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이 초겨울보다 춥다고 생각했을 땐 이미 찢어진 입술에서 피가 새어 나왔다. 항상 추위는 날 아프게 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쓰라린 상처에 로션을 덧대는 것이 다였다. 그런 겨울을 대비하려면 겸허한 마음이 따랐기에 잠시 겪었을 늦가을의 대소동에도 곧 겨울잠을 준비하는 곰의 자세를 갖출 필요가 있었다.
때로는 이성을 숨기고 싶었다. 외나무다리 위에 매달려 누군가에게 간절한 도움을 요청하고 걱정을 털어놓는 그런 순간을 갖고 싶었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최선인 것을 알면서도 누군가에게는 '나 지금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는 어리광을 피우고 싶었고, 따스한 말 한마디도 차가운 현실 이야기도 소중히 나의 연료로 채워 넣고 싶었다. 그래서 따뜻한 샤워로 몸을 녹였다. 술잔을 기울이며 머릴 비웠고, 영화를 틀어 나의 속마음을 터놓았다. 그리고 엔딩 크레딧에서 흘러나오는 마지막 음악을 듣다 보니, 떨리던 손이 서서히 잔잔해지고 눈꺼풀이 스르르 잠겼다.
역시나 무거운 아침이다. 하루를 시작으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일어나서 가장 하기 힘든 일이라는 것이 한 치의 오차 없이 애석했어도 오늘은 달랐다. 잠기는 눈꺼풀에도 몸덩이를 일으켜 곧장 아침을 차렸다. 매번 보던 방송도 흥미가 생기지 않아, 나의 세상은 어떠한지 뉴스와 함께 식사를 마치고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켰다. 어제까지만 해도 창문을 뚫고 들어온 차갑던 공기가 오늘은 어디서 훔쳤을지 모를 연한 온기를 품고 내 손등에 안착했다.
다시 한번 샤워를 하고 두껍게 옷을 껴입고 그 위에 좋아하는 향수를 뿌려 나의 온기를 돌려주려 거리에 나섰다. 공원에서 열심히 턱걸이를 하던 청년에게 조용한 응원을 보내고, 신호를 기다려 저편에 서있는 신호등까지 발걸음을 남기고, 길바닥에 웅성웅성 피어난 데이지에게 사진을 찍어주었다. 그리곤 자주 먹던 커피 맛을 떠올리며 나의 쉼터인 커피집으로 향했다. 평소대로 핸드드립 한 잔을 주문해 구석 자리에 앉아 커피를 기다렸다. 잠시 후 사장님께서 직접 커피를 갖다 주시며 "맛있게 드세요"라는 한 마디 대신 "이건 서비스에요, 단골이 되어가고 있는 거 같아요"라는 말을 꺼내주었다. 참 운수가 좋은 날이다. 우연히 마음에 든 카페가 내가 사는 동네에 있었던 것도, 선선한 가을바람에도 내겐 잠시 피할 곳이 필요했던 것도, 그런 내게 따뜻한 인절미를 내어준 것도 내겐 모두 행운이었다.
그래서 운수 좋은 날이다. 얼마 전 냈던 문학 시 공모전에서 수상자 발표 공지를 해주길 기다리며 며칠을 보냈다. 예정일이 훌쩍 지난 어제에도 수상자는 사전에 연락을 주겠다는 사항을 곱씹으며 마음을 온전히 비우고 어떤 작이 수상 했을까를 고대했다. 내겐 상심할 겨를이 없었다. 시인으로서 나의 계획은 몇 년짜리일까, 당장 짐작이 가지 않는 오늘에도, 그렇게 흘러간 나의 세월은 어느덧 6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시인이 되고 싶다는 바보 같은 미련에 나의 어제는 최선을 다해 남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부족한 나를 인정해야 할 시간으로 삼아야 했다. 이성을 숨기고 싶던 외로운 그 이에게 이성을 돌아보게 하는 현실이 다만 이것만이 원망스러웠다. 그래서 오늘은 운수가 좋은 날인가 보다.
운 좋게 수상을 했고 비록 입선이지만 나의 시가 세상에 와닿았다. 명단의 시 부문에 내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을 발견하고 또 제목엔 익숙한 나의 이야기가 쓰여있는 것을 본 그 순간 이성은 내게서 저 멀리 떨어져 나갔다. 작은 출발이지만 브런치 작가가 되었을 때 나의 포부를 생각해 보면 이번 입선은 시인으로서 나의 삶에 정말 큰 소중한 계단으로 자리 잡을 것 같다. 좋았고 행복한 것은 당연히 그렇고, 뭔가 내가 쓴 시가 오늘 추웠던 늦가을에 1도라도 높여줄 그런 난로가 되었다는 것이 고마웠다. 그래서 다들 오늘은 운수 좋은 날이 아닐까 싶다. 모두에게 따스한 오늘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