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면, 길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과학소년에서 AI 전략가가 되기까지의 우연한 필연

by 꿀아빠
처음엔, 길이 분명해 보였다


어릴 적엔 과학자를 꿈꿨다.
과학고를 목표로 공부했고,

초등학생 때 ‘수학의 정석’을 반복해서 풀며
나는 내가 어떤 길을 가게 될지 막연히 확신하고 있었다.
중학생 때 이미 물리Ⅱ를 들었고,

올림피아드 상장도 여러 장 생겼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 방향으로 가면 되겠지'라는 생각에는 의심이 없었다.

하지만 과학고 진학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내신과 학교장 추천에서 밀리면서 어릴 적 야심 차게 세웠던 나의 계획은 어긋났다.


일반고에 진학하자 분위기가 달라졌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친한 친구들 따라 자연스럽게 문과를 선택했다.


흔들리며 만난 다른 세계


수능을 여러 번 치렀다.
잘 나올 때도 있었지만 끝까지 집중하지 못해 원하던 S대에는 가지는 못했다.
소위 말하는 국내 Top5 대학에 합격했지만 집에서는 만족하지 않았고 나는 삼수를 선택했다.

그 과정에서 '예술'이라는 전혀 다른 선택지가

눈에 들어왔다.


대단한 결심이라기보다는,
그 시기의 나로서는 가장 솔직한 방향이었다.

나는 엉뚱하고 감수성이 짙었다.

영화과에 진학해 시나리오와 평론을 공부했다.
살면서 처음으로 느끼는 자유로움이었다.

원하는 책을 읽고, 사람들과 밤새 이야기를 나눴다.


하지만 졸업이 가까워질수록
이 공부가 사회에서 어떻게 이어질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잠시 영국으로 떠났다. 도망이라기보다는 진지하게 생각해 볼 시간이 필요했다.


영화제 홍보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고,
그 과정에서 관심은 자연스럽게 광고로 옮겨갔다.

한국에 돌아와 광고회사에 들어갔지만
현실은 내가 상상했던 모습과는 달랐다.
야근이 일상이었고,
창의보다 관계 관리가 더 중요한 환경이었다.


그때부터 '광고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광고를 의뢰하는 사람'의 입장이 궁금해졌다.


대기업 채용 공고를 보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숫자 앞에서 다시 살아난 감각


운 좋게 LG전자에 입사했다.

광고가 아닌 CRM 업무를 맡으면서
커리어의 방향이 다시 바뀌었다.


데이터를 직접 다루며 숫자와 사람의 행동 사이에 분명한 연결이 있다는 걸 체감했다.
이상하게도 이 일은 오래 해도 덜 지쳤다.

짜릿했고, 재미있었다.


그동안 흩어져 있던 경험들이 이 지점에서 조금씩 맞물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 무렵, 이런 생각을 자주 했다.
인생은 정말 알 수 없다는 것.
어릴 때 그렇게 가고 싶었던 KAIST는 이미 멀어졌다고 생각했는데, 회사생활에 깊이 몰입하다 보니 어느새 다시 그 이름을 떠올리고 있었다.


다시 학생이 되기로 한 이유


데이터와 비즈니스를 제대로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다. 그리고 KAIST IMMS에 지원했다.
직장인이 되어 다시 학생이 된다는 건 결코 가볍거나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합격 통지를 받았을 때

‘인생이 또 한 번 방향을 바꾸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IMMS에서 보낸 시간은 단순히 학위를 위한 과정이 아니었다. 그동안 감각적으로만 이해하던 일들을
언어와 구조로 정리할 수 있게 됐고,
내가 왜 이 일에 흥미를 느끼는지도 분명해졌다.


석사 논문으로 다룬

‘가전 구매 고객 여정’은
그 시점의 나에게 가장 현실적인 주제였다.


인생이 다시 재미있어졌다


졸업 이후 회사에 DX 전략 조직이 만들어졌고
이전 경험과 대학원 전공 덕분에 외부 전문가들이 대부분인 그 팀에서 일할 기회를 얻게 됐다.


프로젝트를 통해 데이터를 비즈니스로 연결하는 일을 계속했고 지금은 AI 전략 업무를 맡고 있다.


꽤 인정을 받고, 성과로 그룹에서 주관하는 상을 받은 적도 있지만 그보다 더 큰 변화는 일을 대하는 태도가 다시 살아났다는 점이다.


다음 이에게 건네는 이야기


어느 순간부터 후배들이 커리어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나는 거의 입버릇처럼 대학원 이야기를 한다.

IMMS에서의 시간은 분명 힘들었지만 그만큼 재미있었고, 회사 생활에서 다시 생각하고 고민할 여지를 만들어줬다.


승진과 평가로만 이어지는 단조로운 흐름 속에서
내 일상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어 준 경험이었다.

그래서 실제로 몇몇 후배들은
내 이야기를 듣고 같은 학교, 같은 전공을 선택했다.
그 선택이 각자에게 또 다른 전환점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돌아보면 나는

늘 계획한 대로 살아온 사람은 아니다.
다만 그때그때 누구보다 열중했고,

그 열중이 나를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데려갔다.

물론 좋은 쪽으로.


IMMS는 그 과정에서

내 인생을 가장 크게 한 번 더 꺾어준,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다시, 학교로 간 직장인들』 릴레이 에세이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2017 IMMS 6기

전) TBWA 인턴 입사

전) LG전자 CRM팀 입사

전) LG전자 채널전략부서

전) LG전자 DX전략부서

현) LG전자 AX전략부서 근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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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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