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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호 Nov 10. 2019

펭수의 등장이 반가운 이유

나는 아직 인형을 가지고 논다

곰이 두 마리, 호랑이와 강아지 각각 한 마리, 설치류 두 마리. 곰, 호랑이, 강아지라고 했으면서 설치류라고 뭉뚱그려 말하면 미안해지니 종을 밝히자면 두더지와 전기 쥐이다. 그렇다. 나는 아직 인형을 가지고 논다. 나이에 안 맞게 인형을 가지고 놀고 있으므로 내 침대 인형들은 위험에 처해있다. 언제 어머니 손에 잡혀 비닐 속에 우르르 욱여 들어가 버려질지도 모르므로. (동물보호를 위해 어서 독립을 해야겠다.)


그럼 좀 어때. 그럴 수도 있지.

침대 위에서 동물이 서식하는 것을 두고 클레임이 들어오면 '아니 그냥 잘 때 푹신한 게 있으면 잠이 잘 와서 그래.'라고 건조하게 대답하지만 사실 솜 덩어리 그 이상이다. 동물들은 저마다 이름도 있고 성격도 다르고 사연도 있다. 그들과 가끔 이야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나는 늘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것 같은데 들어주는 사람이 잘 없었다. 태어나기를 여리게 태어났고 감수성도 깊었는데 그걸 적절히 나눌 기회가 없었다고 할까. 그래서 인형들을 가지고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들고 내 얘기도 하고 그랬다.


브런치에는 힘들었던 일을 쓰기도 하지만 예전에 비해 나를 많이 긍정하게 되면서 아직도 인형을 가지고 노는 내 모습도 받아들이게 되었다. 친한 사람에게는 나의 동물들 이야기를 오픈하기도 한다. '유치원 애들이랑 하루 종일도 놀 수 있어.'라고 농담을 곁들여 동물 이야기를 해주면 '아예 웹툰으로 만들어 연재를 해보라'거나 자신의 최애 인형을 슬그머니 보여주기도 한다. (전주에 불도그 한 마리, 판교에 시바견 한 마리가 있다.) 언젠가 한 번은 작정하고 미쳐보기로 하고 30센티 푸 인형을 쇼핑백에 넣고 영화관에 가 푸를 끌어안고 푸 영화를 보기도 했다.


감춰야 할 취미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펼쳐놓고 나니 홀가분해졌다. 열심히 먹고 자고,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읽고 쓰고 있는데 까짓 껏 인형도 좀 열심히 좋아할 수 있지. 꼭 나이에 맞게 행동해야 하고 나이에 맞게 말해야 하고 진짜 내 모습은 버려두고 살 필요가 있을까.


펭수를 프사로 걸 수 있다니 좋은 세상이다.

요즘 EBS자이언트 펭귄 펭수가 유행이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만든 캐릭터가 2030 세대에게 인기를 얻는 현상을 두고 여러 분석들이 나온다. 포털 사이트에서 '펭수'라고 치면 펭수를 덕질하는 이들의 블로그가 줄줄이 검색되기도 한다. 현상을 바라보고 원인을 따지고 현재를 진단하는 글은 많으니 그런 일은 그들에게 맡겨두고 내 이야기만 해보자면, 나는 펭수를 좋아한다고 공공연하게 말할 수 있는 현 상황이 반갑다. 펭수의 유튜브를 보면서 즐거워하고 덕질을 하고 모바일 메신저 프로필 사진에 걸고 하는 일들이 보기 좋다.


'이 시기에는/이럴 때는 마땅히 어떠어떠해야 해.'라는 말에 반기를 드는 새로운 '말'들이 속속들이 등장하는 일 격려하고 싶다. 집단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회의 암묵적 당위 앞에서 개인의 목소리를 내고 작은 목소리들을 지지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 같아 기쁘다. 펭수를 덕질하는 이들도 그런 개인들의 목소리라고 생각한다. '어른은 어른다워야 한다'는 목소리 앞에서 펭밍아웃을 할 수 있는 시대. 펭수가 인기를 얻는 이유 중 하나가 '하고 싶지만 차마 하지 못한 말'들을 거침없이 해주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주류 권력에 대응하는 '을'들의 목소리가 콘텐츠화되는 일도 환영할 만다.


출퇴근 길에 지하철을 타보면 웃는 상을 하고 있는 사람 보기가 힘들다. 영상 시청을 하느라 빙그레 웃고 있는 사람을 보면 이질감이 들 정도이다. 서점에서 한 때 '곰돌이 푸,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 시리즈가 인기를 얻었다. 그 외에도 정신적 상처를 입은 이들을 위한 심리 관련 책이 한 코너를 차지하고 있다. 브런치에서는 퇴사 성공 글이 인기를 끈다. 감히 누군가의 아픔을 재단하고 싶진 않지만 그들의 아픔에 펭수가 작은 위로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기왕이면 펭수가 오래 인기를 끌었으면 좋겠고 제2, 제3의 펭수가 나타났으면 좋겠다. '어떠 어떠해야 한다'는 명제에 맞서 "저는 이렇습니다." "저는 이것을 좋아합니다." 하는 목소리가 점점 늘어나고 받아들여지는 사회를 꿈꾼다. 더불어 내 방 동물들도 눈치 좀 안 보고 살 수 있었으면......

푸가 한 마리 있는데 꿀 값이 좀 많이 들긴 하지만 자기가 먹을 꿀은 자기가 채집을 해오기 때문에 키울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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