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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호 Dec 09. 2019

연말에 갈 길을 잃었다면

'바야흐로 송년회의 계절'이라고 하고 싶지만

회사를 다니고 있는 것도,

소속된 친목회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지금은 송년회의 계절입니다'라고 단정 지어 말할 수는 없다.

다만 현상을 보고 추측을 할 수는 있다.

저녁 늦게 지하철을 타곤 하는데 지하철 분위기가 바뀌었다. 일단 공기가 심상치 않다.


솔솔 풍겨오는 술냄새.

불콰해진 얼굴들.

삼삼오오 모여 떠드는 무리.

패딩에서 풍기는 고기 냄새.(향기 캡슐 아니고기 캡슐)

싸우고 계시는지 화를 하시는지 모르겠는 아저씨들.

번화가 인근 지하철역에서 타고 내리는 원 수의 증가.

평소보다 란스러운 장내. 그리고... 종종... 웃고 있는 얼굴들.




잠을 깨기 전까지 나는 꿈을 꾸고 꿈에서 깨면 또 꾸고를 반복하며 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중 한 꿈에선 지하철 에스컬레이터를 수십 번 오르내리면서 길을 헤맸다. 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타려고 환승구로 내려가면 새로운 에스컬레이터가 있었고, 길고 깊은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리면 다시 지하철 역, 오지 않는 열차. 열차가 오지 않는 지하철 터널은 괴물의 입 속처럼 시커먼 색이어서 나를 금방이라도 집어삼킬 것 같았다. 금방 도착할 거리이지만 노선도 상으로는 3시간은 족히 가야 하는 거리로 바뀌어 있는 희한한 꿈속 세계.


깨고 다시 잠들고를 반복하다가 눈을 뜨고 보니 머리가 지끈거린다. 다음 일정이 있어 타이레놀을 먹었지만 지끈거리는 두통은 지금까지도 멈추지 않다. 지난 몇 주 동안 너무 여러 일들이 한꺼번에 겹쳤고 숨 돌릴 틈도 없이 내 앞으로 닥치는 일을 겨우겨우 해치웠다. 그리고 가장 고민하던 일도 겨우 끝냈다. 아직도 해야 할 일은 산더미인데 너무 빨리 무기력증이 오고 체력 소모도 많았다. 매번 발목을 잡는 완벽주의가 또 기승을 부려 일은 제대로 되지 않고 에너지만 허비한 탓일까.


송년의 인상을 나열한 저 글은 벌써 예전에 발행하려고 써둔 글이지만 더 이상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마무리를 지어보려고 해도 작위적인 맺음말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저 송년 축제에 끼어들 여유도 없으면서 선뜻 글을 쓰기 시작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마음속에 송년을 맞이할 여유가 없으니 보이는 풍경을 나열하는 것 외엔 어떤 메시지를 곁들일 수 있을까.


나만 이렇게 바쁜 것이라고 푸념을 하고 싶지는 않다. 누구나 다 이렇게 송년을 맞이하는 거겠지. 회사를 다니는 분들은 더 바쁘겠지. 내가 하는 일 망치면 나만 손해보고 그만이지만 회사에서 하는 일이 어긋나면 더 골치 아픈 일이 생길 테니 그분들 마음 오죽할까. 하는 생각도 한다.


그저 한 해가 다 가고 있다고 하면 형식적으로나마 하던 일을  마무리 짓고 새로 시작하는 느낌을 가질 수 있어 좋다. 딱 이 정도 좋음이 아닐까. 묵은해나 새해나 태양은 같은 태양이고, 새해가 된대서 작년에 하던 골치 아픈 일들이 사라진다는 보장도 없다. 그냥 중간에 반점 하나를 찍고 가는 느낌이다. 


물론 반점을 찍는다고 해서 문장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최악의 경우엔 나열하는 문장을 쓸 때처럼 무수한 반점을 찍고 나서야 온점을 찍을 수도 있겠지. 그저 바쁜 연말을 보내는 이들이 반점을 찍는 순간에서나마 숨 돌릴 틈을 얻길 바랄 뿐이다.


문장을 빨리 마치지 못할 것이라면 말줄임표라는 아주 좋은 대안도 있다. 점.점.점.점.점.점. 무려 여섯 번을 좀 여유 있게 쉬어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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