다. 대신 정해진 의미가 없는 그 ‘칙’소리를 그 애가 하고 싶은 말로 알아듣곤 했다. 그 애가 내게 잘못을 한 날은 ‘많이 미안해’로 그 애를 마주치지 못한 날에는 ‘보고 싶어’로 말이다.  



그래, 세상에서 가장 좋은 건 원래 보이지 않는 거니까. 

그래야 내 맘대로 더 좋은 걸 상상할 수 있으니까. 

이전 08화 나의 사전에는 당신의 이름이 붙은 단어들이 많아졌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