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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즈 Apr 24. 2019

인생의 파도를 타는 중이에요

모든 걸 바꾼 라이프 스타일, 서핑

어떤 날의 도전


2018년 상반기는 이제껏 겪어본 적 없는 암울함을 마주한 시기였다. 하루에 캔커피 하나를 마셔가며 수업 시간에 억지로 졸음을 참았고, 결국에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지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이대로 삶을 이어나간다면 내일도 보장하기 힘들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지금의 인생에게 이별을 고하고 싶었으니까.


그래서 사실 여름 방학 직전에 부모님이 '그 제안'을 했을 때도 딱히 끌리지 않았다. '그 제안'이란 아빠와 인연이 있는 '빌'이란 분이 스태프로 일하고 계시는 강원도 양양의 서핑 샵에서 생활하는 것이었다. 일주일 동안, 그것도 혼자서. 일단 푹 쉬길 원하던 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본심을 말하기에는 상황이 조금 애매했다.


여차저차해서 부모님 차를 타고 가게 된 양양은 무척이나 더웠다. 부모님의 대화에서만 거론되었던 서핑 샵의 스태프 빌 삼촌은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다른 스태프인 현우 삼촌과 제이슨 삼촌, 루시 언니, 그리고 사장님 역시 마찬가지였다. 방학을 맞아 서핑 샵에 온 사장님의 딸 시현이도 밝고 따뜻했다. 부모님이 10분 만에 떠난 후 (주변에서는 믿지 않지만) 은근히 낯을 가리는 나도 생각보다 빨리 사람들과 가까워질 수 있었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이곳에서의 시간이 내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지 잘 몰랐다.



아까와는 다른 시간을 위해서


어린 시절 오랫동안 수영을 꾸준히 배웠어도 나고 자란 곳이 서울인 나는 바다에 대한 막연한 공포를 가지고 있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바다는 호수 수준으로(...) 잠잠했고, 보드 위에서 처음 균형을 잡는 것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파도가 왔을 때 잘 버틸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은 없었다.


그러나 신기한 것은, 아주 작은 파도를 기다리는 그 시간이 내가 잊고 살았던 가치들을 문득 되새기게 만들었다는 점이었다. 숨을 고를 줄 아는 여유, 다음 순간에 대한 기대감, 고민과 판단을 거듭할 수 있는 인내심, 지금 이 흐름을 향한 애정…. 서툴긴 해도 최선을 다해 세상을 느끼는 방식들은 나의 마음 한편을 잔잔하면서도 강렬하게 뒤흔들었다. 이토록 짜릿한 느릿함이라니. 어떤 감탄사로도 파도가 나에게 준 반짝이는 영감은 설명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보드 위에서 파도에 몸을 맡긴 순간, 나도 모를 전율이 온몸을 감쌌다. 속도가 빠른 것도 아니었고 파도의 크기도 작았지만, 바라보기만 하던 자연이 나에게 마주 닿았다는 사실 자체가 경이롭고 놀라웠다. 많은 이들이 서핑이라는 라이프 스타일을 놓지 못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실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도 나 자신이 달라지면 된다고, 만약 세상이 달라진다면 그 처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응시해야 하는 거라고, 바다는 그렇게 외치는 중이었다. 내가 그토록 고민하고 찾아 헤맸던 "아까와는 다른 시간"은, 내 마음이 달라졌을 때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만남은 새로운 꿈을 꾸게 만들고


서핑만큼이나 이곳을 사랑하게 만든 건 사람들이었다. 스태프와 방문자 간에 다양한 교감이 이루어지는 이 서핑 샵은 마치 '커뮤니티'처럼 형성되어 있었다. 서로의 삶을 주저하지 않고 응원하는 분위기는 언제나 치열한 경쟁을 경험해왔던 나에게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요소로 작용했다. 또한 그들은 본인을 낮추지 않으면서도 상대에게 박수를 보내는 법을 알았다. 안정적인 직장, 경제적인 풍요로움, 사회적 권위 등은 그들에게 중요치 않았다. 작은 것에서 찾은 기쁨과 행복이 도전과 모험을 즐기게 만드는 원동력인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무의식적으로 정상을 향해 달리던 나에게 그들의 삶은 교과서보다 더 좋은 지도가 되었다. 서핑 샵에서의 매일매일은 졸음을 견디며 보내는 학교 생활과 비교도 되지 않는 인생 수업이었다. 애써 등졌던 열정과 꿈들이 언제나 당차게 내일을 찾아가는 삼촌들과 언니들을 보며 다시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림 그리기가 취미인 전투기 조종사 삼촌의 전시회에 비평글을 선물하고, 서핑 샵의 작은 확장공사 때 땀을 뻘뻘 흘리며 페인트칠을 하고, 바비큐 파티 도중에 뜬금없이 뮤지컬 갈라쇼를 하고, 오래된 팝송들을 들으며 밤바다를 바라보고. 대단하지는 않아도 특별했던 시간들 속에서 시들어버린 감정은 봄을 맞이한 것처럼 새싹을 틔웠다. 기회가 아니라 기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즈음에는, 벌써 일주일이 지나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야 했다.


양양에서 지낸지 하루 만에 까맣게 탄 손.


돌아온 나는 양양에서의 나날들이 얼마나 반짝였는지 부모님에게 끊임없이 풀어냈다. 여름보다 더 뜨거운 마음이 아직도 반짝이며 타오르고 있었다. 엄마는 늘 무기력하던 내가 정말 오랜만에 생기를 되찾자 함께 기뻐하셨다. 새까맣게 탄 몸 곳곳조차도 추억의 증거 같아 좋았다. 서울에 온 지 하루 만에 다시 혼자 고속버스를 타고 양양으로 떠날 정도였다.


끝은 있었다. 눈부신 바다와 열정적인 사람들로 가득 찼던 여름 방학이 끝난 후, 나는 여지없이 일상으로 돌아가야 했다. 여전히 세상과 학교 생활은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삶에 대한 고민을 할 때마다 양양의 기억을 떠올렸다. 무모하게 자퇴를 하면 평범한 길이 무너질까 겁을 내던 나였지만, 무너진 길을 나만의 방식으로 다시 다져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결국 자퇴는 상상을 넘어 현실이 되었다.


그렇게 나는 비로소 두려움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운 것이다.



오늘도 신나게 파도를!


양양 바다를 배경으로 언니들과 찍은 사진. 내 생애 최고의 사진이다.


그리고 바로 며칠 전에 열린 시즌 오픈 파티는 역시나 정말 즐거웠다. 익숙한 인연은 더 찬란해졌고, 새로운 인연은 신선한 행운으로 다가왔다. 만약 그 여름의 제안을 거절했더라면 이 두근거림을 느끼지 못했으리라. 명수 언니와 혜림 언니와 여행을 떠날 생각도 못했을 것이고, 다혜 언니에게 새로운 프로젝트에 대한 조언도 구하지 못했을 것이며, 두풍 삼촌의 김치찌개도 못 먹고 혜린 언니의 피아노 연주도 못 들었겠지. 태연 삼촌의 카메라 안에도 못 담겼을 테고, 진용 삼촌의 아름다운 그림을 알게 되기는커녕 끊임없이 이어지는 삼촌들의 농담에 웃지도 못했을 거야.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밤바다 앞의 삼겹살도 못 먹었을 거고. 그런 생각을 하니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아니 어쩌면, 그 여름의 바다 앞을 찾지 않았다면 나는 삶에 대한 애정들을 영원히 서랍 속에 가두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하염없이 내게 다가오는 파도를 무서워하면서, 소리를 지르며 눈을 질끈 감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바다 같이 넓고 끝을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거센 파도가 쳐도, 그 파도 위에 올라타 또 모험을 시작하고 싶다. 매번 생경한 전율의 감각을 사랑하면서 말이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다음 파도를 기다리는 중이다. 언젠가는 내가 누군가에게 파도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



And Thanks to. 그곳에서 만난 모든 인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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