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과 방학은 불가분의 관계다. 아이의 방학이 시작되면 운동이 중단된다. 아이를 맡길 데가 없어서다. 초등학생이라 혼자 집에 있을 수 있는 나이이지만 아직 저학년이고 외동이라 아이만 두고 나오려면 마음이 쓰인다. 유치원 여름 방학은 일주일이라 괜찮았는데, 초등학교 여름 방학은 한 달이었다. 겨울 방학은 두 달이라고 한다. 믿을 수가 없다. 내가 초등학생 때 방학을 맞이하던 마음과 엄마로서 아이가 방학을 맞이할 때의 마음이 사뭇 다르다는 것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보통 엄마의 보통의 고뇌다.
아이가 방학을 맞이한 첫 주에는 박스에 데려갔다. 어떻게든 옆에서 놀게 하고 운동을 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딱 50분인데 뭐. 그래도 매일 같이 가는 건 민폐라는 생각이 들었다. 운동 가는 횟수를 줄여서 주중 두 번만 데려갔다. 그 뒤 나머지 방학 기간 동안 박스에 거의 나가지 못했다.
박스마다 회원의 연령층과 라이프 스타일을 고려한 서비스를 고심할 거다. 크로스핏은 현재 인기 절정의 운동이고, 박스에 힙한 요소가 있다는 것은 잠재적 회원의 구미를 당기는 장점으로 작용한다. 내가 다니는 박스는 반려 동물을 풀어 둘 공간을 마련해 뒀다. 언제든지 반려견을 데리고 갈 수 있다. 하지만 아이를 맡길 곳은 없다. 강아지를 옆에 두는 것과 사람의 아이를 두는 것은 전혀 다른 주제와도 같기 때문일 거다. 기본적으로 크로스핏 박스에 오는 사람이 대개 20, 30대 싱글이고, 기혼자라 할지라도 아이가 있는 엄마는 많지 않다. 그래서 더욱 박스 운영과 탁아는 별개의 문제다. 엄마 회원이 압도적으로 많은 요가 학원일지라도 탁아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체육관은 체육관의 일을 할 뿐이고, 탁아소는 탁아소의 일을 할 뿐인가 보다.
여기서 육아하는 엄마에게 딜레마가 생긴다. 육아와 운동은 관계가 깊은데, 특히 몸으로 놀아줘야 하는 남자아이를 키울 경우 엄마의 체력이 중요하다. 체력이 고갈되면 짜증이 생기게 마련이다. 방학 동안 괜히 신경질 내는 엄마가 되지 않기 위해서 마음을 다잡았다. ‘주양육자의 운동권을 보장하라’고 청원하고 싶었다. ‘피지컬 100’에는 못 들지만 엄마라는 사람에게도 피지컬이 있긴 있단 말이다. 가끔 SNS에서 전문 장비에 앉힌 아이를 업고 등산하는 이 세상 어느 엄마의 모습을 접할 때가 있다. 세상의 엄마들은 강하고, 세상의 엄마들은 운동 의지도 강하다. 또한 아이와 함께 하고 싶은 마음도 강한 게 엄마다.
아이를 박스에 데려가던 날, 아이에게 그곳에서 볼 책과 장난감을 챙기자고 했다. 나는 마트나 식당 등 외출 장소에서 아이에게 영상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박스에서 영상을 틀어주면 나도 운동하기 훨씬 수월하다. 하지만 운동하는 곳이 곧 영상을 보는 곳이라는 인상을 심어주고 싶지 않았다. 아이 본인도 그곳에서 운동을 해도 되는지 물었다. 민폐의 경계선을 고민하던 중 우선 아이의 줄넘기를 챙겨 가보기로 했다. 아이가 줄넘기하는 것을 좋아해서 1년 가까이 줄넘기 학원을 다니고 있던 때였다. 평소 자신 있어하는 줄넘기를 어른들이 다니는 체육관에서 뽐내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거다. 모험을 감행하는 애니메이션에 빠진 후 본인은 더욱 강해져야 한다, 훈련이 필요하다는 말을 달고 살던 시기이기도 했다.
초반 준비 운동 시간에는 아이가 미리 오버하지 않도록 에너지를 누그러뜨리려 애썼다. 와드를 격렬히 할 때쯤 아이가 줄넘기를 하면 티가 덜 나겠지 싶었다. 크로스핏 와드 중에도 더블 언더(Double-Under, 줄넘기 쌩쌩이)가 포함된 경우가 있다. 박스에서도 종종 줄넘기를 하기 때문에 아이가 줄넘기를 하는 모습이 이질감을 불러일으키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박스의 후면 벽 쪽에 자리를 잡고 나는 와드를, 아이는 줄넘기를 하려고 채비했다. 와드는 파워 클린(Power Clean), 행 파워 클린(Hang Power Clean), 스쾃 클린(Squat Clean) 등 클린 동작이 복합적으로 들어간 “M. Big Clean Complex"라는 제목의 것이었다. 제한 시간 20분 내에 가능한 한 많은 라운드를 하는 'AMRAP(As Many Rounds As Possible)'으로 진행됐다. 내가 숫자를 세는 카운팅 기기를 챙기는 걸 본 아이가 그게 무슨 물건이냐고 물으면서 자신의 것도 챙겼다. 그날은 기록을 신경 쓰기보다는 몸을 풀고 간다는 느낌으로 운동을 했다. 와드를 하며, 아이가 다른 회원의 자리를 침범하지 않게 주의를 주며, 어떻게 마쳤는지 정신없이 운동을 끝냈다. 와드를 마친 후에는 언제나 코치님에게 자신의 기록을 알려줘야 한다. 크로스핏은 다 함께 정해진 와드를 하는 단체 운동이자, 각 개인의 운동 역량에 따라 차등된 무게나 대체 동작으로 레벨을 나누어 진행하는 개인 운동의 성격도 포함하고 있다. 그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경우가 바로 화이트보드에 각자의 기록을 남기는 것이다. “누구누구님!” 하는 소리가 들리면 호명된 사람이 자신의 기록을 말하면 된다. 그러면 코치님이 각 회원의 운동 레벨 및 기록을 적는다.
운동을 아예 하지 못하는 것보다는 그나마 나았다는 안도의 목소리를 담아 내 기록을 알려 드렸다. 모든 회원의 기록이 보드판 위에 적혔다. 그때 갑자기 눈치 없이 아이가 큰 소리로 외쳤다.
“저는 줄넘기 2000개 했는데요?!!!”
왜 자신의 기록은 물어보지 않느냐는 뉘앙스 20%, 자신이 줄을 2000번이나 넘었다는 어깨 발광 뉘앙스 20% 정도를 섞어 어필한 것이다. 운동에 사용한 장비를 정리하던 회원들이 큭큭, 웃음을 터뜨렸다. 내 아들이지만 객관적으로 귀여웠다. 코치님도 미소 지으며 “어, 어, 그래. 네 이름이 뭐야?” 하고는 회원들의 이름 옆에 나란히 기록을 적어줬다.
‘송** 줄넘기 2000’
못 말리는 귀염둥이다. 못 말리기 때문에 그 뒤로는 더더욱 데려갈 수가 없었다. 손주를 둔 할머니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도는 얘기를 알 거다. ‘오면 반갑고, 가면 더 반갑다.’ 박스에 한두 번 데려갈 때는 반갑고 귀엽다고 하겠지만 서너 번 가면 ‘여기는 방과 후 교실이 아닙니다’라고 할 거다. 나 혼자 지레 짐작하는 거다. 겨울 방학이 오면 어떻게 운동을 할 수 있을지 나름대로 진지하게 고민 중이다. 온 마을이 아이 한 명을 키우는데 관심 가져 준다면 참 좋겠다는 꿈을 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