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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트 Oct 06. 2021

오렌지곰

우물 밖으로 나오다

서른 넘어
처음 한국 밖으로

인천 공항에서 토론토 피어슨 공항까지는 쉽지 않은 여정이다. 낯선 것도 모자라 세상 춥다는 나라에서 살아가기 위해 두꺼운 오렌지 패딩을 입고 도착해, 누가 봐도 처음 해외를 왔다는 티 나게 출입국 사무소로 향한다. 아주 짧은 영어 몇 마디로 덤비던 무지하고 무지한 볼 빨간 순진한 촌년은 입국 심사를 하는 직원 앞에서 세상 물정 모르는 중학생 얼굴을 하고 선다. "Why did you come to Canada?" "Where are you going to live in Canada?" "How long do you want to stay?" 질문을 쏟아내지만 귀는 생존 본능을 발휘한다. "스터디" "프렌즈 홈" "메이비 식스 먼스 엔드 모알 포 투어" "Welcome to Canada!" 꽝꽝 9개월짜리 학생비자를 받는다. 아! 1년도 안되네. 어쩌지? 그렇게 한국을 벗어난 오렌지 곰 맨땅에 헤딩이 시작되다.


illustrated by 반트 ( jasmine* )

   살다 보면 인간관계 속에서 어쩔 수 없는 일들도 생기고 그러다 해결하기 위해 계획하지 않는 선택 또한 하게 된다. 그때도 그랬다. 결국 낙동강 오리알이 된 처지에 용기 내서 저지른 일이 전화위복이 되고 그것이 다른 결과를 낳아 미래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원래의 계획은 2년을 기다리는 동안 영어 시험 준비를 위한 공부도 하고 돈도 모아보려 한 것이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사건이 벌어지면서 회사를 관두고 이민도 되기 전에 일찍 캐나다를 가는 것으로 결정한다. 통장 탈탈 털어 보니 겨우 600만 원 남짓이다. 서른 넘은 나이의 여자라 학생비자를 받아가는 것이 입국 거절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다들 얘기한다. 모임의 친구에게 소개받은 유학원을 통해 어학연수 명목으로 토론토에 위치한 어학원 영어 수업료 300만 원을 쓰고, 남은 300만 원으로 이민이 결정될 때까지 어떻게든 견디어 보자 싶지만 사실 막막함은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이렇게 저렇게 어설픈 계획을 짜 본다.


   '일단 두려움 묻고 더블로 가!' 무지가 용기로 가장하여, 뱉어 놓은 말들에 대한 책임감으로 버티기 도전은 어느새 토론토 피어슨 공항 문을 나서고 있다. 볼이 발갛게 달아올라있고 두꺼운 오렌지 패딩을 장착한 채 눈빨 날리는 토론토를 향해 힘차게 걸어 나간다. 과연 버텨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할 수밖에 없다. 픽업 온 에밀리와 함께 그녀의 집에 가서 이러저러 조언을 듣는데 장시간의 비행이 비몽사몽을 재촉하고 생애 처음 시차적응이라는 것을 해본다. 아마 새벽녘에 잠을 깨고 거실에 앉아서 막연하고 낯선 이 공기를 어찌할지 생각해보지만 딱히 떠오르는 좋은 생각이 나질 않는다. 일주일 정도 에밀리네 머물면서 캐나다 유학 카페에 올라온 룸 렌트 광고를 훑고 또 훑는다. 어학원이 있는 St. Clair Station에서 Finch Station까지 지하철, 그리고 버스 한 번을 더 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월 $400짜리 룸 렌트를 계약한다. 형편으론 비싼 게 맞지만 시세로는 적당한 가격대이기도 하다. 40대 부부가 두 아이와 3 베드룸 콘도에서 이민 생활을 하고 비용 절감을 위해 방하나를 렌트하는 이런 경우는 이민 사회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먼 타국으로 가는 언니가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며 가기 전에 치른 동생의 결혼식날! 그 사람, Leo의 부담스러운 국제전화 한 통이 온다. 한국을 떠나기 전 싱글 모임의 친구로부터 소개받은 그가 급하고 본인 위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성격을 가진 자로 가늠할 수 있게 한다. 여유돈이 없는 상황이기에 최대한 가성비 좋은 알바는 유혹적인 제안이지만 생각만큼 제대로 된 사업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추측한다. 정작 토론토에서 만나 일에 관련된 이야기를 나눠보니, 전문적인 지식 없이 어설프게 시작하고자 하는 그의 아이디어는 뭐지 싶다. 우연한 기회에 다른 이로부터 그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듣고 의심을 하자 그가 설득한다. 몇 달 동안 제대로 일이 진행되진 않았지만, 매일 방문하여 소비한 시간에 대한 비용을 요구하니, 바로 현금을 내민다. 또한 디자이너 말고 정말 중요한 웹프로그래머 채용이 필요하다 했다. 그가 '다음'과 똑같은 디자인을 해달라는 요청에, 무식한 소리 하지 말라고 면박을 줄 수 있는 힘(아~ 이 양반 아는 게 하나도 없구나,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한 척하는 소유자구나를 파악한 힘)을 가질 즈음에 이민 추가 서류로 Job Offer를 그로부터 받고, 아니 받아내고, 그 서류 한 장이 미래에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 미처 알지 못한다. 몇 년이 흐른 후에 지인으로부터 들은 Leo의 소식은 한인 신문에 실리는 나쁜 사기꾼의 이야기로 전해 듣는다. 역시 틀리지 않았구나...


   토론토 도착 후 6개월 지난 즈음, 더 필요한 어학연수와 비싼 체류 비용을 마련하기엔 불법적인 일을 한다고 하여도 능력치가 모자란 현타가 오고 '살다 보면 잘생긴 포기도 필요하니 괜찮다.'라고 다독인다. 영어 점수를 제출하라는 레터가 배달되고 있다는 동생이 전한 소식에 어학원에서 받은 Certificate, Reference, 그리고 Job Offer를 한국으로 돌아가는 친구 편에 추가 서류로 영사관에 제출한다. 이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으니 후회는 없다며 스스로에게 포기의 정당성을 부여한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표를 확정하고 언제 다시 올지도 모르는 캐나다를 눈에 담기로 한다. 겨울 내내 눈만 보며 지낸 시간에서 가장 즐기기 좋은 여름 시즌은 광활한 캐나다를 느끼기에 딱 좋은 계절이다. 여러 번 방문한 나이아가라 폭포, 그 어느 때에 본 것들보다 토론토 도착한 그 주말에 친구가 데려다준 이른 아침의 나이아가라 폭포는 최고 중의 최고로 기억된다. 많은 관광객들이 이용하는 캐나다 동부 2박 3일 패키지는 꼭 가봐야 하는 관광 코스다. 저렴한 가격의 여행 상품이라 친구들과 킹스턴 천섬, 캐나다 수도 오타와, 영어와 불어가 공존하는 몬트리올, 유럽풍의 고건축물들이 현존하는 '도깨비'의 로케이션으로 유명한 퀘벡까지 세상 마지막 여행인 것처럼 즐기고 8개월의 회색빛만 기억하는 토론토를 떠나 한국으로 귀국한다.




* 쟈스민 (Jasmine)의 꽃말은 '행운을 빌어요'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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