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웃진 못하지만, 매일 울지도 않아
3장. 난 그저 잠시 우울했을 뿐인데
언제부터였을까, 내 감정에 달린 이름표가 사라진 게.
나는 감정이 풍부한 아이였다.
어릴 적 친척집에 맡겨졌을 때에는 어른들 눈치를 보느라 감정을 숨기곤 했지만 그렇다고 내 감정이 어떤 상태인 지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중학생이 된 나는 그때와는 달리 내 감정을 인식하는 게 어려웠다.
어떠한 감정의 변화가 일어나면 그것을 알아챌 수 있었으나
지금의 내가 느끼는 감정이 맞는 건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친구들에게 오늘 기분이 좋아 보인다는 말을 들어도
그 순간 마음속에서는 내가 지금 기분이 좋은가?라는 의문점이 생긴 것이다.
또한 이런 감정의 혼란은 겉으로도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어떤 날은 거의 무(無)에 가까운 감정 상태임에도 신체적인 반응이 일어나기도 했다.
서럽게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나 자신이 왜 우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 많이 혼란스러웠다.
이런 내가 싫어질 때도 있었다.
그와 동시에 이런 나를 좋아하기도 했었다.
슬픈 상황에서 무덤덤한 태도를 보일 때면 나는 그들보다 조금 더 어른스럽고 성숙하다는 걸 증명받는 느낌이었다.
어린 나이에 친구의 자살이라는 큰 일을 겪었지만 언제까지고 그 시간에 머무르기는 싫었다.
어른들도, 친구들도 이런 나를 불쌍히 여기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그 슬픔을 외면한 채 어떻게든 나아지고 싶었다.
숨 막히게 나를 조여 오는 죄책감과 그날의 트라우마 따위보다도 이대로 무너지는 나를 지켜보는 게 더욱 힘들었다.
그래서 나는 치료를 통해 나아지기보단 방치를 통해 무뎌지는 쪽을 택했다.
가끔씩 튀어나오는 죄책감과 친구에 대한 그리움을 애써 짓누르고, 슬픔이라는 감정은 철저히 외면했다.
도저히 나의 어렸던 상처를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마주하고 인정하는 순간, 나는 돌이킬 수 없는 우울감에 빠져버릴 테니까.
몸도 마음도 가장 불안정한 시기였기에 어리석은 선택을 했었다는 걸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덕분에 성숙해질 수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과거를 원망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