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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호 Nov 27. 2019

참기름 간장밥과 계란찜

온전한 모양의 계란찜을 먹고 싶어

나는 태어날 때부터 밥을 잘 먹는 아이였다. 배가 땡땡해질 때까지 우유를 먹었다. 아기 때인데 배가 땡땡해질 때까지 우유를 먹었는지 어찌 아냐고? 아기 때 찍은 사진을 보면 배가 땡땡한 아기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웃고 있다. 그게 나다. 옛날 사진에는 왜 사진을 찍은 날짜가 박혀있는 건지, 내가 아닌 척 도망가려 해도 날짜를 보면 빼도 박도 못하게 나다. 그 해 우리 집의 아기는 나밖에 없다.


반면에 내 동생은 밥을 오지게도 안 먹는 아이였다. 엄마는 밥숟가락을 들고 따라다니며 밥을 먹였다. 밥 한 숟갈 먹고 놀러 가고를 반복해서 엄마는 '제발 한 숟갈만 더 먹자'라고 사정을 했다. 내키지 않아 하는데 밥을 먹이면 먹기 싫어서 숟가락을 이로 물었다. 세간 살이 걱정할 나이도 아니었는데 어린 나는 동생의 이자국 때문에 새 수저에 흠집이 날까 봐 못마땅했다. 얼마 전까지 찬장에 있던 수저세트는 반짝거렸고 보물 같았다. 나는 백화점 4층 리빙 코너를 좋아하는 어린이였다.


둘이 좀 섞여서 태어났으면 좋았을 텐데 극과 극을 달려서 밥상 앞에서 나는 조금 소외된 기분을 느꼈다. 워낙 잘 먹으니 내 앞으로 반찬을 많이 밀어주시기도 했지만 내 몫이 아닌 음식이 있었다. 참기름 간장밥과 계란찜. 밥을 잘 먹지 않는 동생이 그나마 먹는 음식이 참기름 간장밥과 계란찜이었다. 그래서 계란찜을 하면 동생 몫으로 다 퍼가고 난 '구멍이 숭숭 뚫린 계란찜'만 남았다. 누가 좀 덜어먹는다고 맛이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포들포들한 계란찜의 첫 숟갈을 뜨지 못하는 일이 셈이 났다. 또 그런 날은 계란찜이 유독 고팠다.


참기름 간장밥은 더 그랬다. 두 분 할머니께서 모두 시골에 계셔서 참기름도 시골에서 보내주셨는데 엄마는 참기름을 귀하게 여기셨다. 음식에 참기름을 넣고 병 입구에 묻은 한 방울도 허투루 낭비하지 않고 말끔하게 발라(?) 드셨다. 나도 참기름은 귀하고 비싼 것이라 여겼다. 유치원 때 김장재료 뽑기(김장을 하는데 제비뽑기로 뽑은 재료를 가져와야 했다)에서 참기름을 뽑고 집에 와서 엄마한테 비싼 것을 뽑아서 미안하다고 했다. 그런데 동생만은 그 귀한 참기름을 밥에 비벼서 맛있게 잘도 먹었다.


한 번은 집에 참기름이 다 떨어진 날이 있었다. 친할머니께 참기름을 또 달라하기가 죄송하셨는지 어머니는 나와 동생에게 편지를 쓰게 하셨다. '제가 참기름에 밥을 많이 비벼먹어서 참기름을 벌써 다 먹었어요.' 동생더러 받아 적으라고 불러주는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라도 참기름을 덜 먹어야겠다.'생각했다. 참기름은 귀한 것이었고 함부로 탐내면 안 되는 보물이었으므로. 한 번쯤 "나도 먹을래." 할 법도 한데 그냥 빈그릇에 참기름 자국이 남은 동생의 밥그릇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다 큰 지금도 이상하게 계란찜과 참기름에 과도한 애정을 보인다. 스스로 요리를 하게 되면서 제일 자주 해 먹은 요리가 계란찜이었다. 계란 표면이 울퉁불퉁해지지 않게 계란찜을 하는 법을 배운 이후로 1인용 작은 그릇에 계란찜을 해서 '나 혼자' 먹었다. 계란찜 하나를 위해 편수체를 꺼내고 계란 푼 물을 거르고 참기름을 살짝 바른 그릇에 거품이 생기지 않게 담고 찜기에 올린다. 그냥 휙 풀어서 하면 설거지 거리도 일을 하는 시간도 수고도 줄 텐데 한동안 그렇게 계란찜을 먹었다.


참기름 간장밥도 마찬가지다. 배가 고프건 말건, 이미 밥을 먹었든 아니든 '새 밥'을 지으면 꼭 한 숟갈이라도 퍼서 참기름 간장밥을 만들어 먹는다. 지금에는 할머니표 참기름을 먹을 수 없지만 마트표가 아닌 시장표 참기름을 두르고 간장을 조금 넣는다. 볶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참깨가 있으면 깨도 뿌려서 먹는다. 새 밥을 하면 오로지 나만을 위한 참기름 간장밥을 먹어야 어릴 적 섭섭함이 좀 풀린다.


별 것도 아닌 과거의 일 때문에 현재의 독특한 습관이 생겼다. 그때의 섭섭함이 '계란찜'과 '참기름 간장밥'이라는 간단한 두 요리(참기름 간장밥도 참기름과 간장의 비율을 잘 맞춰야 하므로 요리다)로 풀릴 수 있어서 다행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나와 동생이 들어왔을 때 동생에게만 "밥을 먹었냐"라고 묻는 엄마의 말이 가끔 서운하다. 몇십 년 밥을 차려온 일이 지겨워서 이제는 못하겠다는 말씀이 안쓰러우면서도 동생이 귀가하면 뛰듯이 가서 밥을 차리는 뒷모습을 보면 울컥한다. 


엄마한테 밥을 해 달랠 순 없으므로 앞으로도 계속 질리도록 계란찜을 해서 먹고
질리도록 밥에 참기름을 비벼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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