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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호 Nov 16. 2019

대파 예찬론

대파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처음 계란국을 끓이던 날을 기억한다. 그동안 마가 하는 모습을 봐온 대로 치육수에 계란을 풀고 간을 했는데 생각한 맛이 나지 않았다. '이 밍밍하고 비릿한 걸 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먹기는 싫고 어쩌면 좋나.' 생각을 하다가 썰어 둔 파를 넣었다. '세상에!!'파가 들어가자 계란국은 훌륭한 맛을 냈다. 자기가 만든 요리라 그런지 몰라도 엄마의 국보다 맛있었다.


떡볶이를 할 때도 마찬가지고 오늘처럼 된장국을 끓일 때도 마찬가지다. 90% 완성될 때까지 제맛을 못 내던 음식들이 파가 들어가면 자기 맛을 찾는다. 개인 취향이지만 떡볶이에는 특히 파를 많이 넣는 편이다. 파 특유의 달짝지근한 맛이 양념과 어우러져 국물만 먹어도 맛있는 떡볶이가 된다. 국물이 잔뜩 묻은 대파를 쿡 눌러서 나오는 진액을 먹어도 맛있다.


어느 집단에 가든 누구를 만나든 파처럼 잘 어우러지고 그들 고유의 매력을 충분히 발산하도록 돕는 사람이 되고 싶다. 욕심을 좀 더 보태서 계란국 속의 파처럼 내가 없으면 한 번쯤 나를 찾게 되는 그런 사람이 되고도 싶다. 아닌 척 살아오긴 했지만 사람을 꽤나 좋아하고 관심을 갈구하기도 하는 성격이다.  또한  과하진 않지만 자연스러운 감칠맛을 내는, 소소하게 달달한 사람이면 좋겠다.


계란국을 내 손으로 끓여보기 전까지, 더 자라서 어른 입맛이 되기 전까지 파는 먹기 싫어서 골라내는 재료였다. 그런데 또 어디든 들어가 있어서 파를 빼내는 일은 여간 성가신 것이 아니었다. 어디에서나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점에서 파한테 또 한 번 배운다. 까다로운 젓가락질에 걸려 나와 싱크대 수챗구멍에 놓일지언정 한 번도 자신의 임무를 소홀하지 않는 파. 이쯤 되면 '파님'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파는 조연을 넘어 주연이 될 수도 있는 재료이다. 친하게 지내던 중국인 언니는 시장에서 파를 사 오면 흙만 털어내고 머리부터 씹어먹었다. 우리나라에선 아직 일반적이지는 않으나 파 혼자 있어도 충분히 제 역할을 해낸다. 육개장에서 파는 조연 그 이상 준연급 혹은 서브남주 정도는 되는 것 같다. 쫑쫑 썰어 넣기만 하던 파가 육개장에선 숭덩숭덩 들어간다. 파채 요리는 훌륭한 반찬이 되고 요즘은 파가 주재료인 대파국 레시피도 공유가 된다. 파는 통째로 구워 먹어도 맛이 좋다고 한다.   

 

저녁으로 먹을 국을 끓이다 파는 이래서 좋고, 저래서 좋고 파가 좋은 여러 이유들을 찾았다. 새로 사 온 대파를 다듬어 놓고 보면 빛깔도 참 곱다. 짙은 초록부터 흰색까지 이어지는 그러데이션이 하나의 미술작품 같다. 적어놓고 보니 파 같은 사람이 되는 일은 쉽지 않은 것 같다. 조연으로도 훌륭하고 주연으로도 제 기량을 뽐내는 사람이 되기가 쉬울까. 그저 노력할 뿐이다. 다이어트를 하지 않는다면 최소 한 번은 식탁에서 파를 만날 텐데, 파를 만날 때마다 "파님, 오늘도 한 수 배워갑니다." 하고 마음을 다잡을 수밖에.



더불어 밍밍한 계란국 같은 내 글에 대파 역할을 해주는 브런치 이웃님들이 계셔서 참 감사하다. 라이킷도 눌러주시고 댓글도 남겨주시고 보잘것없는 글이 그렇게 맛있는 국이 된다. 가끔은 내 글보다 댓글이 더 훌륭하기도 하다.

+어제 올린 글을 모바일에서 올리고 컴퓨터로 확인을 못했습니다. 모니터로 보니 삐뚤삐뚤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쓰러지기 직전인 글인데도 라이킷을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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