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사다난 천방지축, 쏜살같이 지나간 2019년을 뒤늦게 되돌아보며
봄이 오는 소리가 들려야 하는 '시작의 달' 3월인데, 세상은 왠지 혼란하기 그지없다. 갑작스럽게 전 세계를 뒤덮은 전염병의 공포와, 하루가 멀다 하고 싸우는 국회의원들을 보니 실감이 나는 4월 총선과, 보고 있으면 눈앞도 말끝도 흐려지는 미국 대선 레이스와, 개학이 예상보다 훨씬 많이 연기돼서 심심함 속에 메말라가는 내 친구들과… 이외에도 수만 가지 이유들이 "음 이건 시작이 아니라 끝에 가까운데…?" 하는 섬뜩한 상상들을 불러일으킨다.
어찌 보면 세상은 늘 이랬다. 바쁘고, 정신없고, 시끄럽고, 맨날 치고받고 싸우고. 그 와중에 원망스러울 정도로 철저하고 완벽하게 흘러가는 건 언제나 시간이었다. 물론 상황에 따라 체감 속도가 달라지기도 하지만, 그 속도가 빠르게 느껴지든 느리게 느껴지든 시간은 언제나 '야속함'이라는 형용사를 달게 되는 불가피한 운명을 타고났음은 확실하다.
그러나 예전에는 그 시간이 너무 느리게만 가는 것 같아 야속했다. (고작 19년 살아놓고) 평생 그랬다고는 말 못 하겠으나, 적어도 중학교와 고등학교 재학 당시까지는 그랬다. 안 그래도 답답한 매일매일이 마치 달팽이가 나뭇잎 위를 기어가는 것처럼 느리게 흘러가서 속이 타들어갔다. 주춤거리기만 하는 삶의 연속이었고, 그 안의 내 모습은 작게 움츠러든 애벌레 같았다. 잔뜩 기가 죽은 나 자신이 꼴도 보기 싫었다. 그 누구보다 나를 원망하고 끔찍이 미워하는 건 바로 나였다.
벌써 2020년에 접어든 지 3개월째.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까, 올 한 해… 가 아니라 벌써 작년이 된 2019년은 너무 빨라서 황당한 수준이었다. 아니, 황당해할 겨를도 없었다. 2020년 3월이나 되어서야 "아니 2019년이 벌써 끝났다고?" 하며 눈을 끔뻑이는 나를 보면 내가 얼마나 뒤늦게 놀라는 중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정도로 정말 너무 빨랐다. 심지어 2019년 2월은 벌써 1년 하고도 1개월이 더 지난 과거가 되었다니! 이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
믿을 수 없다. 아직도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자퇴서를 내고 학교를 나왔던 내 모습이 생생한데, 눈을 감았다 뜨니 1년이 지나버렸다.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4년의 시간은 영원처럼 길었건만 지난 1년은 마치 0.01초처럼 짧게 느껴진다. 그러나 그 영원 같던 4년 동안 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경험들과 만남들, 찬란한 순간들이 2019년에 존재했다. 자퇴 1주년(…)에 내가 해외에 머물고 있었기에 이제야 글로 남기지만, 사실 그 날 왠지 모르게 몽글몽글 해지는 마음으로 기록장에 따로 정리를 해보았다.
< 자퇴 후 1년 간의 삶에 남은 잊을 수 없는 기억들 >
건강 때문에 복용하던 약들 전부 복용 중단, 건강 많이 회복
Aglai와의 만남 & 동남아 배낭여행(*이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제 브런치에서 <방랑일기>를 읽어보시길!)
서핑 많이 했음+다양한 서프 버디들과의 만남
용돈 모아 보드 사고 랜드 서핑(카버 보드) 배우기 시작
가장 좋아하는, 마음의 안식처 같은 카페 발견
제주도 2번 - 즉흥 서핑 트립 / 제주도 한 바퀴 자전거 종주
즐겁고 소중했던 약 6개월 간의 첫 아르바이트
명상과의 만남, 감정과 상황에 대해 객관적으로 생각하기 시작
청소년 연사로 청소년 대상 강연회 참여
봉사단체 활동으로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고 값진 경험을 함
노엄 촘스키 선생에게 메일 보내고 답장 받음
러시아로 시작했으나 동유럽까지 총 6개국 53일간의 배낭여행. 동유럽은 아예 홀로 여행.
내가 번 돈으로 정기후원 시작(결연아동, 인도주의 실천 의사협의회)
시골 외가댁에서 혼자 일주일 생활
소화 가능한 집안일들 전담
읽고 싶은 만큼 독서, 보고 싶은 만큼 영화 감상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나의 소중한 순간들은 지극히 개인적이어서 별 볼 일 없게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 1년 동안 간절히 바라고 바랐던 어떤 일들은 너무나도 쉽게 무산되기도 했고, 자신 있게 생각했던 어떤 상황들에서는 나의 한계를 보기도 했다. 나의 선택에 그 누구보다도 나 자신이 후회하고 싶지 않았기에 가끔은 수십 배로 조급해지거나, 멋지고 빛나는 일들을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강박이 생길 때도 있었다. 또 어떨 때는 남들은 절대 얻을 수 없는 귀중한 순간들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만하거나 욕심을 부린 적도 많았다. 자퇴를 해도 여전히 나는 미성숙하고 나약한 어린애였다.
그렇지만 그래서 더 좋았다. 내가 아직 모르는 세상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도, 나를 돌아보며 반성할 수 있다는 것도, 이런 모든 순간들이 나를 성장시킬 게 분명하다는 것도 전부 나를 기쁘게 만들었다. 자존감과 자신감이 낮아 한 번 넘어지면 나를 갉아먹을 만큼 후회하던 예전의 나는 이제 없었다. 그 자리에 서있는 건 거침없이 도전하고 실패에 기죽지 않는 나였다.
물론 우울함도 당연히 찾아왔다. 한두 번이 아니었고, 어떤 사건들 앞에서는 세상이 나를 나락으로 밀어 넣는 기분마저 들었다. 그럴 때면 열심히 쌓아온 행복들이 증발되는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예전보다 그 구덩이에서 좀 더 쉬운 방법으로 빨리 빠져나왔다. 빠져나왔어도 몸에 생채기가 나 절망했을 법한 상황들도 있었으나 이제는 그냥 대충 흙을 털고 “오! 영광의 상처!” 를 한 번 외쳐준 다음 다시 룰루랄라 길을 걸었다. 그런 변화에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달라진 건 딱 한 가지. 나는 이제 나를 믿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을 뿐이다.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일들이다. 이렇게 봤을 때는 고작 자퇴 하나 했더니 이렇게 사람이 달라졌다는, 그야말로 기묘한 이야기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당연히 근본적으로는 자퇴로 인해서 만들어진 상황들이지만, 나는 그게 전부였다고 보지 않는다. 나에겐 그저 '시간'이 생겼던 것이다. 최선을 다해 나를 보듬어주고, 안아주고, 사랑해주고, 믿어주는 '시간' 말이다.
슬프게도 우리는 삶을 살아가며 예상보다 '나 자신에게만 집중할' 시간을 많이 갖지 못한다. 갖가지 현실적인 문제들에 부딪히는 탓에 평생을 원치 않는 수만 가지 과제만 해결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다 아주 가끔 그 시간을 얻게 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운 좋게 그 '사람들'의 범위 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처음엔 이 선택이 과연 옳은지 몰라 고민했고 선택을 한 후에도 한동안은 두려움에 몸부림쳤다. 그런데 차분하게 바라보니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어차피 어떤 삶을 살든 나의 삶은 내가 책임져야 하고, 나에게는 조금 더 마음에 드는 삶을 책임질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니 감사하게 나아가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가본 사람이 적다고 해서 가지 못하는 길은 아닌 거니까.
그렇게 여기고 숨을 고른 다음 다시 걷기 시작하니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였다. 주어진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며 몰입하자 살아간다는 것의 경이로움을 느꼈다. 매사 부정적이던 나는 이제 삶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이상한 돌연변이(…)로 변화했다. 내가 한 모든 경험들이 나를 기적처럼 성장시켰고, 내가 만난 모든 사람들이 나의 새로운 스승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나는 학교에서는 배울 수 없는 것들을 배웠다. 서핑과 서프 버디들로부터 내 안의 행복과 다른 이들과의 공존을, 전 세계의 여행자들로부터 열려있는 마음과 자유로움을, 책과 영화로부터 세상을 새롭게 보는 법을, 스케이트 보더들로부터 두려움을 이기는 열정을, 봉사단체 친구들로부터 대가 없는 따스한 사랑을, 아르바이트 사장님으로부터 강인한 의지와 인내를…. 이것 말고도 수많은 다양하고 소중한 것들을, 난 지난 1년 동안 새롭게 배웠다.
자퇴를 결심하던 1년 전의 나로부터 배운 것도 있다. 바로 '용기'다. 굴하지 않고 씩씩하게 나아갈 수 있는 그 마음, 그 반짝이는 '용기'를 더 단단하게 가슴속에 새기게 해 준 나 자신에게도 정말 정말 고맙다. 그 용기가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 지금까지 나를 변함없이 응원하며 사랑해준 모든 사람들의 진심을 보지 못했을 것이고, 하루하루가 얼마나 귀한지도 여태껏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는 잽싸게 간다고만 느껴지는 시간들 속에, 내가 삶이 아름답다고 생각하건 말건 세상은 늘 혼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여있다. 시대가 변화하고 기술이 발전할수록 유토피아보다는 디스토피아에 근접해가는 이 정신없는 세상이 가끔은 원망스럽기도 하지만, 그래도 나는 이 1년 간의 배움을 마음에 품고 자퇴 2년 차의 삶을 꿋꿋이 걸어 나갈 생각이다. 그렇게 살아가다 보면 무언가 또 새로운 '1년 차'가 내 이름 앞에 붙고, 그것들이 여러 개씩 쌓이겠지? 벌써 이다음 스텝들이 얼마나 재밌고 이상할지 궁금하다. 어떤 순간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든 간에, 나는 나중에 이 문구를 묘비에 새길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
< 용기 있는 돌연변이, 여기 잠들다! >
아 내 인생, 너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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