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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호 Oct 25. 2019

첫사랑 썰 풀어보겠습니다

LO V E_ 다 한 번씩 해보셨잖아유, 그렇쥬?

사랑이야기는 흔하지만 때를 기다리고 말의 모양을 잘 다듬어서 해야 한다. 물론 '모든 게 다 사랑 때문'이라는 철 지난 드라마 OST 가사에 공감하고 있고, 한민족 5000년 역사를 아우르는 남의 사랑 이야기를 듣는 일을 좋아한다. 학교 다닐 때 문학시간에는 고려속요에 드러나는 절절한 러브 감성 때문에도 가슴 아파했었다. 시조에서 촛불이 우는데 왜 내가 따라 우는지 모르겠기도 했다.


그러나 '사랑 이야기를 하려면 잘 다듬어서 해야 한다'고 운을 띄우는 이유는 자칫하면 신파조로 흐를 수 있기 때문이다. 신파조라는 말은 '네 일기에나 쓸 얘기', '넋두리' 혹은 '술자리 안주'는 말로 대체 가능하다. 아무튼 이 계절이 좀 더 지나서 쓸쓸하다 못해 썰렁해지면 이야기 꺼내기가 낯부끄러워질 거 같으니 백하게 한 번 풀어보기로 한다. 


그간 내 글을 읽으면서 작가의 성격을 대략 짐작을 하신 분은 알 수도 있겠지만 성격상 연애는 0에 수렴하고 나머지  확률로 짝사랑에 그친 삶을 살았. 짝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하신  C교수님 말씀이 있었지만, 그건 '수업 때 짝사랑 썰을 엄청 푸셨지만 그분이 현재 사모님이 아니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라 생각하기로 한다.


요즘에야 감성도 메말라서 그럴 일이 적고 혹여 그럴 기미가 보이면 사정이 악화되기 전에 스탑을 누르기도 하지만 한창 예민할 때는 그러지도 못했다. 말도 많고 탈도 많 그 설렘들. 초딩이 대학교 방학만 주야장천 기다려보기도 하고, 2학년 언니들 교무실에 갔다가 낙타색 코트를 입은 덕샘에게 홀랑 빠지기도 하고. 3학년 때 덕샘이 우리 반을 안 가르치신대서 새로 우리 수업을 맡은 선생님께 가서 엉엉 울기도 했다.(그 선생님은 내가 본인을 무서워해서 그런 줄 아신다 & 그래서 내가 모교로 교육실습을 못 나간다.)


평소 글답지 않게 가볍게 시작했지만 내 사랑의 감정에는 설렘이라는 순수한 감정보다 감추고 싶고, 부끄러운 감정과 심지어는 죄책감이 더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본래 가르침을 받은 바가 있으면 200% 진지하게 듣기 때문에 보수적인 편이고 초자아 목소리의 지배를 많이 받는다. 지금은 누구도 믿지 않지만 모태신앙이었어서 그런 쪽으로 더 닫혀있었고, 딸의 감정표현에 살갑게 응해주지 않았던 어머니의 영향도 컸다.


순수하게 마음 아파하고 설레 하기도 바빠야 했는데 부끄러움과 죄스러움을 먼저 배운 탓에 어디서 '그 놈들' 이름이 나오면 얼마나 가슴 조려 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짝사랑의 종말을 고하는 신호는 '어디서 '그 놈들'의 이름을 보거나 듣게 되더라도 아무렇지 않아 지는 것'이 되었다.


'그놈' 이름의 앞자리만 들어도 귀 언저리가 붉어지는데 왜 하필 연예인이랑 이름이 같은 건지, 왜 하필 그해에 그 연예인이 드라마를 찍고 스타덤에 올랐는지. 이름이 다소 아재스럽던 그 사람의 이름은 왜 자꾸만 동네 카센터나 옆동네 철물점에 등장했는지. TV를 편히 못 보고 동네에서 고개를 못 들고 다닌 일이 있었다. 최근 것을 잠깐 풀자면 계절이 무르익어 갈 때쯤이면 곳곳에서 그놈 이름이 보일 것도 같은데, '이번 건 가볍게 지나갔으니 패스'


첫사랑 썰을 풀겠다고 선언을 했으니 좀 더 머리를 굴려 가장 처음 기억을 돌이켜본다. 내가 어렸을 적에는 TV에서 '경찰청 사람들'과 '119 구급대' 프로그램을 방영해 주었다. '경찰청 사람들'은 좀 무서워서 보지 않았는데 '119 구급대'는 자주 봤다. 2층 집에 세 들어 살 때니까 많아야 5-6살이었겠지만 주황색 옷을 입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소방관님들 모습이 정말 멋있었다. 그런 나를 귀엽게 보셨는지 엄마가 어느 날(이때까진 살가우셨음) 전철역 옆 소방서를 가리키며  "OO이 소방관 아저씨들 좋아하잖아. 아저씨들한테 주스 사들고 인사 갈까?"라고 하셨다. 뼈속까지 차오르는 쑥쓰러움에 엄마 다리에 얼굴을 엄청 비비며 제발 가지 말자고 한 기억이 나는데 넓은 범주에서 '사랑'에 속한다면 속한다고 하겠다.


달달한 이야기를 기대하고 오셨다면 죄송한 말씀을 전하며 썰을 하나 더 풀어서 독자님들의 섭섭함을 달래드리려한다. 초등학생 때는 혁준이네 집에 가서 종이접기를 하다가 그 아이가 좋아질 뻔 하기도했었다. 그 녀석이 먼저 좋다고 쫓아다녔고 나는 뭐가 뭔지도 몰랐는데 그 아이 집에 놀러가서 머리를 맞대고 종이를 접다보니 살짝 간지러운 마음이 들었다. '종이 물소'가 완성되기 전에 나를 찾는 엄마 전화가 와서 흥이 깨져버렸지만 평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내가 전학을 가고 나서 혁준이와 통화를 하던 엄마로부터 '아직도 양갈래 머리를 묶고 다니냐, 그런데 어쩌지? 새로 좋아하게 된 아이가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을 때 약간의 섭섭함을 느꼈다.


제목에는 퍽이나 대단한 이야기를 쓸 것처럼 하고 별 볼 일 없는 에피소드만 늘어놓아 부끄럽다. 그저 웃을 수 있는 포인트가 있으면 웃고 넘어가시면 좋겠고, 잠시 비슷한 추억을 떠올려보실 수 있는 기회가 되셨다면 더더욱 감사할 것 같다. 다만 용기를 좀 내보고 싶었다. 새벽에 쓰고 있지만 기획한 이야기이니 새벽감성은 아니다.


마음 깊이 힘들어하던 일은 입으로 말을 하고 글로 쓸 수 있을 때에야 아무렇지 않은 것들이 된다. 가벼운 문체로 썼지만 이 이야기를 쓰기까지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 나에게 있어 사랑이란 설렘보다 죄책감이 크게 느껴지는 '기울어진 마음'이었고 그 때문에 더 힘들었지만 이렇게 글로 쓸 수 있을 지경까지 온 것이 감사하다. 악몽을 꿀 때마다 느끼는 답답증도 조금은 옅어지겠지. 다만 '역시 필명을 설정하고 브런치를 시작했어야 했나.' 하는 두려움은 지금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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