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회색 도시>

단편소설#17

by JunWoo Lee

글쓰기 모임인 '숨쉬듯'을 쉬니 소설을 안 쓰게 된다. 외부 환경과 관계 없이 소설을 써야 할 텐데. 반성하는 마음으로 소설을 한 편 새로 써 보자고 마음을 먹었다. 마침 충칭에 다녀왔는데 꽤나 매력적인 도시라 충칭을 배경으로 소설을 쓰게 됐다.


2023년 리장에 다녀오고 리장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썼던 게 마음에 들어 충칭으로도 써 보고 싶었다. 여행을 소설로 기억하는 건 꽤나 괜찮은 방법인 것 같다.


역시 소설 쓰기는 재밌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썼다.



회색 도시



2025-12-18

“저기요.”

여자의 목소리에 남자는 계단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봤다. 가로등이 남자를 비추고 있었다. 남자는 아무 대답 없이 여자를 바라봤다.

“아까 바에서 봤어요. 한국 분이시죠?”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계단을 내려가서 남자 옆에 섰다.

“충칭에서 한국 사람을 보다니 신기해요.”

여자가 말했다.

“그러게요. 제가 한국 사람인지는 어떻게 안 거예요?”

“좀 걸을까요? 날씨가 선선한 게 꼭 한국 가을 날씨 같아요.”

여자는 계단 앞에 이어진 골목으로 걸었다. 남자는 얼떨결에 여자를 따랐다.

“아까 바에서 신청한 노래 저도 좋아해요.”

“안개요?”

“네. 평소에도 좋아하던 노래인데 여기랑 잘 어울려요. 선곡 좋았어요.”

여자가 남자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남자는 멋쩍은 듯 귀를 매만지곤 눈을 돌렸다.

“안개 낀 것처럼 뿌연 도시라 그런가 봐요.”

“여행 온 거예요?”

“네. 오늘 왔어요.”

“아쉽겠네요?”

“왜요?”

“날이 흐려서요.”

“회색 도시라는 말을 듣고 와서 그런지 딱히 아쉽지는 않아요. 오히려 이래야 충칭이지라는 생각도 들고.”

“긍정적이시네요. 저는 아쉬웠는데. 광합성이 중요한 사람이거든요.”

“서로 기대한 모습이 다른 거뿐이죠. 여행 중인 거예요?”

“네. 저도 오늘 왔어요.”

“같은 비행기였나 보네요. 그런데 광합성이 중요한 분이 어쩌다 충칭에.”

남자의 말에 여자는 코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숨을 들이켜 봐요.”

남자는 여자를 바라보다 이내 숨을 들이마셨다.

“어때요.”

“마라 냄새가 살짝 나네요.”

“그쵸. 저는 이걸 기대했어요. 마라에 미친 여자거든요.”

“마라 먹으러 혼자 충칭까지 온 거예요? 저도 아직 안 먹어 봐서 궁금하긴 해요.”

여자는 놀란 눈으로 남자를 쳐다봤다.

“진짜요? 그럼 와서 여태 뭐 했어요?”

“도착해서 짐 풀고 골목 돌아다니면서 사진 좀 찍었어요. 사진 찍으러 여기 온 것도 있거든요.”

“대박. 사진가예요?”

“아뇨. 그냥 취미예요.”

“정말요? 사진 찍은 거 보여 줘요.”

“오늘은 금방 어두워져서 많이 못 찍었어요. 옛날 카메라라 저조도에서 잘 안 찍히거든요.”

“에이. 장인은 연장 탓 안 한다던데.”

“장인이 아니거든요. 내일 돌아다니면서 많이 찍어 봐야죠.”

“저녁은 먹었어요?”

“아뇨. 기내식을 먹어서 나중에 숙소 들어가서 야식이나 먹으려고요.”

“충칭 왔으면 훠궈를 먹어야죠.”

“마지막 날 먹으려고 아껴 뒀어요.”

“별 걸 다 아끼네. 같이 먹어요. 훠궈는 혼자 먹기 아쉬우니까. 여기 바로 앞에 봐 둔 곳이 있어요.”

“생각해 보니 혼자 먹기 좀 그렇긴 하네요. 좋아요.”

“아싸. 훠궈 메이트 찾았다.”

여자의 말에 남자는 미소를 지었다. 남자가 여자를 따라 골목을 나오자 마라의 냄새가 짙어지고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길가에 늘어선 테이블에서 사람들이 훠궈를 먹고 있었다.

“가게에 사람이 많길래 고덕 지도에서 봤는데 여기 평점이 높더라고요. 로컬 맛집인가 봐요.”

둘은 가게 안쪽에 난 자리에 앉았다. 여자는 앉자마자 테이블 위의 QR코드를 스캔해서 메뉴를 확인했다.

“뭐 시킬까요?”

“마음대로 시키세요. 저는 다 잘 먹어요.”

“홍탕이랑 토마토탕 하나 시킬게요. 백탕은 아무래도 심심할 것 같아서.”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기나 완자 같은 건 알아서 시킬게요.”

남자는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주위에서 훠궈를 먹는 사람들을 둘러봤다. 시뻘건 훠궈 탕이 용암처럼 끓고 있었다.

“매운 거 잘 먹어요?”

“음. 웨이라(微辣) 어때요?”

“맵찔이네요. 아쉬운데 어쩔 수 없죠. 술 마실 거죠?”

“보니까 다들 맥주를 마시네요.”

“산청 맥주가 여기 맥주인가 봐요. 산청 맥주 어때요?”

“좋아요.”

“주문 끝! 소스 만들러 가요.”

둘은 식당 소스 선반에 가서 각자의 소스를 만들어 왔다.

“소스가 참 무미건조하네요.”

여자가 남자의 소스를 보고 말했다. 참기름을 곁들인 즈마장 소스에 다진 마늘과 파가 조금 올려진 게 전부였다.

“훠궈도 매울 텐데 소스 괜찮겠어요?”

여자의 소스는 고추기름과 다진 마늘 그리고 고수로 가득했다. 여자는 젓가락으로 소스를 섞었다.

“먹을 거면 제대로 먹어야죠.”

서로의 소스를 견주는 사이 훠궈가 둘 사이에 올려졌다. 나눔냄비 한 편에는 토마토탕이, 다른 편에는 홍탕이 들어차 있었다. 그 뒤로 대패, 완자, 양상추, 곱창, 두부피 그리고 볶음밥이 훠궈를 둘러쌌다. 빈틈없이 채워진 상을 보고 남자의 눈이 동그래졌다.

“뭘 이렇게 많이 시켰어요.”

남자의 말에 여자는 웃었다.

“가격이 싸서 양이 적을 줄 알고 막 시켰는데 여기 중국이었죠? 이렇게 시켰는데 3만 원도 안 돼요.”

“첫날부터 원 없이 먹겠네요.”

남자는 주머니에서 카메라를 꺼내 훠궈를 찍었다. 여자는 맥주를 따라 한 잔은 남자 앞에 뒀다.

“그나저나 웃겨요. 훠궈를 마지막 날 먹으려고 아껴 뒀다니. 뭐 하러 그래요?”

“제일 좋은 건 가장 마지막에 즐기는 편이에요.”

“왜요?”

“제일 좋은 걸 먼저 경험하면 그다음이 시시해지잖아요.”

“그렇게 미루다가 제일 좋은 걸 경험 못 하면 어떡해요.”

“그럴 수도 있겠죠.”

“제 덕분인 줄 아세요.”

여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남자도 여자를 보며 웃었다.

“고마워요. 짠 할까요?”

“짠.”

훠궈가 이내 펄펄 끓기 시작했고 둘은 부지런히 집게와 젓가락을 움직였다. 빠트리고 건져 올리고 버무리고 입에 넣었다.

“웨이라인데 맵네요.”

남자가 습습 거리며 말했다.

“이 맛이죠. 역시 마라의 고장.”

홍탕에는 주로 여자의 손이, 토마토탕에는 주로 남자의 손이 갔다. 훠궈를 둘러싼 그릇이 비워질수록 맥주 빈 병도 함께 늘어났다. 네 병 정도가 모였을 때 훠궈는 더 이상 끓지 않았다.

“질리도록 먹었네요.”

남자가 말했다.

“마라에 혼쭐났어요.”

여자가 습습 거리며 말하자 남자가 웃었다.

“내일 괜찮겠어요?”

“전 아직 젊어서 괜찮아요.”

“벌써 10시가 넘었네요. 슬슬 나갈까요? 가게도 마무리하는 분위기고.”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가게 밖으로 나왔다.

“숙소는 어디 쪽이에요?”

여자가 물었다.

“저는 저기 해방비 쪽에 있어요.”

“번화가 쪽에 잡았네요.”

“그쪽은요?”

“여기 근처예요. 걸어서 10분?”

“소화시킬 겸 같이 가요. 술도 마셨고 거리도 어두우니까.”

“데려다주는 거예요? 아싸.”

여자는 발그레한 얼굴로 웃었다.

“취한 거 아니죠?”

“멀쩡해요. 맵찔이면서 알쓰인 건 아니죠?”

“저는 많이 안 마셨어요. 거의 그쪽이 마셨지.”

“그런가.”

둘은 길가를 걷다가 골목으로 들어가 계단을 올랐다. 계단을 오르고 조금 걷다 보면 또다시 계단이 보였다.

“충칭이 사진 찍기 좋아요?”

여자가 물었다.

“입체적인 도시로 유명해요. 산을 타고 지어진 도시라 재밌는 풍경이 많대요. 어딘가의 일층이 어딘가의 옥상인 것처럼.”

“유튜브에서 그 얘기 들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계단이 많은 거구나. 충칭에 미녀가 많다더니 계단 오르내리느라 살이 빠져서 그런가 봐요.”

“그러고 보니 여기는 자전거도 잘 안 보이네요. 원래 중국에는 공유 자전거 천지인데.”

“오올. 관찰력 짱이다. 저는 몇 살 같아 보여요.”

여자가 남자에게 얼굴을 보이며 물었다.

“갑자기요?”

남자는 여자의 얼굴을 한 번 보고는 앞에 이어진 길로 시선을 돌렸다. 남자의 얼굴도 발그스름했다.

“어두워서 잘 모르겠어요.”

“에이. 아까 훠궈 집에서 다 봤으면서.”

“그때는 먹느라 정신없었고. 근데 아직 서로 이름을 모르네요. 이름이 뭐예요?”

“비밀이에요.”

“별 게 다 비밀이네.”

“알면 알수록 시시해지는 게 인생이에요. 몰라야 재밌죠. 여행도 그래서 가는 거 아니겠어요?”

여자는 걷다가 한 건물의 출입문 앞에 섰다. 남자도 따라 섰다.

“여기예요?”

“맞아요. 오늘 즐거웠어요.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훠궈 같이 먹어 준 보답이에요.”

남자의 말에 여자는 미소를 지었다. 여자는 비밀번호를 누르고 숙소 출입문을 열었다.

“바이바이.”

문으로 들어가는 여자를 보며 남자는 어색하게 손을 반쯤 들어 인사를 했다. 왼손으로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지만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갑자기 여자가 뒤를 돌아 반쯤 열린 문에 기대 남자를 바라봤다.

“이대로 들여보낼 거예요?”

여자의 아롱거리는 눈빛에 남자는 당황했다.

“저희.. 서로 이름도 모르는데요?”

“싫으면 말고요.”

여자는 다시 등을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남자는 머뭇거리다 여자의 뒷모습 뒤로 닫히는 문의 손잡이를 가까스로 잡았다.



2025-12-19

남자는 아침 해에 눈을 떴다. 잠시 멍하니 있다가 침대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봤다. 여자는커녕 여자의 짐도 보이지 않았다. 시간을 보니 곧 오전 11시였다. 남자는 경황없이 옷을 챙겨 입고 방을 나섰다. 무인으로 체크아웃하는 숙소로 보여 남자는 여자의 행방을 수소문할 곳이 없었다.

택시를 타고 원래 호텔로 돌아가 몽롱한 표정으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정신 차리고 시간을 보니 오후 2시였다. 깊은 한숨을 한 차례 쉬고는 화장실에 가서 이를 닦고 차가운 물로 세수를 했다. 옷을 입고 카메라를 챙겨 밖으로 나왔다. 오늘도 여전히 날씨가 흐렸다.

충칭 오기 전에 인터넷에서 봤던 쌍강교(双江桥)를 촬영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쌍강교는 충칭을 가로지르는 장강(长江)과 자링강(嘉陵江)이 만나기 직전에 지어진 두 개의 현수교를 통칭했다. 장강의 동쉐이먼 대교(东水门大桥), 자링강의 첸스먼(千厮门大桥) 대교. 두 다리는 쌍둥이처럼 태어나서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먼저 호텔 남쪽으로 흐르는 장강으로 향했다. 어두워지기 전에 장강을 건너는 빨간 케이블카를 찍기 위해서였다. 동쉐이먼 대교는 사진으로 본 것보다 웅장했다. 붉은색의 철교를 지탱하는 두 개의 거대한 흰색 주탑이 멀리서도 눈에 들어왔다. 오렌지 빛에 가까운 케이블이 하프의 현처럼 주탑과 철교를 잇고 있었다.

장강은 폭이 한강과 비슷해 보였지만 더 야성적으로 느껴졌다. 흘러오며 삼킨 것도 많은지 강물도 황토색이었다. 남자는 장강을 버티고 서 있는 동쉐이먼 대교에 서서 사진을 찍었다. 장강 위를 지나는 빨간 케이블카도 찍었다. 사진을 확인한 후에는 미소를 지었다. 날이 흐린 덕에 채도가 낮아져 빨간색이 살아났다.

다리 위를 오가며 사진을 얼마간 더 찍고는 북쪽의 자링강으로 향했다. 만족스러운 사진 때문인지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가는 길에 충칭식 자장면을 먹었다. 중국식 된장이 위에 얹혀 있는 평범한 자장면으로 보였으나 면 아래 걸쭉한 라장(辣酱)이 깔려 있었다.

남자는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자장면을 사진으로 남기고는 면과 소스를 버무렸다. 조심스레 한 입을 했다가 이내 젓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면다발을 들어 올렸다. 라장의 윤기가 흐르는 면을 바로 입에 가져갔다. 그릇은 빠르게 비워졌고 남자는 흡족한 표정으로 가게를 나와 다시 북쪽으로 걸었다.

자링강은 장강보다는 폭도 좁고 점잖았다. 색도 푸른 편이었다. 그 성격에 따라서인지 첸스먼 대교에는 주탑이 하나만 있었다. 같은 모양이지만 더 장대한 동쉐이먼 대교를 봐서인지 사진을 많이 찍지는 않았다. 남자는 난간 너머로 보이는 충칭 대극장을 몇 번 찍고는 다리 위를 산책했다.

다리 위를 걷다가 반대편에 서 있는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여자는 빨간색 니트를 입고 다리의 난간에 기대어 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는 얼른 카메라를 들어 프레임 안에 여자의 뒷모습을 담았다. 회색 도시, 그 안에서 살아나는 색들이 있다. 한 차례 혼잣말을 하고는 여러 차례 셔터를 눌렀다.

그때 여자가 뒤를 돌았다. 남자는 홀리듯 사진을 찍다가 여자의 얼굴을 보고는 놀랐다. 어제 만났던 여자였다. 여자는 다리의 남쪽 방향으로 걸었다. 남자는 잠깐 멍하니 서 있다가 여자와 같은 방향으로 걸었고 이내 뛰기 시작했다. 도로 건너편으로 가기 위해 정신없이 달렸다.

남자는 이내 첸스먼 대교 서쪽 편 보도로 넘어왔다. 저 앞에서 여자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남자는 여자 쪽으로 걸어가 모습을 비췄지만 여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지나쳤다. 남자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다시 여자에게 가까이 갔다.

“저기요.”

남자가 부르자 여자는 뒤를 돌아 남자를 쳐다봤다.

“네?”

“저희 어제 보지 않았어요?”

“네?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여자는 영문을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저희 어제 바 앞에서 만나서 훠궈 먹었잖아요.”

“죄송해요. 사람 잘못 보신 거 같아요. 저 오늘 충칭 처음 왔어요.”

여자의 말에 남자는 말을 잇지 못했다.

“제가 할 일이 있어서..”

여자는 고개를 한 번 숙이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남자는 멀어져 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여자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어서야 남자도 자리를 떠났다. 그 뒤로는 바닥을 보고 걷느라 사진을 찍는 일도 없었다. 얼마간 거리를 방황하다가 호텔로 돌아갔다.

아침처럼 침대에서 뒤척이며 한숨을 쉬길 반복하다 카메라를 켰다. 다리에서 여자를 찍었던 사진을 앨범에서 찾았다. 여자의 얼굴이 흐릿하게 나온 사진이 하나 있었다. 여자가 뒤를 돈 순간에 찍힌 듯했다. 다시 봐도 어제 만난 여자의 얼굴이었다.

남자는 사진을 쳐다보다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호텔 밖으로 나오니 어느덧 밤이었다. 어제 갔던 레코드 바로 향했다. 우연히 발견하고 들어간 곳이었기에 이름은 몰랐다. 여러 번 계단을 오르내리고 골목을 헤맨 끝에야 바를 찾을 수 있었다. 바의 이름은 샨하이(山海)였다. 낡은 철문 틈으로 재즈가 흐릿하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어제처럼 남자 사장과 여자 손님이 보였다. 바 안은 어두웠지만 여자의 얼굴을 분간하기엔 충분했다. 여자는 바 테이블에 앉아 종이에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있었다. 남자는 잠시 머뭇거리다 반대편 바 테이블 자리에 앉았다. 둘 사이에 사장이 있어서 시선이 살짝 가려졌다.

사장은 어제처럼 공간 이용 안내서를 줬다. 음악 감상에 집중하는 레코드 바. 신청곡은 한 사람 당 한 번. 남자는 글렌피딕 12년을 온더락으로 주문했다. 위스키를 마시며 사장 뒤편으로 보이는 여자를 지켜봤다. 어제 본모습과 달리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세 번째 글렌피딕이 나왔을 때 남자는 앞에 놓인 메모지를 뜯어 신청곡을 썼다. 사장이 메모지를 받아가고 얼마 뒤 신청한 음악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여자는 음악을 듣고는 잠시 고개를 들었다. 남자는 그 모습을 보다 눈이 마주칠까 고개를 숙였다.

얼마 뒤 여자는 기지개를 한 번 켜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를 정리하고 남자 쪽으로 오는가 싶더니 지나쳐 바를 나섰다. 남자는 고개를 돌려 출입문을 한 번 쳐다보고는 일어나서 가게 밖으로 나갔다.

“저기요.”

남자의 목소리에 여자는 계단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가로등이 여자를 비추고 있었다. 여자는 아무 대답 없이 남자를 바라봤다.

“할 일은 다 끝내셨나요?”

남자가 물었다.

“아. 아까 그분이시네요. 음악 잘 들었어요. 좋아하는 곡이에요.”

“Try요?”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계단을 올라가서 여자 옆에 섰다.

“날이 선선하네요.”

남자가 말했다.

“그러게요.”

“이제 들어가시는 건가요?”

“그러려고요.”

“다름 아니라 제가 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어떤 거요?”

남자는 주머니에서 카메라를 꺼냈다.

“아까 다리에서 우연히 보고 사진을 찍었어요.”

여자는 남자의 카메라에서 자신의 사진을 봤다.

“우와.”

“뒷모습이긴 한데 불쾌하시면 지울게요.”

“아뇨. 너무 좋은데요. 이 사진을 주시는 건가요?”

“물론이죠.”

“사진작가이신가 봐요.”

“아뇨. 그냥 취미예요.”

“사진이 정말 마음에 들어요. 오늘 쓴 글이랑도 분위기가 어울려요.”

“아까 종이에 뭐를 열심히 적던데 글을 쓰시나 보네요.”

“맞아요. 소설을 써요.”

“멋지다. 작가님이셨군요. 저도 소설 좋아해요. 제 사진과 어울린다니 어떤 내용인지 궁금하네요.”

“아직 작가는 아니고 꿈이에요. 그런데 어디 가세요. 들어가시는 거예요?”

“음. 날씨도 선선한데 산책 어때요?”

“좋아요.”

여자가 미소를 지었다. 둘은 계단 뒤로 이어진 골목을 걸었다.

“숙소는 어디 쪽이에요?”

남자가 물었다.

“비밀이에요.”

“역시. 이름도 비밀이죠?”

“그럼요.”

“비밀이 많으시군요.”

“비밀이 많은 여자가 좋은 여자라고 했어요.”

“누가요?”

“바닷마을 다이어리라는 영화에서요.”

“저도 그 영화 봤어요. 영상미도 아름답고 음악도 좋죠.”

“맞아요. 제가 칸노 요코를 좋아하거든요. 카우보이 비밥 노래도 자주 들어요.”

“영화를 좋아하시나 봐요.”

“동경해요. 언젠가 그런 멋진 이야기를 쓰고 싶어요.”

남자는 옆에서 여자를 봤다. 여자의 눈에 가로등의 불빛이 맺혀 있었다.

“오늘 쓴 글이 그런 이야기가 될 수도 있죠.”

“고마워요. 잘 마무리해 봐야죠. 이번 글은 꽤나 마음에 들거든요.”

“어떤 글이에요?”

“장르는 로맨스예요. 아니, 치정이 더 맞겠네요. 두 남자 사이에서 갈등하는 한 여자의 이야기예요.”

여자는 걷다가 남자를 한 번 쳐다봤다.

“계속 말해 줘요. 궁금해요.”

남자의 반응을 살핀 여자는 다시 말을 이었다.

“여자는 A라는 남자와 연인 관계예요. 사람들 모두 선남선녀라 할 정도로 부러움을 사는 커플이죠. A는 여러모로 조건이 괜찮은 남자였어요. 직장이 좋은 건 물론 키도 크고 얼굴도 괜찮고 자기 관리도 잘했죠. 양지에서 햇빛을 듬뿍 받고 자란 듯 성격도 그늘지지 않았어요.”

“육각형 남자네요.”

“반면에 여자는 자존감이 낮고 불안이 많았어요. 스스로의 능력에 자신이 없었고 외모도 시간이 지나면 시들 거라 생각해요. 그때가 되면 스스로가 물러터진 복숭아처럼 되지 않을까 걱정하죠. 그렇게 되기 전에 결혼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소개팅을 하다가 남자 A를 만난 거예요.”

남자는 여자의 이야기를 따라가고 있었다. 갈림길이 나타나도 남자는 고민 없이 여자의 발걸음을 따랐다.

“여자가 A와 1년 정도 사귀었을 때 회사에서 남자 B가 나타나요. 타 부서에서 여자와 같은 부서로 이동해 온 거였죠. B는 일을 곧잘 했고 사근사근해서 부서원들한테도 금방 호감을 샀어요. 여자 또한 자신과 다르게 금방 부서에 적응하는 B에게 관심을 갖게 되죠.”

“시작이군요.”

“얼마 후 열린 B 환영 기념 회식에서 여자는 남자가 소설을 쓴다는 말을 건너 들어요. 여자도 평소에 남모르게 블로그에 글을 쓰고 있었기에 B에 대한 호기심이 커지죠. 마침 둘이 집 가는 방향이 같아 여자는 B에게 글을 보여 달라고 해요. B는 흔쾌히 자신의 블로그를 알려 주죠. 그날 뒤로 여자는 B의 소설을 읽으며 그에게 점점 빠져들어요.”

“B의 소설이 재밌었나 보네요.”

“그런 것도 있었겠지만 여자는 B가 자신과 결이 비슷하다고 느꼈어요. 성별은 다르지만 B는 여자가 되고 싶은 모습이었어요. 자신만의 세계가 있는 사람. 여자는 B의 글을 읽으며 자신의 세계 또한 그렇게 확장될 수 있지 않을까 그려 봐요.”

“A는 기댈 수 있는 남자지만 B는 닮고 싶은 남자인 거군요.”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설을 다 읽고 여자는 B와 더 친밀해져요. B도 자신의 글을 읽어 준 여자에게 호감을 갖죠. 둘은 곧 회사 외적으로도 연락하는 사이가 돼요. 여자는 자신이 쓴 글을 B에게 보여 주기도 하죠. 누군가에게 글을 보여 주는 건 처음이라고 하면서요.”

“왜 남자친구에게 안 보여 준 거죠?”

“양지에서만 있었던 A에게 자신의 그늘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을 거예요. 또 보여 준다고 한들 진정으로 이해받을 수 있었을까요?”

“이해해 주지 못할 것 같은 사람에게는 애초에 말을 안 꺼내게 되긴 해요.”

“B와 만나며 여자는 자신이 은연중에 A에게 확신을 갖지 못하던 이유를 깨달아요. A에게는 자신의 그늘진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고 결혼을 하면 평생 그러고 살아야 한다는 것. 여자는 A와 평생을 사는 것보다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단면으로 남은 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어요.”

둘은 어느새 골목에서 빠져나왔다. 길가로 나가니 양쪽으로 높은 건물이 늘어서 있었다. 늦은 밤이라 거리는 한산했다. 여자는 정해진 길을 걷는 것마냥 멈칫하는 일 없이 걸었다.

“B를 통해 여자는 자신의 그늘이 벗어나야 할 세계가 아닌 미처 발견되지 않은 세계라는 걸 알게 된 거죠.”

“그럼 답은 정해진 거 아닌가요?”

“여자의 마음은 그랬지만 머리는 그러지 않았어요. A와 그려 온 안정적인 미래를 포기하기 어려웠죠. 여전히 자신 안의 미지를 알아 갈 용기가 없기도 했고요.”

“근데 B는 여자에게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나요?”

“다음 회식 자리가 끝나고 함께 집에 갈 때 B는 여자에게 고백을 해요. 여자는 그때 B에게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말하죠. 자신의 마음을 잘 모르겠다는 말과 함께. 여자는 당황한 표정의 B를 보다가 입을 맞추고 둘은 B의 집에서 밤을 보내게 되죠.”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네.”

“다음 날 여자는 술김에 한 실수라고 생각하며 B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A에게 돌아가요. B를 만나기 전으로 모든 것을 되돌려 놓으려 하지만 쉽지 않죠. A에게 드러낼 수 없는 그늘이 전보다 짙어졌으니까요. A에게 죄책감도 들고 자신이 연기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돼요.”

“그럼 A와 헤어지고 B를 선택하게 될까요?”

“여자는 비록 자신이 시작하긴 했지만 애인이 있는 사람과 잔 B와 미래를 그릴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B는요? 자고 난 뒤에 어떻게 됐어요?”

“B는 손에 쥐었던 걸 빼앗긴 것처럼 그날 이후 여자를 더 원하게 돼요. A와 헤어지고 자신과 만나자고 말하죠. 여자는 B에게 물어요. 애인을 두고 다른 남자와 잔 여자랑 진지하게 만날 수 있냐고. B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해요.”

“모두가 불행해졌네요.”

“여자는 진창에서 벗어나고 싶어 홧김에 비행기 표를 사요. 충칭으로 가는 티켓이죠.”

어느새 둘이 걸어가는 방향에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강바람이었다.

“아. 그래서 제 사진과 이야기가 어울린다고 한 거구나. 그 뒤로는 어떻게 돼요?”

“음. 이다음은 말 안 해 줄래요. 나중에 책으로 나오면 사서 읽으세요.”

여자가 웃으며 말했다.

“궁금한데. 지금 책값 내고 들으면 안 돼요?”

“책값 선불이에요? 재밌다. 고민해 볼게요. 근데 그거 알아요? 여기 앞에서 두 강이 만나요.”

여자가 말을 돌렸다.

“이야기 들으면서 걷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충칭의 랜드마크인 래플스시티 호텔을 지나자 넓은 수변 광장이 나왔다. 강 너머에 펼쳐진 화려한 야경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난간 근처에 모여 있었다. 둘도 난간 쪽으로 걸어갔다.

“한번 와 보고 싶었어요.”

여자가 말했다.

“어제 왔을 때는 그냥 강이구나 싶었는데 두 강이 만나는 곳이라 하니 뭔가 새롭네요.”

여자는 광장의 난간에 기대 하나의 줄기로 합쳐진 강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아까 낮이 떠올라요. 그때도 이렇게 난간에 기대서 강을 바라봤죠.”

“강을 좋아하나 봐요.”

“그럼요. 강을 보고 있으면 강과 하나가 된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강의 흐름에 몸을 맡긴 것 같은 느낌. 정신을 차리고 보면 강이 저 먼 곳부터 이고 온 퇴적물이 손에 들려 있죠. 아까는 손에 쥔 그걸 얼른 글로 써서 옮겨야 했어요. 그래서 그랬어요. 미안해요.”

남자는 놀란 표정으로 여자를 바라봤다.

“그럼 왜 여태까지 다른 사람인 척한 거예요?”

“다른 사람 같았나요.”

“네. 사실 아까 낮에는 농락당한 느낌이었는데 여기까지 오면서는 내가 잘못 봤나 싶었어요.”

“누가 더 좋았어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어제의 저랑 오늘의 저 중에 누가 더 매력적이었나요?”

“음. 어려운데요.”

“한 명 선택해 줘요.”

여자가 강을 보면서 말했다.

“선택하면요?”

“오늘의 저를 선택하면 이야기의 뒷부분을 들려 줄게요.”

“어제의 그쪽을 선택하면요?”

“어제의 저와 시간을 보내게 되겠죠?”

남자는 놀라 여자를 봤다. 하나로 합쳐지는 강을 바라보는 여자의 눈빛이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남자도 여자를 따라 강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2025-12-20

“오늘도 왔군요.”

바 사장이 남자에게 글렌피딕을 따른 잔을 건네며 말을 걸었다. 남자는 멍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잔을 받았다. 바에는 사장과 남자만 있었다.

“그러게요.”

“숙소가 근처에 있나요.”

“저기 래플스시티 호텔에 있어요.”

“좋은 곳에 머무네요.”

“전에 여행할 때는 안 그랬는데 나이가 들수록 숙소에 기대게 돼요. 여행지가 무료할 것을 대비한 보험 같은 느낌이죠.”

남자의 말에 사장이 웃었다.

“벌써 그럴 나이인가요.”

“이제 30대 중반인데 너무 이른 걸까요. 사장님은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저는 이제 곧 50이에요.”

“죄송해요. 건방진 소리를 했네요.”

“아니에요. 저희 바에는 손님처럼 혼자 온 여행자들이 많이 찾아와요. 이렇게 바에 단 둘이 있을 때 이야기를 나누는 게 삶의 낙이죠. 중국에는 몇 번째인가요? 보통화를 잘하네요.”

“대학생 때 상해에서 교환학생을 1년 정도 했어요. 취직을 하고는 가끔씩 혼자 여행을 왔고요. 저번엔 리장에 갔는데 좋더라고요.”

“리장 좋죠. 저도 가 봤어요. 중국인들에게도 인기가 많은 여행지예요. 충칭은 어떤가요.”

“완전 다르죠. 거기는 대자연, 여기는 대도시. 입체적인 도시라 재밌어요.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많이 찍었어요. 회색 도시라 걱정했는데 배경이 흐리니 오히려 피사체의 색깔이 드러나더라고요. 음식도 맛있고..”

남자는 말을 하다가 흐렸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요.”

“근데 바 이름이 왜 샨하이(山海)인가요?”

“충칭의 인구가 얼마나 되는지 아나요?”

“3,200만 명이요. 오기 전에 유튜브에서 봤어요.”

“충칭은 인간이 산과 바다를 이루는 곳이에요. 런샨런하이(人山人海)를 줄여서 지은 이름이죠.”

“아하. 그렇군요.”

“저도 혼자 여행을 많이 다녔어요. 퀴즈 하나 풀어 볼래요?”

“좋아요.”

“자연에 숨는 자와, 도시에 숨는 자의 차이가 뭘까요?”

“음. 모르겠어요.”

“무엇으로부터 숨느냐의 차이예요. 전자는 타인, 후자는 본인이죠. 어때요? 맞는 거 같나요.”

“오.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아요. 리장 갈 때는 번아웃이 와서 벗어나고 싶었는데 이번 여행은 달라요.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라 해야 될까요. 제 안에 제가 너무 많아요.”

“바에 혼자 오는 다른 손님들도 얘기해 보면 비슷해요. 자신에 대한 어떤 기대치도 없는 곳에 와서 스스로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는 거죠. 그런 점에서 충칭은 매력적인 도시라 생각해요. 마치 사람처럼 도시도 입체적이니까요.”

“계단을 오르내리며 한창 헤매는 중입니다. 날도 흐리니 안갯속을 걷는 기분이에요.”

남자가 실소하고는 위스키를 마셨다.

“많이 헤매다 가세요. 술은 적당히 마시고요. 어제는 계단에서 구르는 거 아닌가 했어요.”

사장의 말에 남자는 한숨을 쉬었다.

“저기. 하나 물어봐도 되나요?”

“물론이죠.”

“어제랑 그제 여자 손님 기억나세요? 그 사람도 혼자 왔는데.”

“여자 손님이요? 어제 여자 손님은 없었어요.”

남자가 놀라 사장을 쳐다봤다.

“여자 손님이 없었다고요? 그럴 리가 없는데 어제는 지금 제가 앉은 자리에 앉아 있었어요. 글을 쓰고 있었을 텐데. 어젯밤에 제가 그 여자 따라서 나갔잖아요.”

“이런. 여태 그 여자를 몇 번 만났어요?”

“그제랑 어제 두 번이요.”

“우란(霧蘭)에 홀린 모양이군.”

“우란이요?”

“안갯속 난초라는 물귀신이에요.”

“물귀신이라니. 말도 안 돼요. 제가 사진도 찍었어요. 잠시만요.”

남자는 주머니에서 카메라를 꺼내며 사진을 찾았다. 사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백바 쪽으로 돌아서서 선반에 향을 피웠다.

“루렁류위우덩즈중(汝仍流于吾等之中) 루렁류위우덩즈중(汝仍流于吾等之中)…”

사장이 선반 쪽을 향해 속삭이듯 염을 외웠다.

“여기요. 사진.”

남자가 사장에게 사진을 보여 줬다.

“다시 한번 직접 봐 보세요.”

남자가 사진을 다시 보니 여자가 사라지고 회색빛 배경만 남아 있었다.

“이럴 수가.”

남자는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결제 내역을 봤다. 어제는 보이지 않던 훠궈와 호텔 결제 내역이 있었다.

“우란은 혼자 충칭에 온 여행자에게 들러붙고는 해요. 저희 바에 온 손님 중에도 경험하는 분들이 종종 있죠.”

“허. 말도 안 돼. 그럼 어제부터 제가 혼자 돌아다닌 거예요?”

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우란은 두 모습으로 양일에 걸쳐 나타나요. 둘이 성격이 조금 달랐죠?”

“네. 한 명은 저돌적이었고 다른 한 명은 잔잔했어요.”

“둘을 만나며 어딘가 기시감이 들지 않았나요?”

“기시감이요? 둘 다 한국 사람이긴 했는데.”

“두 여자는 우란이 들러붙은 사람, 그러니까 손님의 정체성 중 일부가 투영된 환영이에요.”

“그럼 저는 여자의 모습을 한 제 자아에 홀린 건가요?”

“어느 정도는 그런 셈이죠.”

“어느 정도라는 게..”

“우란은 강에서 태어난 물귀신이에요. 충칭을 흐르는 두 개의 강이 뭔지 아나요?”

“알아요. 장강과 자링강 아닌가요?”

“맞아요. 두 강은 성격이 달라요. 장강은 모든 것을 삼킬 정도로 야성적이지만 자링강은 상대적으로 고요하죠. 어때요. 감이 좀 잡히나요?”

“우란의 두 모습에 두 강의 성격도 투영된 거군요.”

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장강과 자링강은 각자 쌍강교를 지나 하나의 줄기로 합쳐져요. 합류 지점에서 잠깐 황토색과 푸른색이 나눔냄비처럼 나뉘게 되죠. 그러다가 이내 푸른색이 황토색에 삼켜지고 자링강은 이름을 잃어요.”

“그 뒤로는 장강이라는 이름만 남게 되나 보네요.”

“맞아요. 결국 장강이 본류이기 때문이에요. 그렇게 장강은 중국에서 제일 긴 강이 되어 바다까지 흘러가죠. 이튿날 여자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랬어요.”

“속설에선 우란이 자링강의 첸스먼 대교 주변 기슭에서 태어났다고 보고 있어요. 이름과 색을 잃은 강의 한이 퇴적되어 생긴 물귀신인 거죠.”

“어제 여자가 누구를 선택하냐고 물었을 때 표정이 생각나요. 쓸쓸해 보였어요. 체념한 마음 반, 선택해 주길 바라는 마음 반이었으려나요.”

“그럴지도 모르죠. 그래서 손님은 누구를 선택했나요.”

“기억이 나지 않아요. 밤에 여자와 강을 바라보다가 눈을 뜨고 보니 아침에 혼자 호텔 침대에 누워 있었어요.”

“난초가 다시 안갯속으로 숨었군요.”

“제가 자링을 선택했다면 이곳에 없었으려나요? 한국에서 물귀신은 사람을 물로 잡아간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중국의 물귀신은 그 자리에서 미련을 갖고 기다린다는 인상이 강해요. 누군가의 마음속에선 계속 흐르길 바라는 마음으로 거기에 있는 게 아닐까요.”

“듣고 보니 가여운 귀신이네요. 덕분에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도 됐고.”

“저도 언젠가 만나 보고 싶네요.”

“만나면 이 곡을 들려주세요.”

남자는 신청곡을 적은 메모지를 사장에게 전했다.

“어제랑 그제 신청한 곡이랑 같은 앨범이네요.”

“맞아요. 근데 아까 외던 염불은 무슨 뜻이에요?”

사장은 메모지에 염불을 적어 남자에게 줬다.

“루렁류위우덩즈중(汝仍流于吾等之中) - 그대 여전히 우리 안에 흐른다라는 의미예요.”

“감사합니다.”

“장강, 자링강. 두 강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 땅을 흐르고 침식시키며 충칭이라는 도시를 형성해 왔어요. 충칭이 입체적인 도시가 된 이유도 두 강 덕분이죠.”

“우란이 성불하면 좋겠네요. 물론 사장님까지는 만나고요.”

“제가 이 곡을 전하면서 성불시킬게요.”

남자와 사장이 웃었다.

“저는 그럼 이 입체적인 도시를 더 기억해 두러 가야겠네요. 감사해요.”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이루슌펑(一路顺风).”

미소 짓는 사장을 뒤로하고 남자는 바를 나섰다.

바 출입문 위아래로 계단이 보였다. 남자는 북쪽으로 향하는 위의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지막이 염불을 외며.

“루렁류위우덩즈중(汝仍流于吾等之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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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Woo Lee 커리어 분야 크리에이터 직업 기획자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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