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차 브랜드 원숭이도 나무에서 뚝 떨어집니다.
저는 유통업이 싫었어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남의 물건을 가져와 남보다 잘 팔 자신이 없었습니다. 친구한테 볼펜 하나 못 팔 소극적인 성격으로 장사 체질이 절대 아니라는 스스로의 확신이 아주 강력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적성에 안 맞는 일은 접어두고 편하게 살면 될 텐데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만의 제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브랜드 사업에 대한 열망은 너무나 컸습니다. 하지만 특별한 기술이나 마땅한 제품 없이 브랜드 비즈니스를 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핸드메이드로 이 세상에 없는 나만의 특별한 무언가를 만들어내자.'였습니다. 정성껏 만든 제품으로 그동안 회사에게 갈고닦은 노하우를 발휘해 마케팅과 홍보활동을 제대로 하면 사랑받는 브랜드가 탄생할 거야!라는 핑크빛 꿈에 한껏 부풀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집에서 키우는 동물 하나 없는 주제에 용감하게 펫 푸드 비즈니스에 뛰어듭니다. 당시 정부 차원에서 반려동물 관련 사업을 엄청나게 육성한다는 뉴스와 나날이 커져가는 펫 시장 그리고 국내에 몇 없는 일본 펫 영양사 자격증까지 취득하면 경쟁력 있는 브랜드가 되는 것쯤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수백만 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관련 강의를 듣고 자격증을 취득한 후, 전문성을 좀 더 갖추기 위해 일본에 가서 수의과 대학교수들과 전문가들이 며칠에 걸쳐 진행하는 펫 영양학 세미나에 수차례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일본 전국에서 펫 영양학을 공부하기 위해 찾아온 수십 명의 일본인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한국에서 왔다고 자기소개를 했을 때 그 깜짝 놀라던 반응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당시에는 내가 만든 건강한 수제간식과 사료로 우리나라 반려동물 건강에 크게 이바지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펫푸드 브랜드가 되겠다는 열정에 몇 시간 비행기를 타고 오고 가는 거리쯤은 전혀 힘든 일이 아녔습니다.
작업실을 구해 영업 허가도 받고 낮시간에는 숱한 실패와 성공을 반복하면서 제품 개발을 하고 저녁에는 자격증 시험 준비를 위해 일본어로 된 동물영양학 교재를 들여다보며 주경야독을 하면서 거의 1년이라는 시간과 적지 않은 비용 그리고 온갖 노력을 사업에 쏟아부었습니다. 정식 론칭 전 블로그에 유익한 펫푸드 정보와 직접 만든 작업물을 올리며 강아지와 고양이를 기르는 반려인들과 소통하고 인스타를 통해 이벤트를 하면서 사전 홍보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심혈을 기울여 만든 콘텐츠였기에 아픈 강아지나 고양이를 기르는 분들의 개인적인 문의도 많았습니다. 이렇게 하다 보면 정말 썩 괜찮은 브랜드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본격적으로 판매를 시작하긴 전 까지는 말이죠.
처음으로 받은 주문은 바로 가까운 지인 찬스로 유학원을 경영하는 친구로부터의 특별 주문이었습니다.
고객들에게 좋은 제품도 알리고 선물하는 용도로 거의 전 메뉴를 세트화해서 보내달라는 통 큰 대량 주문이였 습니다. 소중한 첫 주문이었기에 제대로 만들어 내기 위해 거의 일주일을 새벽에 퇴근하면서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저는 제조에 정말 재주가 없다는 것을 말이죠. 깊은 밤중 홀로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설거지를 하면서 정말 그곳을 탈출하고 싶었습니다. 이곳만 아니면 어디라도 괜찮아, 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꾸역꾸역 출퇴근을 하다 문득 어느 날 무엇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니 이런 방식으로 사업을 운영해나가다가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도 결코 행복한 삶을 살 수 없겠다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눈물을 머금고 저는 작업실을 철수했습니다. 해외에서 직접 사 온 도구들과 값비싼 주방기구들을 헐값에 처분하면서 스스로를 자책하는 마음에 서글펐지만 한편으로는 지옥에서 탈출한 것 같아 엄청난 해방감도 들었습니다.
꽤나 긴 세월이 지난 지금 되돌아보면 아쉬운 부분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때 혼자 하기 버거웠던 제조업무를 OEM 방식으로 맡기고 내가 자신 있는 마케팅이나 브랜딩 관련 업무에 집중했다면 어땠을까? 제품 출시 시 행정허가 상의 크고 작은 문제들을 다른 방식으로 해결하는 시도를 왜 하지 않았을까? 푸드 코트처럼 많은 메뉴가 아닌 단일 품목으로 특화했다면 더 나았을 텐데...
적지 않은 시간과 비용 그리고 나의 에너지를 바친 첫 브랜드 사업은 상처만 남기고 이렇게 쓸쓸하게 막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아직도 가슴 한편에 씁쓸한 기억으로 남아있지만 어쩌면 이 처참한 실패가 다음 사업의 씨앗을 뿌리는 도전이라는 화단에 훌륭한 퇴비가 된 것은 아닐까 스스로 위로를 해봅니다.
순진하지만 그 누구보다 뜨거운 열정을 가졌던 그때의 나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힘껏 안아주고 이렇게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여 주고 싶습니다.
"열정보다 방향이 중요해, 앞만 바라보며 열심히 하지만 말고 네가 가는 길이 바른 방향인지 한 번쯤 옆을 바라봐. 그렇게 애쓰지 말고 좀 더 힘을 빼보면 어떨까?"라고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