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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호 Nov 11. 2019

나오지 못한 말들에 관하여

밝게 인사 잘하는 사람들이 부럽다

학교 연구실에서 나올 때는 뒤도 안 돌아보고 빠르게 사라진다. 그리고 웬만해선 다시 들어가지 않는다. 일이 하기 싫어서 그런 건 아니다. 우스운 말이지만 혹여 내 험담을 듣게 될까 봐 지레 겁이 나서 그런 행동을 하게 된다. 연구실 분들이 누구 욕을 하는 분들이냐 하면 절대 그렇지는 않다. 세상 다정한 분들이시다. 그저 겁부터 먹고 있는 내 작은 마음일 뿐.


어릴 적부터 유독 말수가 적은 아이였다. 말수가 적을 뿐 아니라 숫기도 없어서 어딜 가면 그림처럼 앉아있다 오는 아이였다. 그랬으므로 어디 가서 인사를 해야 할 때가 되면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었다. "안녕하세요"라는 다섯 음절짜리 말은 목구멍에 막혀 나오지 않았다.


아주 어렸을 때는 그냥 꾸벅- 고개만 잘 숙이고 나오면 다행일 정도였다. 크면서 사회화가 좀 되고부터는 작은 소리 '안녕하세요'라고 겨우 내뱉을 수 있게 되었다. 밝고 활기차게 '안녕하세요!!'라고 하지 못한 일이 멋쩍어 대신 활짝 웃는다. 어린애에서 어른이 되기까지 목소리는 키우지 못하고 고작 활짝 웃는 '꼼수'만 배웠으니 배움이 많이 느린 편이다.


내 나름대로 대범해지려 노력한 탓에 작은 소리긴 해도 '안녕하세요'를 끝까지 내뱉고 활짝 웃는 데까지 이르렀지만 급작스런 상황에선 발동이 되지 않는다. 그냥 꾸벅하고 지나거나 꾸벅하려다 말거나 나한테도 들릴락 말락 하게 '안녕하세요'라고 한 뒤 상대가 못 듣고 지나치면 끝없는 머쓱함을 느낀다. 자기가 작게 말했으면서 머쓱해할 건 또 무엇인지 싶지만 머쓱해서 승모근이 굳는다.


어디 가나 밝게 인사를 잘해야 한다는 의식은 있는데 말이 막혀 나오지 않는다. 상황이 이 정도이므로 어디서 '누가 저 사람은 참 인사도 안 하네.' 라거나 '쟤는 인사하는 걸 본 적이 없어.'라는 소리를 들을까 봐 지레 혼자 겁을 먹는다. 어릴 적부터 귀에 인이 박히도록 '너 그렇게 하면 어디 가서 욕먹어. 사회생활 못해'라는 말을 들어서일까.


밝은 목소리로 '안녕하세요.'라고 하고 웃으면서 주변의 분위기까지 밝게 바꾸는 사람이 부럽다. 어머니는 고지용 씨의 아들 승재를 참 좋아하는데 "승재가 싹싹하게 인사를 참 잘한다"며 칭찬을 늘어놓을 때마다 '너는 어디 가서 인사도 못하니 마음에 안 든다.'는 말이 함축된 거 같아 뒤통수가 따갑다. 다행히 승재는 요즘 TV에 나오지 않아 뒤통수가 따끔거릴 일은 줄어들었지만 사무실을 나올 때의 머쓱함을 덜어내기엔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좋아하는 시인의 시가 생각난다. 별다른 감상을 곁들일 것도 없이 첫 연의 말이 좋아서 떠올랐다. 그냥 내 얘기구나. 언젠가 햇볕을 받으면 내 목구멍도 녹지 않을까. 내 말에도 물 오를 날이 오지 않을까. 내 말도 네게로 흐를 수 있을까.


더불어, 여러분이 만나는 누군가가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여 속내를 모르겠다면 혹시 이 작가의 마음과 같았던 것은 아닐까. 마음은 넘치나 몸이 따르지 않는 것은 아닐까. 한 번쯤은 너그러이 봐주시길 바라면서 이 글을 쓴다.

 


네 말이 내게로 흐르지 못한 지 오래 되었다


말은

입에서 나오는 순간 공중에서 얼어붙는다

허공에 닿자 굳어버리는 거미줄처럼


침묵의 소리만이 무성할 뿐

말의 얼음조각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이따금 봄이 찾아와

새로 햇빛을 받은 말들이

따뜻한 물 속에 녹기 시작한 말들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아지랑이처럼

물 오른 말이 다른 말을 부르고 있다


부디,

이 소란스러움을 용서하시라


                                   나희덕, '이따금 봄이 찾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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