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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ctoria Sep 26. 2021

체홉의 제6병동과 러시아 대륙횡단 열차 6 호칸

Rosa Liksom, Compartment No. 6 (2011)

모스크바로 시작해서 모스크바로 끝나는 소설이다. 핀란디아 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한 이 책은 1980년대 후반 '소녀'라는 3인칭으로 묘사되는 말없는 주인공과 40대 러시아 남자의 모스크바에서 몽골의 울란바토르까지 기차 여행을 그리고 있으며, 정신병원을 배경으로 한 체홉의 "제6병동"에서 제목을 차용한 작품이기도 하다.

두어 달 전 로자 릭솜의 장편소설 "Hytti nro 6"를 영화화한 <Compartment No. 6>이 2021 칸 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러시아에서 공부하고 일하며 2030대의 절반을 보냈고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일부(블라디보스토크-이르쿠츠크, 모스크바-상트페테르부르크)를 타본 적이 있는 내겐 흥미가 생길만한 내용인데, 심지어 남편이 언젠가 구입한 책이 집 책꽂이에 얌전히 자리 잡고 있는데도 선뜻 손길이 가지 않았다. 아마도 너무 익숙해서? 아니, 소설 속 러시아가 너무 아름답고 흥미로워서 다시 가고 싶을까 봐 두려웠던 건 아닐까.


객실에 있던 네 개의 침상 중 위쪽의 두 침상은 접혀서 벽에 붙어 있었고, 아래의 두 침상 사이에는 작은 탁상이 있었으며, 흰 침대보가 덮인 탁상 위의 플라스틱 꽃병에는 시간의 흔적으로 바랜 흰 카네이션이 있었고, 침대 끝에 있는 선반은 세심하게 묶어 고정된 커다란 짐들로 가득 차 있었다.


년 전에 작고하신 아버지가 언젠가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보고 싶다고 하신 적이 있다. 실제로 여행을 가셨다면 아마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하셨겠지만, 그때는 아직 우리나라 사람들이 러시아 여행을 많이 하지 않을 때였고, 기차의 편의시설도 지금보단 좋지 않을 때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낭만적이거나 좋지는 않다고 말씀을 드렸다. 어쨌거나, 꽤 오랜 기간 시베리아 횡단 열차는 많은 사람들에겐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국적인 여행지였고 1986년 시베리아와 몽골을 실제로 여행하기도 한 로자 릭솜은 이 책에서 객실 안 풍경부터 장거리 기차여행 (검표, 물품 배부 등)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승무원 아리사까지 기차여행의 디테일을 실감 나게 그려낸다.

어느 겨울, 3인칭으로만 표현되는 이 소설의 주인공 소녀는 쇼스타코비치 현악사중주 제8번, 크렘린(대통령 관저가 있는 곳), 붉은 광장과 방부 처리된 레닌의 시신, 굼 백화점, 푸시킨 동상, 모스크바의 환상(원형) 도로와 지하철 순환노선, 노브이 아르바트(신시가지), 그리고 그녀가 사랑했던 미트카와 그의 어머니 이리나가 있던 '저녁 태양의 온기를 받아 강철의 푸른빛을 띤 도시' 모스크바를 뒤로 하고 기차에 오른다.

소녀와 남자 친구 사이에 있었던 어떤 일 이후로 상황은 예전 같을 수 없었지만, 우연히 소녀와 같은 칸에 탄 의문의 남자 바딤과 여행길에 만난 많은 사람들-기구한 인생 역정을 거친 노파와 폭격을 맞아 아파트가 무너지는 것을 본 가이드 등-의 이야기들 여행을 마치고 모스크바로 향하는 소녀가 삶의 행복과 불행을 새롭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힘을 준다.


원작은 이를테면 로드무비의 원작이 되기에 적합한 플롯을 지닌 셈인데, 다만 모스크바에서 이르쿠츠크와 하바롭스크를 거쳐 몽골까지 가기엔 스케일이 너무 컸는지 영화에서는 북쪽의 무르만스크로 경로를 바꾼 모양이다. 책의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는 흑백사진과 피사체에 대한 짧은 이야기가 어우러진 로자 릭의 사진집 "Go Moskva go"(1988)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대학교 때 사진동아리 암실에서 하이팜 냄새 좀 맡아본 사람으로서 하는 말인데, 구도나 명암이 꽤 잘 살아있는 사진들이다.

로자 릭은 핀란드 문화계에서는 소설가일 뿐만 아니라 화가로도 꽤 탄탄한 입지를 지닌 인물이다. 아카데믹한 전통이 강했던 핀란드 예술계에 80년대에 미국의 팝아트 현상이 전해지면서 '아이들이나 쓰는 사인펜으로 그린', 팔레트에 섞은 것이 아니라 튜브에서 막 짜낸 물감으로 그린 로자의 그림도 큰 주목을 끌었다고 한다.

접시에 사인펜으로 핀란드 근대사 100년(1904-2004)의 풍경을 그린 "Finlandia"(2005)는 로자 릭이 그림을 그리고 리스토 카우토가 글을 쓴 책이다.

제목에 '체홉'과 '정원'이 자주 등장하는 그녀의 그림들엔 14살 때(1972년) 처음 소련의 무르만스크를 여행하고 러시아어를 배우기 위해 로바니에미의 고등학교에 진학해 영화 동아리에서 타르콥스키와 에이젠슈타인의 영화들을 즐겨 보았던 소녀 안니 율라바라(로자 릭의 본명)의 순수한 호기심과 열정이 담겨 있다.

로자 릭여러 편의 영화를 만들기도 했는데, 아직 극장에서 본 적이 없는 데다 상업용 영화라기보다는 독립영화에 가까워 보여 이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기로 한다.

작가 소개 Rosa Liksom (1958~)

헬싱키 대학교에서 인류학을 전공했다. 많은 곳을 여행하고, 기차에서 만난 사람이나 에로틱한 그림을 의뢰하러 온 부부 고객과도 금방 친구가 되었다는 그녀의 흥미로운 일화들은 "Rosa Liksom: Niinku taidetta"(직역하자면 '예술 같은 것', 2020)에 잘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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