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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뭇잎 Sep 11. 2023

검은 나비

화곡역에서 5호선으로 갈아탔다. 20분 남짓 가는 길에 마주치는 검은색 상·하의를 입은 사람들. 아, 저들도 고 서이초 교사 49재 추모 집회에 참석하는구나. 여의도에서 내려 국회의사당으로 가겠지. 손가방이나 배낭에 얼린 생수 한 병, 삐져나온 1인용 돗자리라도 보이면 덥석 손잡고 인사라도 하고 싶어진다.


9월 4일 월요일 오후 4시 30분, 여의도 3번 출구 앞은 검은색 옷을 입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누군가는 혼자, 다른 누군가는 동료를 기다리고, 어떤 이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움직인다. 길을 몰라도 검은 물결을 따라가면 길이 보였고,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출구를 몰라도 검은 리본이 그려진 스티커를 붙이고 '함께 하겠습니다. 몇 구역으로 가세요.'라는 피켓을 든 이를 보면 나가야 할 방향을 알 수 있었다.


시작 시간에 겨우 맞춰 국회의사당 앞에 도착한 나는 잠깐 멈칫한다. 검은 옷을 입은 이들이 앞, 뒤는 물론이고 오른쪽, 왼쪽까지 간격을 맞춰 1인용 돗자리를 깔고 앉아 있다. 결연하다. 진행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구호가 적힌 화면에 집중하고 있다. 검은 점이 검은 물결을 이루는 순간이다. 


나도 6구역의 한 점이 되어 자리를 잡았다. 앉은 사람이 집회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로 양쪽에는 안내 봉으로 방향을 알려주는 경찰관, 스케치북으로 안내 사항을 알려주는 질서유지인이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인다. 분주하지만 확실하고 조용하게. 유가족 어머니의 편지 낭독 시간이 되었다. “딸아!” 하고 시작하는 편지의 내용에 집중하지 못했다. 화면을 통해 들리는 엄마, 딸, 사랑, 위로, 미안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눈물이 맺혔다. 믿기 어려웠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자식이며, 앞으로 가족을 보지 못한다는 일은 상상만 해도 마음이 저릿한데 사람이 사람을 괴롭혀 죽음까지 이르게 할 수 있다는 게. 끝까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하는 이의 작은 어깨가 흔들렸다. 


학교는 많은 학생이 다니는 곳이다. 수업을 방해하고 다른 친구를 힘들게 하는 학생이 있다. 한 학기 내내 수업 시간에 엎드려 자는 학생도 있다. 학생은 그럴 수 있으나, 교사는 잘못된 행동이라고 알려주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 다른 친구 앞에서 행동을 제지하고 훈계하여 부끄러움을 주었다고 아동학대로 고소당하는 사례는 그냥 어느 학교 일부의 이야기가 아니다.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우리 주변의 실상이다. 제대로 된 교육을 할 수 없고, 고소당해도 혼자 버텨야 한다. 강요당한 무능과 인내라는 허울의 무기력에 그냥 미소만 지을 수밖에 없는 소모품이 되어버렸다. 교사가 되어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주 잘’ 살 수는 없어도 예쁜 아이들을 만나 좋아하는 일을 하며 안정감 있게 살 수 있다는 희망은 이제 없다. 나의 직업은 이제 버텨야 하는 직군이 되어버렸다. 하대하며 소리를 지르는 악성 민원인과 교사를 지켜주는 일은 애당초 자신의 역할이 아니라는 듯한 태도의 교육부로부터 버텨야 한다. 버티는 것과 안정적인 직업은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 건지.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까.


하나의 점처럼 조용히 살고자 했던 내가 거리로 나선 이유는 빚진 것이 있기 때문이다. 옆자리의 선생님이 힘들 때 손잡아주지 못해서, 후배 교사가 울 때 옆에 있지 못해서, 무너지는 교육 환경을 그저 참고만 있느라 바꾸지 못해 미안해서이다. 우리는 더 이상 동료를 잃고 싶지 않다.  


손바닥만 한 검은 줄무늬 나비가 훨훨 날아다닌다. 1구역에 앉았다가 3구역에서 쉬었다가 6구역에도 날아다닌다. 검은 모자와 바지, 티셔츠 입은 검은 점들 사이로. 검은 점이 선이 되고 면이 되어 물결처럼 흘러가길, 검은 바위처럼 단단해지길 응원하면서. 나비야, 나비야. 너도 이제 훨훨 날아가거라. 미련 없이 가고 싶은 곳으로 자유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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