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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보라 Sep 08. 2020

어른스러운 사람

상처받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상처를 티 내지 않는 사람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퍼붓던 장마도 언제나 그랬듯이 끝났다. 꿉꿉한 마음에 어서 선선한 바람이 불기를 바라는 늦여름마냥, 밖은 겨울이었지만 마음의 계절은 그랬다.


 이번에도 언제나 그렇듯이 단호하게 이별을 맞이했지만 왠지 마음이 명쾌하지는 않았다.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은 명확했지만 대체 우리가 왜 헤어지는지에 대한 답이 여전히 의뭉스러웠기 때문이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내가 너무 어른스러운 탓에 그가 공연히 부렸던 심술이 화근이었다. 맘에도 없는 행동들이 맘 같지 않은 결과를 만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시 헤어짐을 무를 것도 아니었다. 내 입 밖으로 헤어짐이 나온 순간 단 한 번도 그 결과를 뒤집어본 적이 없는 나였으니까. 필연적으로 맞이하는 모든 이별 앞에 이토록 단호해지는 것은 그만큼 고민이 길었다는 것과 함께 내가 어른스러운 사람임을 마지막까지 증명해 보이는 과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20살의 남자를 만날 때처럼 30살의 남자를 만날 때에도 나는 상대방보다 항상 더 어른스러운 사람이었다. 상대가 연하일 때도, 연상일 때도 그랬다. 젖살이 빠지고 나잇살이 늘고, 생일을 요란하게 보내지 않 고 건강이 최고라는 걸 몸소 느끼며 앞자리가 바뀌는 동안 내 마음의 세월은 대체 몇 년이나 흘러간 것일까.


 모두 나이 먹는 걸 달가워하지 않지만 어른스럽다는 말은 곧잘 칭찬으로 받아들인다. 얼굴은 어려 보이고, 마음은 어른스러워 보이는 것. 그렇게 몸의 나이와 마음의 나이가 반대로 흘러가는 것이 흔한 이들의 욕망이다. 하지만 나는 그와 반대로 빨리 늙고 싶었다. 일찍이 사회생활을 시작해 어린 나이와 그보다 더 어려 보이는 얼굴 때문에 평가 절하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어리니까’ 용서되는 일은 드물었지만 ‘어려서’ 주어지는 페널티는 수없이 많았다. (어쩌면 내가 어린 여자이기 때문에 겪은 불이익일지도 모르겠다) 연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어른스러운 사람이어서 이해하지 못할 것 같은 일을 이해하고, 화낼 법한 일을 눈감아주고, 상대의 허물을 탓하지 않으며, 끝내 도래한 이별에 초연한 사람이 되었다.


 슬퍼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슬픔을 삭히는 사람, 상처받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상처를 티 내지 않는 사람. 그래서 마음 곳곳에 딱지가 앉아버린 사람. 그게 사랑앞에 어른스러운 사람의 모습이다.


 나는 결단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나도 어리광부리고, 기대고, 위로받고 싶었다. 어쩌면 솔직한 사람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생각보다 연약하고 어른스럽지 못한 사람이라는 걸 누군가는 알아주었음 했으니까. 한 번쯤 육신의 나이야 어쨌든 나보다 어른스러운 사람을 만난다면 나는 꼭 사소한 일에 투정을 부리고, 이해해달라고 자주 보챌 것이다. 서운함을 혼자 삭히지 않고 날 것 그대로 드러내며 나를 달래 달라고, 그 사람 앞에서만큼은 마음껏 어린아이가 되어 심술을 부릴 것이다. 가지고 싶은 것을 사달라고 조르고, 보고싶은 날이면 그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떼를 쓸 것이다. 슬픔을 삭히지 않고 상처를 티 내며 필요 이상으로 단단해져 버린 마음이 맘껏 속상했으면 싶다.  



 해가 바뀌고 법적으로 보나 사회 지위로 보나 어른이 되었는데도 나는 여전히 ‘어른스러운’ 사람이다. 어른이 아니라 어른스러운 사람. 나는 왠지 40대가 되어도, 50대가 되어도 사랑했던 사람에게 ‘넌 참 어른스러운 사람이야’라는 말을 들을 것 같다. 


어른스러운 사람이라는 말은 꼭 내가 아직 어른이 아니라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럼 나는 언제쯤 마음의 나이와 몸의 나이가 들어맞게 될까? 혹시 그때가 되면 나는 어른스러운 사람이 아니라 진짜 어른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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